북한 핵심 엘리트 ‘항일 빨치산 가문’의 딸
<런던에서 온 평양 여자>, 책 제목만큼 오혜선 씨를 잘 설명하는 문장은 없는 것 같다. 2016년, 주영 북한 대사관 태영호 공사(현 국민의힘 의원)와 두 아들, 오혜선 씨까지 4명의 가족이 바다를 건너 한국으로 귀순했다. 1997년 망명한 고 황장엽 당시 노동당 비서 이후 북한 내 최고위급 인사 탈북이다. 태영호 의원은 탈북 후 책과 인터뷰로 북한의 권력 구조, 암투를 설명한 적 있지만 북한에서 살아가는, 특히 평양에서 살아가는 시민들의 삶은 상세히 얘기하지 않았다.
북한 평양에서 살아가는 여성의 삶은 그의 아내 오혜선 씨가 쓴 <런던에서 온 평양 여자>에서 볼 수 있다. 오혜선 씨는 북한에서 김정은 일가를 칭하는 ‘백두혈통’ 다음으로 평가받는 항일 빨치산 가문의 딸이다. 증조할아버지 오봉삼은 독립운동가, 아들 모두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셋째 할아버지 오백룡은 김일성의 빨치산 동료이며 해방 후 간부직을 지냈다. 아버지 오기수 또한 김일성군사종합대학 정치부총장을 역임하는 등 권력에 가까운 사람이었다.
아버지 역시 권력의 중심에 있기 위해 많은 것을 포기해야 했다. 유학 시절 만난 아내와 딸을 고려인이라는 이유로 다시 소련으로 돌려보내는 생이별을 해야 했다. 그리고 평생을 마음의 짐으로, 그리움으로 괴로워했다.
하지만 덕분에 오혜선 씨는 평양에서 태어나 비교적 넉넉한 환경 속에서 성장했다. 명문인 평양외국어학원, 평양외국어대학 영어과를 졸업했다. 북한이라고는 하지만 ‘엘리트니까 잘 살았겠지’라는 생각은 책을 읽고 나면 ‘편견’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학교에는 힘 있는 자들의 자녀가 대다수였지만 졸업까지 함께한 친구는 몇 없었다. 예고 없이 숙청돼 일가족이 사라지거나 지방으로 좌천됐다는 이야기가 심심치 않게 들리는 곳, 평양이었다. 오 씨는 책에서 이야기한다. “태양 곁에 너무 가까이 가면 타 죽고 너무 멀어지면 얼어 죽는다”고.
그런 오 씨에게 친구의 소개로 만난 남편은 특별했다. 평범한 집안 출신이었지만 머리가 좋아 엘리트 교육을 받은, 전례 없는 특별한 사람이었다. 몇 번 만나지 않고도 이 사람과 결혼을 마음먹었다.
북한에서도 힘들었던 시집살이와 교육
북한에서도 시집살이는 힘들었다. 시부모와 시동생 부부, 조카, 게다가 때마다 평양으로 올라오는 친척들의 숙소를 겸하기도 했다. 든든한 친정도 오래가지 않았다. 아버지는 말 한마디 잘못한 것이 책을 잡혀 간부 자리에서 물러났고, 첫째 아이는 태어난 직후 몸이 약했다. 승진 대신 해외에 나가야겠다는 결심을 한 것도 아이를 치료하기 위해서였다. 무역성에서 일하며 간 출장은 오 씨의 자유를 향한 마음, 숨겨진 빗장을 열어버린 첫 해방이었다.
잊기 싫어 쓰기 시작한 글이었다. 남편이 정치를 시작하며 부담될 것 같아 접었지만 북한에 대해 알리고, 자유의 소중함을 전하고 싶어 다시 컴퓨터 앞에 앉았다고 한다. 어떤 심정으로 온 것인지 솔직하게 말하기 위해서다. 지난 2월 7일 오후, 서울 강남의 한 카페에서 오혜선 씨를 만나 진솔한 이야기를 들었다. 일문일답 형식으로 인터뷰를 전한다.
자유의 소중함 알리고자 책 출간
저서 <런던에서 온 평양 여자>를 출간한 계기는?
