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격’ 인사 제도, ‘혁신’ 임원 인사
2021년 11월 29일, 삼성전자는 미래지향 인사제도 개혁안이 담긴 보도 자료를 내놓았다. 국내 굴지의 대기업인 삼성전자 내 인사 시스템을 완전히 손보겠다는 내용이었다.
먼저 ‘사원-대리-과장-차장-부장’으로 이뤄진 직급 간 승진 시스템을 폐지하고 직급 제도를 단순화했다. 기존 시스템은 10년 정도 근무해야만 CL2(이전 사원·대리급)에서 CL3(과·차장급)로 승진이 가능했는데, 이를 폐지한 것. 통상 삼성전자 공채가 아니어야만 가능했던 30대 임원이 탄생할 수 있게 됐다.
특히 등급별로 정해진 비율에 맞춰 평가하던 인사 제도도 손봤다. 기존에는 부서 내에서 인사고과를 잘 받을 수 있는 비율이 정해져 있어 경쟁이 불가피했는데, 이를 절대평가로 전환했다. 부서원 비율과 관계없이 적절한 평가를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회사 인트라넷의 직급 및 사번 표기를 삭제하고 승격 발표도 폐지했다. 상호 소통 시 존댓말을 쓰는 것도 공식화했다. 커뮤니케이션 과정에서 직급이나 연차가 개입되는 것을 막고, 능력과 전문성을 중시하겠다는 것인데, 임원 역시 전무 직급을 폐지하고 부사장으로 통합키로 했다. 임원진이 적체됐다는 판단하에, 경직성을 해소하고 동시에 젊고 능력 있는 임원진에게 힘을 실어주는 방식으로 회사 조직을 재편하겠다는 계획이었다.
2021년 12월 9일 발표된 2022 정기 임원 인사는 이러한 삼성의 ‘의지’를 잘 보여주는 결과물이기도 했다. 삼성전자는 이날 부사장 68명, 상무 113명, 펠로 1명, 마스터 16명 등 총 198명에 대한 2022년 정기 임원 인사를 실시했는데 40대 부사장, 30대 상무가 대거 등장했다.
IM(IT·모바일) 부문과 CE(소비자가전) 부문이 통합된 SET(세트) 부문의 VD사업부 서비스 S/W Lab장 고봉준 부사장(49세)과 삼성리서치 스피치 프로세싱 랩장 김찬우 부사장(45세), 생활가전사업부 IoT 비즈그룹장 박찬우 부사장(48세), 글로벌기술센터 자동화기술팀장 이영수 부사장(49세), 무선사업부 UX팀장 홍유진 부사장(49세) 등이 40대 부사장 승진자로 이름을 올렸다. 메모리사업부 상품기획팀 손영수 부사장(47세), 파운드리사업부 영업팀 신승철 부사장(48세), DS 부문 미주총괄 박찬익 부사장(49세) 등도 부사장으로 승진했다.
30대 상무 승진자도 대거 나왔다. 세트 부문 VD사업부 선행개발그룹 소재민 상무(38세)와 삼성리서치 시큐리티 1랩장 심우철 상무(39세), DS 부문 메모리사업부 DRAM설계팀 김경륜 상무(38세)와 시스템LSI사업부 SOC설계팀 박성범 상무(37세) 등이 30대 임원이라는 ‘파격 인사’의 주인공이 됐다. 삼성전자는 이번 인사 개혁안 및 임원 인사에 대해 “능력 중심의 수평적 조직 문화를 구축해 젊고 우수한 경영자 육성을 가속화하기 위한 것”이라고 밝혔다.
LG, SK… 젊은 인재 내세우며 ‘파격’ 선택
삼성보다 한 달 빠르게, 구광모 회장 취임 후 최대 규모로 임원 인사를 단행한 LG그룹 역시 비슷한 방향을 선택했다. 132명의 신임 상무를 발탁하면서 젊은 인재를 대거 내세웠다. 2022년 취임 5년 차를 맞는 구광모 LG그룹 회장의 ‘혁신 의사’가 반영된 것인데, 일각에서는 2기 체제 본격화라는 분석이 나온다. 지주사 ㈜LG는 구 회장을 중심으로 젊고 가벼운 조직으로 탈바꿈해 민첩성을 높임과 동시에, 주요 계열사 최고경영자(CEO)는 대부분 유임시키며 안정도 추구했다는 평이다. 특히 40대의 젊은 임원이 82명으로 전체 승진자 중 62%를 차지한 것은 ‘구광모의 사람들’을 주요 보직에 앉혔다는 평이 나온다. 자연스레 LG그룹의 전체 임원 가운데 1970년대생의 비중은 2020년 말 기준 41%에서 2021년 말 52%로 크게 늘었다. 최연소 임원은 41세(1980년생·여)인 신정은 LG전자 상무. 차량용 5세대이동통신(5G) 텔레매틱스 선행 개발을 통한 신규 수주 기여 성과를 인정받아 발탁 승진했다. LG 측은 “상무층을 두텁게 해 중·장기적 관점에서 미래 사업가를 육성하고 CEO 후보 풀도 넓어졌다”고 이번 인사안을 평가했다.
