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고나길 피부 톤이 어둡다. 겨울 볕에도 쉽게 타버리는 피부는 여름이라는 계절 앞에서 처절하게 무너지고 만다. 이 때문에 휴가철에 바닷가로 떠나려면 자외선차단제를 수시로 바르는 수고가 필요하다. 부단히 노력하지만 누가 봐도 마음껏 휴가를 즐기고 온 사람의 모습이다. 그만큼 쉽게 그을린다. 게다가 건조하다. 땀이 많이 흘러 얼굴이 번들거려도 가뭄이 든 것처럼 피부가 심하게 땅긴다. 백옥 같은 피부는 다음 생에서나 가능한 것일까? 아, 외모여.
타고나길 옷을 좋아한다. 살아보니 청바지에 흰 티셔츠 한 장 걸치는 게 가장 예쁘다는 문장은 ‘우월한 미모의 소유자’라는 수식어가 생략된 것이었다. 시장에서 뒤처지지 않기 위해 계절이 바뀌기 전 어떤 아이템으로 승부를 볼지 나름대로 진지하게 고민한다. 하지만 여름은 뭘 해도 안 된다. 그냥 안 된다. 속옷만 걸치고 다녀도 끈적거리는데 뭘 할 수 있겠나 싶다. 일단 앞서 언급했듯이 외모부터 정체기인 시기라 그런지 노력조차 허사가 될까 반포기 상태가 되고 만다.
타고나길 술을 좋아한다. 소주라는 운명을 만나 인생의 동반자를 삼았다. 살랑살랑 바람이 부는 날,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날, 매서운 바람이 부는 날. 모든 날, 모든 순간이 술과 함께였다. 이러나저러나 퇴근 후 술상 앞에 앉아 있는 나에게 스스로 음주 주의보를 선언할 때가 있다. 바로 여름이다. 정확히 2020년 여름 노량진수산시장에서 호기롭게 낮술을 마시다가 사경을 헤맸던 적이 있다. 가만히 있어도 땀이 흐르는 무더위에 음주라니. 급격히 찾아온 탈수증세로 메스꺼움을 호소하다가 앓아누웠다. 무식하면 몸이 고생한다는 말이 딱 맞아떨어졌다.
이렇다 보니 내게 여름은 총체적 난국, 암흑기로 읽힌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계절은 돌고 돈다. 그래, 도망칠 수 없다면 여름과 사이좋게 지내야 내게 이롭지 않을까? 다년간에 걸쳐 깨달은 바가 있다. 과할 정도로 많은 양의 물을 섭취해야 한다는 것이다. 심플하지만 가장 확실한 수분 공급책이다. 여름이 오면 출근하면서 한 잔, 점심 식사 후 한 잔, 많을 땐 한 잔 더 마셨던 커피의 양을 줄이고 물로 대체한다. 카페인이 함유된 음료는 오히려 체내 수분을 앗아간다는 전문가들의 말을 되뇐다. 특히 술자리에선 술보다 물을 더 많이 마신다. 이만한 이너 뷰티가 없다. 물만큼 소중한 존재가 있으니 바로 수딩 젤이다. 알로에 성분이 함유된 수딩 젤을 얼굴과 몸에 골고루 바른 뒤 잠을 청한다. 강한 햇빛에 노출됐던 피부를 달래는 일종의 의식이다. 특히 자외선차단제와 화장으로 중무장해 답답했을 얼굴에는 수딩 젤을 두껍게 발라 열을 식혀낸다.
지난해가 그랬고 지지난해가 그랬듯 여름이 찾아왔다. 출근길에 들르던 카페를 지나쳐 편의점에 들렀다. 그리고 물 한 통을 집었다. 올해도 무사히 지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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