샐러드는 배신하지 않는다
어느 ‘채식파’의 샐러드 예찬.
샐러드. 여자라면 누구나 한 번쯤(아니, 자주) 먹어봤을 애증의 음식이다. 여자는 이 샐러드를 먹으며 새로운 미래를 꿈꾼다. 날씬해지면, 예뻐지면 뭐든 다 가능하리라. 내 앞의 장애물이 대부분 없어지리라. 거창한 꿈은 샐러드로부터 시작되곤 한다.
왕년에 나는 방송에 종종 출연했다. 어떤 프로그램을 막론하고 대기실엔 과자가 산처럼 쌓여 있는데, 작가들이 엄선한 과자 리스트는 탄성을 자아내기 충분했다. 다양하고 또 의외여서 신박했다. 그럼에도 과자에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구석에서 사부작사부작 샐러드를 먹는 연예인은 꼭 한 명씩 있었다. 그때 내게 샐러드는 ‘연예인이 먹는 풀때기’ 정도였다.
어릴 때부터 채소가 밥상에 올라오는 일은 잦았다. 아버지의 영향 때문이었다. 덕분에 나는 다양한 조리법을 알게 됐고, 그 맛의 세계도 익히 알고 있었다. 분명 나는 맵고 짜고 달달한 음식보다 채소를 더 좋아했고, 육류보다도 채식파였다.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다이어트 시즌이 되면 샐러드를 종종 먹곤 했다. 하지만 내 인생에 샐러드가 들어오지는 않았다. 좋아하고 즐겼으나 그냥 샐러드일 뿐이었다.
그러던 중 내 인생 최고의 몸무게를 찍은 적이 있었다. 바야흐로 3~4년 전이다. 되돌아보면 그때가 내 인생에서 살을 빼고 싶은 욕망이 가장 뜨거웠을 때다. 만나는 사람마다 자동 반사적으로 “살쪘지?”로 시작하는 인사를 건넬 정도였으니 어지간히 살이 오르긴 올랐나보다. 나는 다이어트에 돌입했다.
매일 새벽 달리기를 했고, 샐러드를 먹었다. 하이에나처럼 샐러드 맛집을 찾아다녔다. 그때만 해도 샐러드 전문점이 많지 않을 때다. 먹다 보니 또 성에 차지 않았다. 간혹 시들해진 채소나 소박한 아보카도를 볼 때면 싱싱한 재료를 넉넉히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양한 메뉴의 샐러드를 먹고 싶었다. 양도 나를 만족시키지 못했다. 배부르게 먹어야 다른 음식이 먹고 싶지 않으니까. 여기서 중요한 건, 삼시 세끼 샐러드를 먹었지만 질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맛있게 잘도 먹었다. 내 인생에 샐러드가 들어왔을 때가 이즈음인 듯싶다.
나는 샐러드를 직접 만들기 시작했다. 서당 개 3년에 풍월을 읊는다고, 나는 풍월을 읊고 춤까지 췄다. 연어, 아보카도, 다양한 계절 과일, 피망, 오이, 당근, 쇠고기, 닭 가슴살, 참치, 새싹 채소, 새우, 전복, 옥수수, 감자, 고구마, 달걀, 콩 등등을 다양한 방법으로 섞어 먹었고, 그 위에 각종 치즈와 견과류, 마른 과일을 양념처럼 툭툭 올렸다. 굳이 소스를 곁들이지 않아도 심심하지 않게 본연의 맛을 즐길 수 있다. 그렇게 만든 샐러드를 푸짐하게도 먹었더랬다. “그걸 다 먹어?” 할 정도였으나 살은 쭉쭉 빠졌다. 지금도 나는 샐러드를 좋아하고 잘 만든다. 아삭한 초록이들과 빨주노초 주변 친구들, 풍부한 향의 치즈와 견과류는 마치 오케스트라처럼 완벽한 하모니를 자랑한다. 샐러드는 오늘도 나를 배신하지 않는다.
엄마의 잔치국수
생각만으로도 마음이 따뜻해진다. 엄마표 잔치국수는 그런 음식이다.
22살 여름, 내 몸만 한 배낭을 메고 나 홀로 여행을 떠났다. 목적지는 남아메리카. 처음 마주한 세계는 참 아름다웠다. 페루의 마추픽추, 볼리비아의 우유니 소금 사막, 아르헨티나의 탱고까지. 황홀했다. 하지만 100일의 여행 기간 동안 행복하기만 할 리는 없지. 갑작스럽게 찾아오는 쓸쓸함은 나를 적잖이 괴롭혔다. 지금은 인기 있는 여행지로 꼽히지만 당시만 해도 남아메리카는 한국인은 고사하고 동양인조차 마주치기 힘든 곳이었다. 사람이야 그렇다 치자. 가장 힘든 건 음식이었다. 찰기가 없는 밥은 흡사 모래알을 씹는 느낌이었고, 국수 찾아 발길을 돌려도 내가 아는 국수가 아니었다. 식탐과 거리가 먼 나는 질 낮은 식사가 사람에게 엄청난 악영향을 끼친다는 사실을 이때 깨닫고 말았다. 참고 참다가 밥 때문에 눈물이 터졌다. 엄마의 국수가 떠올랐다. 지구 반대편에서 엄마가 만든 국수가 먹고 싶어 엉엉 울었다.
“엄마가 국숫집을 차렸으면 강남에 빌딩 몇 채를 샀을 텐데….” 엄마표 잔치국수가 밥상에 오를 때마다 내뱉는 단골 멘트다. 멸치와 다시마를 베이스로 한 국물, 적절하게 익힌 소면, 무심하게 푼 달걀, 잘게 썬 호박과 청양고추를 고명으로 얹은 박순희 여사의 요리. 심플하지만 확실한 맛을 자랑한다. 어린 시절 앨범을 들춰보면 국수를 입속에 가득 넣고 있거나 국수 그릇에 얼굴을 박고 있는 내 사진이 여러 장이다. 고등학교 3년은 졸음을 퇴치한답시고 밀가루와 거리 두기를 실천했다. 그 3년이 예민했던 이유는 수험생이라는 암흑기 때문이겠으나 엄마의 국수를 먹지 못한 우울감도 분명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먹고 싶을 때 원하는 만큼 국수를 먹던 호시절이 있었다. 그리고 여느 자식들처럼 엄마의 품에서 나오면서 국수와도 멀어졌다. 애틋하다. 그래서인지 국수는 엄마와 나를 연결하는 모종의 암호가 됐다. “엄마가 해준 국수 먹고 싶다”고 문자메시지를 보내면 머지않아 “힘들었구나”라는 뉘앙스의 답장이 온다. 힘든 마음에 국수가 생각난 건지 몰랐는데, 엄마의 답장으로 내가 지친 상태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엄마 새끼이긴 한가보다. 이렇게 내 마음을 정확히 들여다본다.
앙증맞은 손으로 엄마가 만든 국수를 집어 먹던 나는 어느덧 엄마와 마주 앉아 소주잔을 기울이며 이 음식을 먹는 나이가 됐다. 시간이 속절없이 흘렀다. 언제든 누가 인생 음식을 묻는다면 고민 없이 엄마표 잔치국수를 꼽는다. 세상 모든 게 변해도 절대 변하지 않을 답이다. 날이 춥다. 또 한 번의 마감을 지내는 지금 가장 고픈 건 잠도 아니고 여유도 아니다. 엄마의 국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