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가 현재를 지배할 때
지난날 겪었던 공포심, 두려움이 현재까지 영향을 미치는 현상인 ‘트라우마’. 일반적인 기억과 어떻게 다를까?
트라우마는 개인에게 신체적·정서적으로 해롭거나 위협이 되는 상황이 일상에 부정적인 영향으로 발현되는 것을 의미한다. 과거에 경험했던 부정적인 일과 비슷한 순간이 닥쳤을 때 당시의 감정을 느끼면서 심리적 불안을 겪는 게 특징이다. 외상을 입은 시점이 과거임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기억이 생생하게 떠오르고, 경험했던 활동이나 장소를 피할 뿐만 아니라 통제력까지 잃을 수 있다. 트라우마 자체는 질환이 아니지만,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와 그 밖에 다양한 부정적인 건강 문제를 일으키는 원인이 된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에 따르면 한국인 가운데 89.9%는 일생 동안 자연 재난과 화재 또는 폭발, 교통사고, 신체 폭력 등 22개 유형의 트라우마 중 1개 이상을 경험한다. 성인 남녀 평균 4.8개의 트라우마를 경험하는데, 대다수가 겪는 트라우마는 교통사고(61.9%), 자연 재난(49.1%), 신체 폭력(48.3%) 순이었다. 남성은 주로 사고나 신체적 위해와 관련한 트라우마를, 여성은 성폭력, 대인 관계 및 정서적 문제와 관련된 트라우마를 더 많이 겪는 것으로 조사됐다. 트라우마 미경험자의 잠재적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위험도는 6.4%인 반면 트라우마 유경험자의 경우 49.7%에 달했다. 중증도 이상의 우울증 비율도 미경험자 10.8%, 유경험자 20.3%였다. 자살 생각률은 미경험자 8.4%, 유경험자 15.9%였으며, 고위험 음주율 역시 미경험자 17.2%, 유경험자 20.7%로 나타났다. 이는 트라우마 유경험자의 정신 건강 관리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방증한다.
갈수록 더 선명해지는 기억
평범하고 일상적인 기억은 쉽게 잊히거나 시간이 흐를수록 흐릿해지지만 트라우마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심지어 정도에 따라 더 선명해지기도 한다. 일반 기억과 트라우마 기억이 전혀 다르다는 것을 처음 지적한 사람은 프랑스의 저명한 정신과 의사 피에르 자네다. 일반 기억은 현실을 정확하고 객관적으로 반영하는 것이 아니다. 주관적으로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 부분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말하는 사람에 의해 변형된다. 비록 실제 있었던 사실과는 다르게 변형됐을 지라도 일반 기억은 시간개념이 분명하고 앞뒤 맥락이 질서 정연한 이야기인 반면, 트라우마 기억은 정리되지 않은 파편이라고 할 수 있다. 시간개념이 없고 앞뒤 맥락도 모호하다. 자기주장을 조리 있게 할 수도 없고, 다른 사람을 부드럽게 설득시키지도 못한다. 트라우마 기억은 시간이 지나도 쉽게 변하지 않는다. 전문가들은 뇌의 정보 처리 시스템에 과부하가 걸려 압도적인 트라우마의 기억을 전혀 가공하거나 처리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추정한다. 이렇게 생겨난 트라우마 기억은 비슷한 자극을 받을 때마다 생생하게 활성화된다. 그래서 트라우마로 고통받는 사람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오히려 그 당시 기억이 점점 더 생생해진다고 말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친숙한 유명인 중에도 트라우마를 겪은 이들이 많다. 부와 명예, 인기를 모두 거머쥔, 영화 <스파이더맨> <위대한 쇼맨>의 배우 젠데이아 콜먼은 아직도 경제적 불안으로 인해 심리치료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털어놨다.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 때문인데 어려운 집안 형편 때문에 부모님은 힘들게 맞벌이해야 했고, 당시의 힘들고 강렬했던 기억으로 인해 지금도 과소비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고. 유명해지면서 돈을 많이 벌었지만, 여전히 돈을 쓰는 데 걱정이 많고 친구와 함께 여행할 때도 더치페이를 한다고 밝혔다. 영화 <라라랜드>에 출연한 배우 라이언 고슬링은 어릴 적 ADHD를 앓아 왕따당했던 경험이 있다. 친구들의 괴롭힘으로 트라우마를 겪던 그는 학교를 중퇴하고 홈스쿨링을 받아야 했다고 한다. 할리우드 스타 윌 스미스는 자신의 회고록을 통해 8살 무렵 아버지가 어머니를 학대하는 것을 멍하니 지켜봐야만 했고, 충격적인 장면을 보고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고 털어놓았다. 그는 당시의 트라우마 때문에 엄마를 보호하지 못했다는 무거운 짐을 평생 짊어지고 산다고.