(탈북 후) 오래전부터 책을 하나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생각했던 것보다 한국분들이 북한에 대한 이해가 많이 없으시더라. 가만히 생각해보니 북한 정보를 한국에서 얻기 어렵고 가본 사람이 없어서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이 많겠구나 싶었다. 북한의 진실에 대해 알리겠다는 생각으로 잊기 전에 집필을 시작했다. (그러다가) 남편이 정치를 시작하면서 부담이 될 것 같아 접었다. 그런데 남편을 향해 “배신자다, 간첩이다”라는 댓글들이 달리더라. 처음에는 막연하게 ‘어쩜 이러나’ 싶었는데 가만 생각하니 일리가 있더라. 우리가 어떤 심정으로 왔는지 구체적으로 한 번도 알릴 기회가 없었다. 보시는 분이 해석하기 나름이지만 솔직하게 말하고자 했다. 최선을 다하겠다는 생각으로 지난해에 집중적으로 썼다.
많은 사람이 남한으로 오게 된 이유를 가장 궁금해한다. 책에서 쓴 이야기를 보면 ‘자유’에 대한 갈증이 커 보이는데?
창문틀 하나도 당 지시가 없으면 달지 못한다. 북한 사람들은 아직도 그렇게 추운데도 창문 하나 못 달고 산다.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자유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북한 사람들은 잘 모른다. 모를 땐 괜찮다. 하지만 자유가 없다는 걸 깨닫고 나면 매 순간이 스트레스다. 살 수 없다. 말할 자유도 없다. 당 정책, 방침대로만 해야 한다. 그렇게 입이 굳어진다. 토요 학습 시간이라는 게 있는데 이때 토론 시간이 있다. 친구들은 일어나 청산유수로 말을 하는데 나는 안 되더라.
북한에서 여성의 삶은 어떠한가?
북한 여성들의 생존력이라고 해야 하나? 강하다. 한국 여성들도 그렇지 않나? 북한은 정책적으로 여성을 보호하고 힘든 노동에서 해방시켜야 한다고 하지만 말뿐이다. 생활이 보장돼야 여성들이 그런 부담에서 해방되는데 월급으로는 하루 한 끼 가족들 먹이기도 어렵다. 북한에서도 여성 간부를 키우라고 많이 말하지만 가정일이 있으니 일하기 어렵고 애를 키우기라도 하면 더더욱 힘들다. 자연스레 직장에서 남자보다 일을 더 못하게 된다. 남한처럼 남자들이 육아휴직을 하는 것도 없다. 요즘 북한 여자들이 직장을 안 다니려고 하는 이유다. 대신 시장으로 다 나간다. 남자들은 시장 일을 못 하게 하기 때문에 여성이 나가서 시장에서 장사를 한다. 그렇게 가족을 먹여 살리려는 것이다.
남편 태영호 씨는 어느 정도 소득이 보장되는 위치 아니었나? 가정주부로 살지 않은 이유가 특별히 있나?
대사관에서는 남편, 아내 둘 다 일하면 더 높은 월급을 받는 한 명에게만 보수가 지급됐다. 거기서 일한 건 다 무보수 노동이었다. 직장에 다니면서 번 월급도 보잘것없었다. 하지만 어머니가 집에서 놀면 가치가 없어진다고 말씀하셨다. 남편이랑 같이 나가서 사회생활을 해야 시대에 뒤떨어지지 않는다고.
해외 출장 중에 여성이라는 이유로 남성 팀원들의 식사를 챙기는 것을 ‘여자의 본분’이라고 표현했다. 북한에서 여성의 사회적 위치는 어떠한가? 남편이 집안일에 협조적이었나?
이제 세상이 바뀌지 않았나. 한국 와서 알았다. 남자, 여자 직업이 따로 없다는 것을. (그래도 북한에서) 남편은 그런 면에선 특이한 편에 속했다. 아이들 기저귀도 나서서 갈았다. 쓰레기도 남편이 버려줬다. 출근할 때마다 쓰레기봉투를 들고 타니까 엘리베이터에 상주해 있는 운전공이 나한테 맨날 그랬다. “복도 많다”고. 외국에 다니며 호강하는데 남편이 쓰레기까지 아침에 들고 다닌다고 그랬던 거다. 북한에서는 눈이 오면 각 가정이 담당 구역을 치워야 하는데 다른 집들은 여자들이나 애들이 나간다. 아빠들은 안 나간다. 하지만 우리 집은 남편이 나갔다. 끝나고 나면 다른 집 엄마들이랑 애들이랑 하하, 호호 웃으며 들어왔다. 모범 세대주라고 칭찬을 많이 받았다.
