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기하가 록 밴드 장기하와 얼굴들 해체 후 3년 만에 첫 솔로 앨범 <공중부양>을 발매했다. 활동을 쉬는 동안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는 시간을 가졌다고 한다. 그 결론은 “가장 나다운 걸 나답게 하자.” 그 결과물이 <공중부양>이다.
장기하는 2008년 ‘싸구려 커피’로 데뷔해 ‘달이 차오른다, 가자’, ‘별일 없이 산다’, ‘우리 지금 만나’ 등 꾸준히 히트곡을 냈다. 독창성과 실험 정신, 사회 풍자가 담긴 다수의 히트곡으로 ‘독특하다’는 정체성이 따라다닌다.
장기하는 스스로 “이번 앨범은 지난 3년의 결과물이면서 솔로 장기하의 출발점이자 자기소개서”라고 소개했다. <공중부양>은 장기하가 음반의 작사·작곡은 물론 프로듀싱, 믹싱까지 도맡으며 장기하의 세계관을 고스란히 담아냈다.
“웬만하면 가만히 있고 싶다”
<공중부양>에 장기하의 정체성이 담겨 있다고 설명했는데, 어떤 심경이 반영된 건가?
장기하와 얼굴들 마지막 음반을 낸 시점부터 3년 반 정도 지났다. 처음 2년은 음악을 어떻게 할까 고민했다. 장기하라는 싱어송라이터의 바꿀 수 없는 정체성이 무엇인지도 생각했다. 내가 내린 결론은 내 목소리를 내 목소리답게 활용하는 것, 그리고 나머지는 어떻게 바뀌든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그걸 중심으로 5곡을 만들었다. 평소의 내 목소리를 노래에 담으려고 노력했고, 그 외의 부분은 목소리에 어울리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장기하와 얼굴들 해체 이후 솔로 앨범을 발표하기까지 3년 넘는 시간이 걸렸다. 공백이 길어진 이유가 뭔가?
초반 2년은 일부러 음악을 만들지 않았다. 어쭙잖게 밴드 때와 비슷한 음악을 만들 거라면 음반을 내는 게 의미 없다고 생각했다. 장기하라는 뮤지션이 어떤 사람인가부터 생각하는 시간을 가졌다. 내 삶에 대한 생각도 많이 했다. 그 결과가 에세이집 <상관없는 거 아닌가?>에 녹아 있다. 그 2년 동안 창작보단 나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고, 그 후에 곡 작업을 시작했다.
앨범 전체에서 ‘방황’이나 ‘혼란스러움’ 같은 감정이 느껴진다.
밴드로 활동할 땐 할아버지가 될 때까지 장기하와 얼굴들을 하고 싶었다. 그만큼 밴드를 중요하게 생각했고, 그래서 밴드를 해체하는 건 내 인생에서 아주 큰일이었다. 인생의 계획이 바뀌어 단순히 가수 활동을 어떻게 하느냐가 아닌 어떤 인생을 살아가야 하나, 어디를 바라보고 살아야 하느냐는 생각부터 시작했다. 여행도 가보고 여러 사람을 만나 얘기도 나눠봤다. 방황과 혼란을 겪었다. 그 결과 나한테 필요한 것 이외의 다른 것은 필요하지 않구나 하는 식의 결론을 얻었다. 결론을 내리고 음악을 만들었지만 방황했던 시기의 마음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가장 나다운 걸 나답게 하자’라는 초심이 강조된 앨범이다. 그런 이유로 데뷔 초와 같이 수염도 기른 건가?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다 보니 ‘싸구려 커피’를 불렀을 때 가지고 있던 정체성만 남게 되더라. 그러고 보니 어느 날부터 수염을 기르고 있더라. 문득 거울을 보니 ‘싸구려 커피’의 장기하가 거기 있었다. 마흔 살을 앞두고 어려 보이려 노력하지 않고, 내 발로 40대로 걸어가겠다는 의지로 기른 건데 이제 40대에 입성했으니 잘라도 되겠다는 생각도 든다.
완성된 음반을 듣고 어떤 느낌이 들었나?
앨범 완성 뒤의 느낌은 늘 같다. ‘개쩐다’.(웃음) 장기하와 얼굴들의 모든 앨범도 마찬가지였다. 그 생각이 안 들면 완성시키지 않는다. 물론 개쩐다라는 느낌은 완성 직후의 생각이고, 다음 날엔 생각이 바뀌기도 한다.(웃음) 시시각각 생각이 달라지지만 어쨌든 완성본을 처음 들었을 땐 늘 ‘개쩐다’, ‘명작이다’라는 생각을 했다.
이번 음반을 만들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이 있다면?