‘1980년대생 임원’이 된 신정은 LG전자 상무는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선배 임원들에게 당당히 ‘저도 MZ세대’라고 말하며 조직 문화나 일하는 방식에서 젊은 직원들을 대변하려 한다”며 젊은 조직을 만드는 데 이바지하겠다고 포부를 밝히기도 했다.
133명의 신규 임원을 발표한 SK그룹 역시 3040 임원 발탁이 눈길을 끌었다. 2020년 상무·전무·부사장 임원 직급을 파격적으로 통합한 최태원 회장은 2021년에도 3040 사장과 임원을 배출하는 등, 연공서열을 타파한 직무·성과 중심의 인사 혁신을 선택했다. 특히 주요 계열사인 SK하이닉스는 1975년생으로 만 46세인 노종원 부사장을 사장으로 승진시켜 눈길을 끌었다.
신규 임원 인사에서는 최초로 생산직 출신 손수용 담당이 임원으로 승진했고, MZ세대 우수 리더로는 1982년생 이재서 담당 등을 발탁했다. 이재서 담당은 만 39세로 SK그룹 내 최연소 임원이라는 타이틀을 얻게 됐다.
사업적 측면에서도 반도체와 친환경사업에 가속도를 붙이는 상황에서 조직을 더 젊고 유연하게 만들어 빠르게 대처하기 위한 재계 오너들의 고민이 담겼다는 평이 나오는 대목이다.
대기업 관계자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을 비롯해 구광모 LG 회장과 SK 최태원 회장 모두 4050대의 젊은 리더들”이라며 “아버지 세대 때부터 있었던 임원들을 하나둘 정리하고 3~4년 넘게 회사에서 봐온 인재들에게 기회를 주면서 코로나19, 반도체 위기 등에 대응하려고 하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최근 20년 사이 급성장한 IT 기업들을 벤치마킹하는 성격도 있다. 최근 네이버는 1981년생 최수연 책임 리더를 새로운 대표이사로 선택하며 ‘더 젊은 조직’으로의 변화를 선택했고, 카카오그룹 역시 그룹 내 3개사의 임원 15명 중 1966년생인 김범수 의장을 제외한 나머지 14명은 모두 1969년생 이후인 X세대 출신 임원이다.
모두가 환영? 승진 못 한 이들 ‘위기감’ 상당
하지만 대기업 내부에서도 이런 혁신을 모두 환영하는 것은 아니다. 능력만 평가한다는 말의 또 다른 의미는 ‘근속 연수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의미이기도 하기 때문.
삼성전자에서 10년 넘게 근무한 한 직원은 “삼성전자도 워낙 큰 회사이기 때문에 조직 안에서 일을 하는 사람과 덜 하는 사람이 분명 나뉜다”며 “덜 하는 사람들을 걸러내고, 오래 있었다는 이유로 높은 연봉을 받을 수 있는 기존 시스템을 손보려고 하지 않겠냐”고 내다봤다.
다른 대기업 관계자 역시 “통상적으로 대기업에서는 50대 초반에 부장으로 일하다가 인정받으면 임원으로 승진해 4~5년 정도 더 기회를 받고 일했다면 이제는 40대 초·중반에 임원 승진 여부가 결정되고 임원으로 승진하지 못한 이들은 눈치를 보다가 회사에서 나가는 경우가 생기지 않겠냐”며 “젊은 조직으로의 변화는 거꾸로 빠르게 조직에서 정리될 수 있다는 얘기이기도 하다”고 우울해했다.
삼성과 LG, SK 등의 ‘젊은 조직론’은 다른 대기업으로도 확산될 것으로 보인다. 유통업계 관계자는 “산업 영역마다 다르지만 IT나 유통, 바이오 등에서는 젊은 소비자층의 눈높이를 이해하고 이를 반영한 젊은 리더십이 필요하다는 공감대가 형성됐다”며 “미국이나 유럽처럼 30대 후반이어도 능력만 있다면 임원이나 대표가 돼 리더십을 보여줄 수 있는 사례가 서서히 등장할 것”이라고 내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