“평양 금수저의 삶&탈북과 정착&자녀 교육”
교육열이 강한 남편… 자녀들 엄하게 키워
자녀들을 위해 아침마다 영어 뉴스를 틀어놓고 준비한 교육 방법이 인상적이었다. 직접 생각해낸 방법이었나?
남편이 생각한 방법이다. 남편이 외국어를 할 줄 알아서 안 쓰면 잊어버리는 것을 알았다. (나보다) 교육열이 강했다. 아침에 눈뜨면 카세트테이프를 틀어 1시간 동안 똑같은 이야기를 듣게 했다. 아이들이 나갈 채비를 하는 동안 영어를 듣게 하려 했다. (유럽 생활 때는) 아침에 밥을 먹을 때마다 작은 TV를 틀어놓고 뉴스를 봤다. 저절로 각인되면서 공부가 됐던 것 같다. 나는 애들을 좀 더 재우려고 했는데 남편이 일찍 깨웠다. 어찌 보면 악착스럽기도 하다. 남자는 돈 쓰는 법보다 버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강조했으니.
평양에서 아이들이 어렸을 때 주탁아소(주중에 아이를 맡기는 유치원)에 맡겼다고 하던데, 탁아소에서 먹은 음식은 저단백에 저열량인데 주말에 집에 와서 먹은 음식은 기름지고 고단백이라 설사를 계속했다는 이야기가 인상적이었다.
아마 저만 그렇게 키웠던 것 같다. (웃음) 나는 아이 때 편하게 살았다. 부모님이 예체능을 배우라고 했는데 안 배웠다. (부모님이) 싫다고 하는 건 안 시켰다. 커보니 그게 후회되더라. 악착스럽게 공부할걸…. 어릴 때 뭘 하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나. 우리 아이들한테는 견뎌내라고 했다. 남편이 옆에서 버팀목이 돼줬다.
복지 시스템 붕괴된 북한, ‘법이 통하지 않는다’
일부 유튜버는 평양이 살기 좋다고 말하기도 하는데, 실제로 그렇다고 생각하나?
그분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는 모르겠다. 북한에서 살면서 첫 번째로 바랐던 건 열심히 일했으면 먹고살 만큼 월급을 달라는 거였다. 복지 제도가 허울뿐인 사회에서 모든 게 뇌물로, 뒷거래로 통한다. 아이를 낳아도 모유를 줄 수 없으면 분유를 사야 하지 않나? 그런데 외화가 없으면 사기 힘들다. 큰아들이 아픈데도 병원에 갈 수 없고 치료받을 수 없으니 무조건 애를 살리려면 외국에 나가야 한다는 일념 하나로 살았다. 빨치산 자녀인 나도 이렇게 힘들게 살았는데 그런 북한을 찬양하는 사람이 있다면 내 입장에선 거짓말 같다.
평양 시민과 다른 지역 주민의 삶이 다른가?
차이점은 분명 있다. 지하철, 교통, 의료, 문화시설 인프라는 평양이 훨씬 잘돼 있다. 평양은 아스팔트 포장길이지만 다른 데는 아니다. 모든 게 평양에 집중돼 있다. (지방에 사는) 농사꾼들의 삶은 더 힘들다. 농민들은 자기 땅이 없고 군량미 등 국가에 내야 하는 몫이 정해져 있다. 협동농장에서 일하려면 농기계, 비료 등 먼저 임대했던 것들을 가을에 계산해야 한다. 그러니 농민들이 수확량을 애초에 적게 잡는다. 숨긴 만큼 땅에 파묻는 거다. 먹고살려고. 걸리면 총살되기도 한다. 군량미를 거두지 못하면 국가가 위험하니 군대가 무장을 하고 가서 뺏어간다. 영양실조로 머리카락이 제대로 나지 않는 사람도 많다. 가슴 아픈 일이다.
모든 게 뒷거래로 통한다고 했다. 북한 사람들이 정해진 걸 어겨가면서까지 생존하고자 하는 것 같다.
법이 통하지 않는다. 있어봐야 소용없다. 모든 게 김씨 일가의 말이 절대적이다. 법이 실현되려면 사람들이 월급을 받고 정상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 북한 월급은 1달러가 채 안 된다. 그걸로 못 산다. 먹고살려면 어쩔 수 없다. 과자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과자를 훔쳐 팔아서 산다. 법 개념이 없는 거다. 북한에선 다 매수하면 된다. 단속하러 나온 사람도 국가에서 주는 월급이 없다. 그들도 먹고살아야 하니 뇌물을 받는다.