스몰 트라우마와 빅 트라우마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트라우마에 대한 개념을 확장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오고 있다. 생명을 위협하는 사건뿐만 아니라 삶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모든 경험까지 폭넓게 정의하자는 것이다. 이 같은 이유로 빅 트라우마와 스몰 트라우마라는 하나의 분류가 생겨났다. 빅 트라우마는 전쟁, 재난, 천재지변, 불의의 사고, 강간, 아동기 성폭행, 사랑하는 사람의 갑작스러운 죽음이나 이별 등 평범한 일상의 경험 범주를 넘어서는 커다란 충격적인 사건을 말한다. 스몰 트라우마는 자신감 혹은 자존감을 잃게 만드는 일상 생활에서의 자잘한 사건이다. 어린 시절 부모와 떨어져 살았던 경험, 엄마에게 심하게 야단맞거나 관심받지 못했던 경험, 친구들로부터 반복적으로 놀림을 받은 경험, 어릴 적 길을 잃어버렸던 경험 등이 스몰 트라우마에 속한다. 빅 트라우마에 비해 심각하지 않다고 여길 수 있지만, 자아 기능이 충분히 발달하지 않은 아이들은 이러한 경험이 정신적인 충격과 공포, 통제 불능의 느낌을 안겨줄 수 있다. 스몰 트라우마가 빅 트라우마보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일으킬 가능성이 더 높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을 정도로 삶에 부정적 영향을 많이 미친다.
트라우마를 고백한 스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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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통사고 트라우마’ 송가인
교통사고 후 트라우마가 생겼다는 트로트 가수 송가인. 차량의 속도가 조금만 빨라져도 체감할 정도로 심장이 빨리 뛰고, 눈을 질끈 감게 된다고 한다. 송가인은 어렸을 때부터 차 사고가 많이 나서 운전이 서툰 차는 가급적 탑승하지 않으며, 아직도 운전면허증이 없다고 밝혔다. -
‘죽음 트라우마’ KCM
“어머니가 갑자기 돌아가실까봐 항상 두렵다”고 죽음에 대한 트라우마를 고백한 가수 KCM. 항상 무선 이어폰을 끼고 생활하는 이유에 대해선 “어머니에게 연락이 오는 것을 놓치면 안 돼서”라고 말했다. 죽음이 가장 큰 공포로 다가온 이유는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셨기 때문. KCM은 어머니와 가족을 위해 아버지의 몫까지 해야 한다는 책임감으로 치열하게 산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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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과 진료에 대한 공포’ 정은지
티빙 드라마 <술꾼도시여자들>에 출연한 그룹 에이핑크 멤버 겸 배우 정은지는 라디오 진행 중 치과에 대한 트라우마를 털어놓았다. 치과 가는 것이 무섭다는 청취자의 사연에 “저도 입 벌린 상태로 우는 사람이다. 어릴 때 마취가 제대로 안 된 상태에서 신경치료를 받은 경험이 있는데, 그 트라우마가 잊히지 않는다”고 치과에 대한 안좋은 기억을 고백했다. -
‘폭력적인 아버지에 대한 기억’ 양익준
넷플릭스 드라마 <지옥>에서 남다른 존재감을 드러낸 감독 겸 배우 양익준. ‘공황장애 13년 차’라고 고백한 그는 “공황이 오면 머리가 멈춘다. 단어나 문장 구축이 안 되고 우주에 나 혼자 떠도는 느낌”이라고 했다. 그는 성장기 이야기를 하던 중 아버지의 폭력으로 어린 시절 큰 상처를 받아 성인이 돼서도 건강한 대인 관계가 어려웠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