내 목소리를 내 목소리답게 담는 것. 노래를 내 말투에 맞춘다는 방식으로 진행했다. 내 목소리 외의 소리는 최소의 것만 붙여 완성시키고자 했다.
뮤지션이 아닌 인간 장기하의 정체성은 뭔가?
인간 장기하의 정체성은 이번 앨범 4번 트랙의 가사에 나와 있다. ‘가만히 있으면 되는데 자꾸만 뭘 그렇게 할라 그래.’ 웬만하면 가만히 있고, 의미 없는 행동을 하고 싶지 않다는 것. 그게 나의 중요한 정체성 중 하나다.
쉬면서 출판한 에세이도 그렇고, 이번 앨범도 마찬가지다. ‘욕심을 버리자’, ‘상관없는 거 아닌가’, ‘남을 부러워하지 말자’ 같은 체념의 정서가 느껴진다.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건 오래전부터다. 부러운 것도 많고 욕심도 많아서 ‘버려야지’라는 마음으로 살고 있는데, 아직도 버리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계속 그 방향을 바라보고 있는 것 같다.
‘부럽지가 않어’를 타이틀곡으로 선택한 이유가 궁금하다. 대상이 있는 노랫말인지, 오히려 부럽다는 의미인지 등등 부연 설명을 듣고 싶다.
듣는 사람에 따라 느끼는 게 다를 거 같다. 부러움이란 감정을 못 느끼는 가상의 인물이 하는 이야기다. 그래서 듣는 사람의 마음 상태가 어떠냐에 따라 다르게 받아들여진다고 생각한다. 사실 나는 음반을 완성할 때까지 타이틀곡을 정해놓지 않는다. 전략적으로 한 곡을 타이틀곡으로 만들고자 하는 마음도 없었다. 스태프가 ‘부럽지가 않어’가 타이틀곡인 게 모양새가 괜찮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나도 마찬가지다. 특정 인물을 염두에 둔 곡은 아니다. 그런 게 있다. 힙합 음악 몇 곡을 듣다 보니까 ‘자랑한다’는 생각이 들더라. 그게 힙합의 문화니까 재미있게 듣고 있는데, ‘그 자랑을 다 이기는 자랑은 무엇일까? 돈, 성공, 실력 등 그 모든 자랑이 전혀 부럽지 않은 게 다 이길 수 있는 자랑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누구와 싸운 적은 없지만 내적으로 이겨보려고 만들었다.
뮤직비디오도 독특하더라.
웹 아티스트 송예환 작가님이 연출했다. 회의할 때 “일반적으로 부럽지 않다고 하는 가사지만 세상에 아무것도 부럽지 않은 사람이 있겠나. 그렇게 말해도 속으로 그렇지 않은 상황을 연출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걸 듣고 작가님이 콘셉트를 정리했는데, 몸은 자유자재로 움직이되 눈은 부러워하는 것에 고정돼 있는 것을 기본으로 작업해주었다. 뮤직비디오를 자세히 보면 내가 막 움직이는데 눈만 못박힌 것처럼 고정돼 있다. 그 의도다.
이번에 제작한 몇몇 뮤직비디오를 보면 팝아트와 음악의 접목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쉬는 동안 미술 전시나 작품을 접할 기회가 많았다. 여기저기 많이 다녔고, 전문가에게 직접 설명을 듣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재미있더라. 결국엔 대중예술도 ‘개념예술(특정의 완성된 상태를 의도하지 않고 창작의 이념이나 과정을 중시하는 예술)’ 방향으로 가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정확히 어떤 작품, 어떤 작가가 내게 영향을 미쳤는지 모르겠지만 은연중에 영향을 받은 것 같다.
장기하와 얼굴들의 5집이 너무 마음에 들어 밴드를 해체한다고 했는데, 완성도 면에서 그 5집과 이번 앨범을 비교하자면?
완성도가 100%라는 생각이 안 들면 작업을 마치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비슷한데, ‘성격’은 다르다. 장기하와 얼굴들의 5집은 밴드를 마무리하는 성격이었다. 밴드로 할 수 있는 건 거기까지라 생각했고, 발전할 수 있을 만큼 했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공중부양>은 장기하라는 싱어송라이터의 기본값이 이 정도라고 제시하는 앨범이다. 이번 앨범은 나 혼자 만들었지만 앞으로는 다양한 이들과 협업하고 싶다. 그런 의미에서 앞으로 함께할 협업자들에게 자기소개를 하고 새로운 솔로 커리어를 시작하는 앨범이기도 하다.
협업을 염두에 둔 아티스트가 있나?