장사하지 않고 월급으로 살 수는 없나?
남편 월급으로 살았다. 외국에 나가 적은 월급이라도 외화로 받으니 절약해놓았다가 북한에 돌아가면 그것을 쓰면서 버텼다. 3~4년 정도는 버틸 수 있다. 월급만 받아서 생활할 수 있는 직업은 없다.
대사관 생활을 할 때 직원 부인들이 유럽의 중고 물건을 매입해 북한에 보내 되파는 방식으로 생활한다고?
그런 사람들도 있었다. 수완, 인맥이 있어야 하는 일이다. 근데 나는 중고품을 돈 받고는 못 팔겠더라. 형제들과 친척들이 물건을 골라 가고 남은 건 베란다에 두다가 깨져서 버리고 그랬다.
남편은 교육열이 강했다. 아침에 눈뜨면 카세트테이프를 틀어 1시간 동안 똑같은 이야기를 듣게 했다.
아이들이 나갈 채비를 하는 동안 영어를 듣게 하려 했다. 저절로 각인되면서 공부가 됐던 것 같다.
나는 애들을 좀 더 재우려고 했는데 남편이 일찍 깨웠다. 어찌 보면 악착스럽기도 하다. 남자는 돈 쓰는 법보다 버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강조했으니.
아버지도 탈북 응원했을 것… 빵 좋아하던 어머니 생각나
한국행을 선택하는 데 아버지가 지지해줄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아버지는 가족을 소련에 보내면서 북한 정권을 위해 충성을 선택했다. 그 시대에는 무조건 복종했지만 후대에서도 그러길 바랐을까 생각했다. 나는 내 가족은 스스로 지켜야겠다고 결심했다. 아버지도 말 한마디에 군복을 벗고 지방으로 좌천됐다. 말년에 다시 평양에 올라왔지만 마지막까지 딸을 못 보고 돌아가셨다. (북한 외교관들은 해외 공관에 파견되면 부모님이 돌아가셔도 북한에 돌아갈 수 없다고 한다.) 그걸 보고 북한 사회에서 김씨 일가 말고는 ‘다 노예구나’ 깨달았다. 많은 북한 사람이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질 운명을 산다. 나를 금수저라 칭하지만 간부를 오래 하던 사람이 자리를 내놓게 되면 더 불쌍한 측면이 있다. 일반 사람들은 장사도 하면서 먹고사는 노하우가 있지만, 간부들은 자리에서 물러나면 집, 차 등 가진 것을 다 내놓게 된다. 그래서 난 오히려 ‘아버지가 너라도 가서 잘 살아라, 나는 딸을 놓쳐 평생 후회했지만 너는 그러지 말라고 바라실 거다’라는 심정으로 한국에 왔다.
한국에 온 지 6년이 돼간다.
내가 영어를 할 줄 알지만 한국말을 써야 하지 않나. 남과 북은 억양이 많이 달랐다. (억양이 다르면) 주변에서 나를 쳐다볼까 봐 1년 정도는 밖에 나가서 말을 잘 안 했다. 뉴스도 보고 대학도 다니면서 조금씩 적응했다.
아무래도 북한과 다른 부분이 많다. 어떤 점이 가장 힘들었나?
은행 시스템과 세금을 잘 몰랐다. 북한에서는 은행에 저금하라고 하는데 저금하면 그 돈을 찾을 수 없다. 외화가 있다 치더라도 개인이 외화를 가지고 있을 수 없다고 정해져 있으니 출처를 뭐라고 댈 건가. 다 불법이다. 인민반장들은 저금하라고 돌아다니며 얘기하지만 다 형식상 그러는 거다. (은행과 세금 등 모르는 것을) 한국에 와서 책을 보며 배웠다. 모르면 도서관에 가서 검색하고 네이버도 애용했다. 댓글이나 블로그를 많이 찾아봤다.
이제 금융 거래나 쇼핑도 모바일로 다 하나? 배달 앱도 사용하나?
(웃으며) 완전 잘한다. 나 한국 사람이다.
하면서 신기하진 않았나?
6년의 시간이 있었다. 기술이 발전하면서 나도 같이 발전했다.(웃음)
한국에서 살면서 이런 건 북한에 있는 가족들한테 보내주면 좋겠다 하는 게 있었나?
