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 상사에게 탁상시계를 선물 받은 여성 A씨. 그녀는 그 시계를 침실에 두고 사용하다가 위치를 옮겼다. 이후 직장 상사는 이를 알아챈 듯이 시계를 돌려달라고 말했다. 상사의 행동이 미심쩍었던 A씨는 선물 받은 시계 모델명을 인터넷에 검색해 카메라가 부착된 특수 시계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심지어 실시간으로 영상을 찍어 지정된 스마트폰으로 송출하는 방식의 카메라였다. A씨는 직장 상사에게 자초지종을 물었다. 그러나 직장 상사는 “그거 검색하느라 밤에 잠을 자지 않은 거냐”며 집에서 검색하는 A씨를 실시간으로 지켜본 듯이 말했다. 이는 지난 6월 국제인권단체 휴먼라이츠워치(HRW)가 발표한 보고서에 담긴 피해 사례다. 이 보고서는 실제 불법 촬영 피해자들과 전문가 등이 심층 면담을 한 내용으로 구성됐다.
불법 촬영으로 인한 피해는 주변에서도 쉽게 접할 수 있다. 지난 6월 경기도 용인에서는 발가락 사이에 초소형 카메라를 끼워 여성의 신체를 촬영한 40대 남성이 경찰에 입건되는 일이 발생하는가 하면 절친한 친구의 아버지가 자동차 키 모양의 특수 카메라를 화장실에 놓아 불법 촬영 피해를 입었다는 사례가 전해지기도 했다.
지우개·커피잔, 알고 보니 카메라
법무부가 발간한 <2020 성범죄백서>에 따르면 불법 촬영 범죄는 지난 2013년 412건에서 2018년 2,388건으로 5.8배 늘었고 재범률은 75%에 달한다. 불법 촬영 피해가 매해 증가하는 가운데 그 수법이 점점 교묘해지고 있다. 일상적인 물품에 부착된 카메라로 불법 촬영을 당하는 사례가 점차 늘어가는 것. 볼펜, 지우개, 안경, 시계, 계산기, 옷걸이, 머그잔 등 육안으로 쉽게 알아차릴 수 없는 다양한 형태의 변형 카메라가 등장했다.
카메라임을 구별하기 어려운 이유 중 하나는 본래 기능으로 함께 쓰인다는 점이다. 볼펜형 카메라는 보통 녹음 기능과 눈으로 판별하기 어려운 초소형 카메라가 부착돼 있는데 실제 펜으로도 사용할 수 있다. 일회용 잔 등 컵 모양의 카메라, 옷걸이, 시계도 마찬가지다. 이 밖에도 차 키, 콘센트 등 일상에서 흔히 쓰이는 모양으로 둔갑한 카메라가 있다.
변형 카메라는 중요한 계약이나 법적으로 필요한 증거 수집용으로 판매되고 있다. 이 때문에 이를 판매하거나 구입하는 데 별다른 규제가 없고 포털 사이트에 검색하거나 전자상가 등을 통해 누구나 구매할 수 있다.
하지만 이를 범죄 수단으로 악용하는 사례가 늘면서 판매와 유통에 대한 규제를 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지난 6월 18일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는 초소형 카메라 판매 금지를 요구하는 청원 글이 올라왔다. 청원인은 “초소형 카메라를 이용해 화장실, 숙박 시설, 지하철 등 어디에서나 불법 촬영을 하는 범죄가 늘고 있다”며 “안경, 액자, 시계, 생수통, 화재경보기 등 위장된 모습으로 우리 곁에 존재한다”고 변형 카메라 악용에 대한 심각성을 지적했다. 이어 청원인은 “(초소형 카메라가) 마땅한 규제 없이 팔린다. 초소형 카메라 유통을 규제해달라”고 촉구했다. 해당 청원은 7월 9일 오후 10시 기준 21만 4,020명의 동의를 얻었다.
몰래 카메라로부터 나를 지키는 방법
언제, 어디에서 불법 촬영의 피해를 당할지 모른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일면서 일상에서 피해를 예방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한 궁금증이 커지고 있다. 각종 온라인 커뮤니티, 카페 등에서는 숨어 있는 카메라를 탐지하는 팁이 공유되는 상황.
다양한 방법 가운데 불법 카메라를 찾아낼 수 있는 ‘탐지 필름’이 가장 유명하다. PVC 소재로 된 적색 투명한 필름은 지갑이나 스마트폰 케이스에 휴대하기 편리한 크기의 카드 형태로 만들어졌다. 스마트폰 후면 카메라에 필름을 부착하고 플래시를 켠 상태로 의심되는 곳을 동영상으로 촬영하면 된다. 만일 해당 공간에 카메라가 숨겨져 있을 경우 스마트폰 촬영 화면에 하얀 빛이 반사된다. 시중에서 1,000~3,000원 정도로 쉽게 구할 수 있다.
탐지 필름은 그룹 ‘AOA’ 설현이 호텔에서 숙박할 때 필수로 챙기는 물품이라고 알려지면서 유명해졌다. 설현은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촬영 때문에 지방에 가면 모텔이나 호텔에서 지내는 경우가 많다. 매니저 언니가 저를 걱정해 나한테 선물한 카드”라고 밝혔다.