모르겠다. <공중부양> 발매 전날에 재즈 연주가인 윤석철 트리오의 앨범이 나왔는데 기가 막히더라. 석철이 형과도 뭔가를 하고 싶다. 그리고 지난해 Mnet 예능 <쇼미더머니10>을 열심히 봤는데, 나의 최애 래퍼가 머드 더 스튜던트다. 그 친구와 협업해도 재미있을 것 같다.
해체한 장기하와 얼굴들에 대한 후회는 없나?
한 번도 후회한 적 없다. 그 시기에 마무리해 이런 형태의 음반도 낼 수 있는 것이다.
예전에 배철수 선배처럼 되고 싶었는데 누구처럼 되고 싶다고 해서 되지도 않고,
시대가 변하고 있어 여러 상황이 다르게 흘러가고 있다.
결국엔 내 길을 제시할 사람은 나 자신밖에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롤모델 없는 삶을 살고 싶다”
늘 그렇듯 가사가 재미있다. 일상 속 우리가 느끼는 소소한 심정들을 잘 포착했다.
경기도 파주출판도시 쪽에 살았는데, 가사는 거기서 다 썼다. 이런 루틴이었다. 아침에 일어나서 밥을 먹고 임진각으로 차를 몰고 간다. 신호도 안 걸리고 차도 별로 없어 계속 그냥 쭉 갔다. 철원까지 가면 사람이 멍해진다. 멍해지다 보면 뭔가 떠오르더라. 물론 안 떠오르는 날도 있는데, 문장 하나가 떠오르면 그걸 건져오는 식이다. 집에 와서 음성 메모로 녹음하는 것을 시작으로 작사·작곡 단계까지 갔다. 작사·작곡이 거의 동시에 이뤄졌다.
정체성과 삶에 대해 고민을 많이 했다고 하는데, 그래서 결론이 났나?
지금 마흔 살이 된 장기하라는 음악인의 좌표가 이번 음반이다. ‘여기서부터 시작하겠습니다’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나는 이제 누구처럼 되고 싶은 게 없다. 예전에 배철수 선배처럼 되고 싶었는데 누구처럼 되고 싶다고 해서 되지도 않고, 시대가 변하고 있어 여러 상황이 다르게 흘러가고 있다. 결국엔 내 길을 제시하는 사람은 나 자신밖에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40대 이후에는 롤모델 없는 삶을 살아보고 싶다.
2년간의 코로나19 팬데믹이 음악에 영향을 미쳤는지도 궁금하다.
죄송스러운 이야기인데, 팬데믹의 영향을 크게 받지 않았다. 팬데믹과 상관없이 활동을 접고 ‘나에게 집중해보자’는 생각이었다. 그냥 가만히 지내며 내면에 집중하는 시간을 보냈다.
그나저나 솔로 가수 장기하의 다음 앨범도 이렇게 텀이 길까?
그렇게 되면 먹고살기 힘들 수 있지 않을까.(웃음) 사실 빨리빨리 무언가를 하고 싶다. 싱글 앨범도 내고 싶다.
이번 앨범에서 미싱엔지니어까지 담당했다.
처음 작곡할 때와 비슷하다. 내가 원래 드러머 출신이라 가수에 대한 꿈이 없었다. 한데 ‘싸구려 커피’와 ‘달이 차오른다, 가자’를 만들고 보니까 이럴 거면 내가 노래해보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에도 그런 의미로 장비를 샀다. 스케치 정도는 내가 해보자 싶어 세팅하고 녹음했다. 그러다가 이것저것 어울리는 것을 하나씩 만들다 보니 믹스를 다 한 것 같더라. 앗, 볼륨만 맞추면 되겠는데 싶어 끝까지 하게 됐다. 불안해서 지인들의 의견을 듣기는 했다. 어쩌면 그래서 차별적인 앨범이 나온 것 같다. 뭐랄까, 아마추어의 매력이랄까?
3월에 단독 공연도 계획 중이다. 기대된다.
이번 솔로 음반은 ‘결과’보다는 ‘시작’의 의미가 짙다. 그런 의미로 장기하와 얼굴들의 음악을 듣고 싶은 이들도 있겠지만 이번 콘서트에서는 배제할 생각이다. 밴드 구성의 공연도 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전문가들과 팀을 짜서 뭔가 보여주겠다는 마음으로 작업 중이다. 앞으로도 무언가를 꾸준히 하는 뮤지션이 되고 싶다. 많은 관심을 가져달라.
마지막 질문이다. 솔로 가수로서 첫걸음을 내디뎠다. 어떤 아티스트로 기억됐으면 하나?
그건 죽은 뒤일 거 같다. 작든 크든 장기하라는 이름으로 기억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