빵이 맛있더라. 베이커리가 잘돼 있다. 우리 어머니가 팥빵을 참 좋아하셨다. 어머니를 모시고 이런 데서 살아봤으면 한다. 영화관에서 팝콘이나 콜라를 사서 먹는 것도 북한 사람들이 여유 있게 누려봤으면 좋겠다. 그런 게 조금 마음이 그렇다. (어머니 이야기를 하는 오혜선 씨 눈가에는 눈물이 고였다.)
한국은 빵이 맛있더라. 베이커리가 잘돼 있다.
우리 어머니가 팥빵을 참 좋아하셨다.
어머니를 모시고 이런 데서 살아봤으면 한다.
영화관에서 팝콘이나 콜라를 사서 먹는 것도 북한 사람들이 여유 있게 누려봤으면 좋겠다.
그런 게 조금 마음이 그렇다.
남한에서 다시 본 드라마 감흥 남달라
북한에서 한국 드라마가 많이 유행하지 않았나?
2000년대 초에 남북협력사업이 많이 진행되면서 그때 북한 사람들이 한국을 알게 됐다. 나는 스웨덴에 갈 때까지 드라마를 본 적 없었는데 평양에선 사람들이 보고 있었다. 직장 동료들이 뭐를 봤다는 둥 했었는데 그게 <가을동화>였다. 사무실에 앉아서 “태어날 때 아이가 바뀌었다”고 드라마 내용을 설명하는데 지금이면 엄두도 못 낼 일이었다. “이 언니 이러다 붙잡혀가는 거 아니야?” 했다. 나는 런던에서 생활할 때 처음 봤다. <겨울연가>를 봤는데 신세계였다. 지금도 그때 추억이 있어서 가끔 가다 본다.
어떤 마음으로 추억하는 건가?
그때 보면서 느낀 감정과 지금 한국에 와서 안정된 상태에서 다시 볼 때 드는 마음을 비교하는 거다. 처음 볼 때만큼 감흥은 못 느끼지만 행복하다. 편안한 마음으로 볼 수 있는 내 모습이 참 행복하다.
해외에서 체류할 때 다른 한국 드라마도 본 게 있나?
<파리의 연인> <풀하우스> <러브스토리 인 하버드> 같은 것들이다. 밝은 내용을 주로 봤다. 아, <장밋빛 인생>도 봤는데 슬프더라. 북한 사람들은 행복해지고 싶어서 한국 드라마를 본다고 생각한다. 삶의 고단함을 잊어버리고 그 순간만이라도 행복하려고.
드라마를 보면서 생각한 한국이 있을 텐데 진짜 한국에 와보니 어떻던가?
사랑? 뭔가 한국은 따뜻하고, 그런 사랑을 하는 사람이 많은 줄 알았는데 현실은 아니더라.(웃음)
요즘 즐겨 보는 TV 프로그램이 있나?
드라마는 사람들이 꼭 보라고 하는 거 말고는 안 본다. 지금은 리얼리티쇼를 더 많이 본다. <런닝맨>도 보고 <속풀이쇼 동치미> <요즘 육아 금쪽같은 내 새끼> <이제 만나러 갑니다> <미운 우리 새끼>를 주로 시청한다.
저서에 보면 자녀를 엄하게 키운 것 같던데 <요즘 육아 금쪽같은 내 새끼>를 보면 느끼는 점이 많을 것 같다.
북한에선 자녀의 정서 케어까지 하면서 키우지는 못하니까. 보고 나니 미안해지더라. (그래서 최근) 큰아이한테 “내가 목소리만 높이고 다그쳤는데 마음이 무겁더라. 너희는 어떻냐?”고 물어봤다. “자식을 어떻게 키울 거냐? 엄마가 잘못 키우지 않았냐?”고 했는데 아니라고 하더라. 엄마는 그때 그렇게 하는 게 최선이었고, 자기들도 엄마처럼 강하게 키우겠다고 말했다.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웠다.
“성수동 카페 갔더니 낡은 공장 같아 당황했습니다”
한국에 와서 제일 좋았던 곳이 어딘지 궁금하다. 여행은 많이 다녔나?