카메라 탐지를 위해 별도의 물건을 챙기는 게 번거롭다면 카메라 탐지 애플리케이션(앱)을 이용하는 것도 방법이다. ‘릴리의지도’는 다양한 카메라를 탐지할 수 있는 기능이 탑재된 앱이다. 앱을 작동한 뒤 ‘카메라 탐지’ 아이콘을 눌러 불법 촬영이 의심되는 곳에 비추면 된다. 소형 카메라까지 적발해내는 데 한계가 있던 기존의 앱과 달리 육안으로 확인하기 힘든 크기의 카메라를 감지한다고.
숙박 시설이나 밀폐된 공간에서 불법 촬영이 의심된다면 불을 전부 끄고 스마트폰 플래시를 켠 채 작은 구멍 등을 살펴보면 카메라 설치 유무를 확인할 수 있다. 유리 성분으로 만든 카메라 렌즈 특성상 빛을 반사하게 돼 있기 때문. 그러나 초소형 카메라의 경우 가까운 곳에서 빛을 비추는 게 아니라면 확인하기 어렵다는 한계가 있다.
이 밖에도 공간과 어울리지 않는 물건이 있다면 그 물건을 치우거나 장소에서 빠져나오는 방법으로도 예방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화장실에 차 키가 놓여 있거나 물통과 같은 물건이 있다면 의심해보는 것이다.
일상에서 불법 촬영 피해를 예방하는 방법을 바라보는 시선은 극명하게 나뉜다. 교묘한 범죄 수법을 막을 수 없다면 미리 대처해야 한다는 의견이 있는가 하면, 피해를 입을 수 있다는 이유만으로 일상에서 불안감을 안고 개인이 예방 방법을 고민하고 이행하는 게 옳지 않다는 반응도 있다.
한편 국회에서는 초소형 카메라를 악용한 범죄 근절을 위해 논의를 이어가고 있다. 진선미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지난 3월 변형 카메라 제조·수입·수출·판매·구매대행 등에 대한 등록제를 도입하고, 이력 정보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는 내용의 ‘변형카메라의 관리에 관한 법률안’을 발의했다.
전문가 Q&A
서승희 한국사이버성폭력대응센터 대표에게 불법 촬영 범죄에서 벗어날 수 있는 근본적인 대안책을 물었다.
Q 변형 카메라로 인한 범죄가 점점 치밀해지고 있습니다. 초소형 카메라뿐 아니라 온라인 공간을 이용한 촬영물 관련 성폭력이 발달할 수 있을 만큼 발달했습니다. 불법 촬영물을 비롯한 디지털 성폭력이 돈벌이 수단이 되면서 하나의 산업으로 자리매김한 탓도 크죠. 촬영물을 만들어낼 수 있는 다양한 종류의 초소형 카메라, 변형 카메라 등 디지털 기기를 제한 없이 공급할 수 있다는 점까지 맞물리면서 범죄가 근절되지 않는 것입니다.
Q 불법 촬영 피해를 알았을 때 가장 먼저 해야 할 조치는 무엇인가요? 촬영에 사용된 기기나 원본 촬영물을 확보해야 합니다. 또 가해자의 신상 정보도 알아내는 게 좋습니다. 피해와 관련된 정보를 구체적으로 확보해야 제도권 내에서 보호조치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죠. 디지털 기기는 수사 의뢰를 하는 과정에서 필요합니다. 증거 영상물은 수사 과정에서 피해를 증명할 때 중요한 증거물이 되고 온라인에 불법 촬영물이 유포됐을 시 삭제 지원을 받을 때 필요한 자료입니다. 원본 촬영물을 구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면 기기를 확보해 피해를 입증하는 것도 방법입니다.
Q 초소형 카메라 판매 규제를 촉구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습니다. 악용 사례를 막을 수 있는 규제가 필요합니다. 본래의 이용 목적으로만 판매·구매할 수 있도록 등록제를 실시하고 불법 거래를 할 수 없도록 하는 규제 방안을 만들면 불법 촬영 피해를 줄일 수 있습니다. 또 성폭력뿐만 아니라 당사자의 동의 없이 촬영하는 것만으로도 개인의 자유권이 침해될 수 있죠. 긍정적인 방향으로 카메라가 활용될 수 있도록 제도가 뒷받침돼야 합니다.
Q 일상에서 몰래카메라 피해를 예방할 수 있는 방법이 있나요? 알려진 방법으로는 몰래카메라 탐지 필름, 적색 셀로판지, 스마트폰에 부착된 카메라로 숨어 있는 카메라를 찾아내는 방식 등이 있습니다. 하지만 시중에서 판매하는 필름, 스마트폰을 활용한 카메라 탐지 방법으로 100% 불법 촬영용 카메라를 찾아낼 수는 없습니다. 또 개인이 폭력을 예방하기 위해 대안책을 모색하는 것보다 국가 차원에서 범죄를 근절할 수 있는 방법을 마련해야 범죄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Q 불법 촬영을 근절할 수 있는 대안책은 무엇인가요? 재판부에서 법률에 명시된 형량을 적용하는 선례를 보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현행법상 불법 촬영 범죄는 징역 7년 이하, 5,000만원의 벌금형으로 처벌 수위가 낮지 않습니다. 그러나 재판부에서 집행유예, 미약한 수준의 벌금으로 처벌해 범죄율과 재범률이 매해 늘어나는 것이죠. 범죄의 심각성, 피해의 무게를 고려한 판단이 우선돼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