여행을 많이 못 갔다. 그래도 제주도가 참 예뻤다. 관광이 잘돼 있더라. 경주도 아름다웠다. 봄에 가니 꽃이 활짝 펴 반갑게 맞아주는 느낌이었다. 최근엔 주말에 아이들이 성수동에 있는 핫한 카페에 가자고 해서 갔는데 내가 보기엔 공장 같은 데로 갔다. 아이들은 “요즘 인기 많은 곳, 잘나가는 곳”이라고 말하는데, 나는 “낡은 공장 같은 데를 왜 가느냐”고 그랬다.(웃음)
남편의 국회의원 출마를 말렸다고 들었다.
사실 국회의원이 뭔지 잘 몰랐다. 북한에도 비슷한 게 있지만 거수로 찬반만 표시한다. 남편은 외교하면서 (다른 나라 외교관을) 상대해 알았던 것 같다. 옆에서 지켜보니 사회를 바꿔나갈 힘이 있는 건 좋다. 대신 세금을 받고 하는 일이다 보니 조심스럽다. 세금 내는 쪽이 편하지 않나? 남편이 책 쓰고 강연회를 하던 때가 훨씬 마음이 편했다. 지금도 남편한테 힘들면 내려놓으라고 하는데 뭐가 됐든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라 그거에 만족하려 한다.
탈북은 부부가 서로 믿고 존중하지 않으면 내릴 수 없는 결정이라고 생각한다. 부부는 뭐라고 생각하나? 본인에게 남편이 어떤 의미인지 궁금하다.
지금까지 남편과 내가 한 몸이라고 생각했다. 하늘이라면 하늘이고, 은인이라면 은인이다. 내가 남편한테 이것 좀 해달라거나 애가 아파서 외국에 나가면 좋겠다고 하면 정말 노력해 그걸 해낸다. 늘 열심히 살아줘 항상 고맙게 생각한다.
태영호 의원은 누구…
탈북인 최초 ‘지역구 국회의원’
평범한 가정 출신의 북한 엘리트 외교관
<런던에서 온 평양 여자>를 쓴 오혜선 씨의 남편 태영호 의원은 한국 사회에서 여러 진기록을 세운 인물이다. 그는 2020년 총선 때 대한민국 21대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1962년 평양에서 태어난 그는 북경외국어대학교 부속고교와 북경외국어대학교 영문과를 다녔다. 8년간 유학했는데, 북한에서 국내를 떠나 유학하는 것은 아무에게나 주어지지 않는 기회다. 특히 엘리트 집안 출신이 아닌 그는, 북한이 ‘똑똑한 인재’를 골라 키운 케이스에 해당한다. 북한의 최고 엘리트 집단인 외교관 출신답게 외국어에 능통하다. 영어와 중국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한다고 한다.
당연히 유럽 외교계에서 북한을 대표하는 얼굴이었다. 탈북 이전까지는 덴마크와 스웨덴 등 유럽에서만 근무했다. 탈북 직전에는 주영 북한 공사로 근무했는데, 이는 당시 현학봉 주영 북한 대사에 이어 주영 북한 대사관에서 서열 2위에 해당했다. 북한이 미국과 정상적인 외교 관계를 맺지 못하고 있는 점을 고려할 때, 서방세계의 대외 창구였던 유럽에서도 대표적인 외교관이었던 셈이다. 2015년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친형인 김정철이 세계적인 기타리스트 에릭 클랩튼의 런던 공연을 찾았을 때 동행해 한국 미디어에 노출된 적이 있는데 김씨 일가를 가이드할 만큼 신뢰받는 인물이기도 했다(후일 태영호 의원은 자신의 저서에서 북한 인민들이 상상할 수 없는 여행 경비를 쓰고 가는 김정철에 대한 아쉬움을 토로하기도 했다).
폐쇄적인 북한 사회만큼이나 자유에 대한 갈망이 컸던 태영호 의원은 아내와 아들 2명 등 온 가족과 함께 2016년 8월 영국을 떠나 한국으로 왔고 같은 해 12월 주민등록을 하며 대한민국 국민이 됐다. 그리고 탈북 3년 8개월 후인 2020년 4월 15일 대한민국 21대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태영호 의원은 국회의원 당선은 여러 가지 진기록을 남겼다. 기존 탈북민 출신으로 국회의원이 된 인물은 2명(김일성대 교수 출신 조명철 씨, 탈북민 출신 북한 인권 활동가 지성호 씨)이 있지만 태영호 의원은 비례대표가 아니라 지역구(강남구 갑)에서 출마해 당선된 첫 사례다. 참고로 북한의 조선노동당원이었던 이가 국회의원에 당선된 것 역시 그가 처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