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부생활><우먼센스>의 편집장을 지낸 이은숙 작가는 잡지업계에서 '글발' 좋고 '쏘쿨'하기로 명성이 자자하다. 올해 60세가 된 그녀가 지난 50대를 되돌아보는 에세이 <불량한 오십>(나무나무 출판사)을 출간했다. "도대체 사회생활이, 인간관계가 왜 이렇게 어렵냐"는 기자의 투정 섞인 질문에 인생 선배로서 따뜻한 조언을 건넸고, 분위기가 진지해졌다 싶을 땐 '촌철살인' 위트 있는 한마디를 덧붙였다.
에세이 <불량한 오십>에는 이은숙 작가 특유의 따뜻함과 위트가 가득 담겨 있다. 은퇴 후 제2의 인생을 시작하라는 조언이 담겼으리란 기대는 금물. 누구나 살면서 한 번쯤 느꼈을 법한 희로애락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데, 39개 에피소드를 읽다 보면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면서 키득키득 웃음이 나온다. 그러다 불현듯 눈시울을 적시기도 하니 당황하지 말자. 이 책은 꼭 50대를 위한 책이 아니다. 우리의 인생사가 담긴 일기 같은 책이다.
<불량한 오십>은 어떻게 시작됐나요? 잡지사 <주부생활> 기자로 사회생활을 시작해 다양한 매체에서 편집장을 거치며 30년간 치열하게 직장 생활을 했어요. 50대 중반에 퇴직해 평일 오전 할 일 없이 공원에서 어슬렁거리고, 틈만 나면 여행을 다녔는데 그제야 세상이 보이더라고요. 늘 '편집장'이니 '국장'이니 하는 타이틀을 머리에 이고 일만 하며 살았는데 돌이켜보니 그럴 필요 없었어요. 뒤늦게 가족의 본질과 나이 듦에 대한 고민, 인생을 살아가는 태도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는데, 그게 <불량한 오십>으로 이어졌어요. '불량한'이라는 형용사는 낚시성 제목이에요.(웃음) 행실이 바르지 못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사회가 정한 규범대로 혹은 누군가 시키는 대로 살지 않고 내 자유의지대로 살겠다는 의미에서 불량하다는 단어를 선택했죠.
고민에 대한 답은 무엇이었나요? 사회에서 주어지는 대로 살지 말고 내 자유의지로 나와 내 주변을 책임지면서 살아보자는 것이요. 남들이 앞만 보고 직선으로 뛸 때 나는 주위를 곁눈질하며 느적느적 게걸음으로 걷겠다는 거였죠. 이런 행동이 불량한 태도 아닐까요? 행실이나 성품을 나쁘게 한다는 게 아니라 남들은 그러라 그래. 나는 내 방식대로 자유롭게 살겠다는 생각을 하는 거죠.
30년간 직장 생활을 하며 성실하게 살아오셨잖아요. 나름의 파격적인 행보예요. 되돌아보면 성실했던 걸 가장 후회해요. 조금씩 주변도 둘러보고 늦장도 부리면서 살걸 그랬어요. 우리는 모두 목표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사실 목표가 없는 삶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요. 목표를 달성하고 얻는 행복이 있지만, 그것이 인간의 행복을 좌우하지 않아요. 목표를 달성한 다음에 인생이 나아질까요? 그렇지 않아요. 별다른 게 없어요. 살다 보니까 인생이 마치 출발선에 서 있다가 '준비 탕!' 하면 출발하는 마라톤처럼 지금부터 좋은 일만 일어날 것이라는 순간은 없더라고요. 이것을 깨닫고 나니 '인생 별거 없어. 오늘 하루만 잘 살자'는 마음이 생겼어요.
인생에서 50대란 어떤 시기인가요? 한마디로 낀 세대예요.(웃음) 독립을 상실한 부모님과 독립이 결여된 자식을 케어하면서 나의 노후도 챙겨야 하니까요. 결혼한 여자에겐 퇴직한 남편까지 덤으로 얹혀 있고요. 또 루틴이 사라지는 나이이기도 해요. 이전까지 경제적인 이유로 즐겁지 않아도 일을 해야 했는데 자녀들이 웬만큼 성장하면서 그럴 필요가 없어져요. 동시에 무엇을 하고 살아야 할지 고민이 시작되는 때죠.
좋은 점은 없나요? 가열했던 1라운드의 의무를 끝내고 스테이지를 바꾸기 전까지 휴가 같은 시간이에요. 시간이 많아지고 마음에 여유가 생겨서 좋아요. 50대가 진짜 좋은 건 인생이 별 볼 일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어서죠. 그래서일까요? 저는 30대로 돌아가라고 하면 안 돌아갈 거예요. 30대의 불안이나 40대의 자기반성이 없어도 되는, 편안한 나이이거든요. 결혼 생활을 짧게 끝내고 직장 생활을 하면서 내 힘으로 집을 사고 아들을 키우며 인생을 잘 꾸려 여기까지 왔어요. 이제야 내가 원하는 걸 할 수 있게 됐죠.
한편에선 50대엔 무언가를 시작하기엔 너무 늦었다고 말하기도 해요. 에이, 평균수명이 얼마나 긴대요? 50대에 은퇴해도 원하는 걸 할 수 있는 시간이 충분해요. 거창하거나 죽기 살기로 해야 하는 일이 아니라 재밌고 즐거운 일을 시작하면 돼요. 저도 '나는 작가가 될 거야'라는 마음으로 책을 쓰기 시작하지 않았어요. 지인의 권유로 '50대 생활 백서'를 주제로 책을 써보려다가 에세이가 된 거였죠. 결과를 바라지 않고 무엇이든지 시작하면 돼요. 의도한 것이 아닌 다른 결과물이 나올 수도 있는데, 그러면 어때요? 내가 즐거우면 그만이죠. 무엇이든 저지르면 길이 보여요. 그것들이 모여 콘텐츠가 되고 자산이 되죠.
인생도 처음부터 길을 잘 들여야 해요.
신경 안 쓰면 저절로 풀릴 일도
남보다 잘하고 싶어 안달하다가 오히려 삐끗하기 쉬워요.
인생을 순하게 길들이는 최고의 방법은 ‘그냥’ 사는 거예요.
나의 인생철학 '운칠기삼'
이은숙 작가는 한 에피소드에서 잡지사 <주부생활>에 취직했던 때를 이야기했다. 취업을 준비하며 여러 차례 낙방했던 그녀는 <주부생활>의 합격 대기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지만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포기한 채 다른 기업으로 출근을 결정했을 때, 우연히 친구에게 <주부생활>에 합격한 한 지인이 다른 기업으로 출근하기로 결정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이은숙 작가는 <주부생활>에 전화를 걸어 인원 충원에 대해 물었는데 그것이 '취뽀(취업 성공을 뜻하는 취업 뽀개기의 준말)'로 이어졌다. 당시 인원 충원 계획이 없었던 <주부생활>에서 그녀의 열정에 반해 충원을 결정했던 것. 그야말로 '운7'이 작용했던 사례다. 그녀는 당시 호황을 누리던 잡지업계에서 유난히 입사하기 어려운 잡지사로 통했던 <주부생활>에 입사해 잡지업계에서 30년 동안 일할 수 있었던 것은 그때의 '운7'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작가님에게 '운칠기삼'은 어떤 의미인가요? 인생에 대한 태도라고 생각해요. 운이 7이라면 성공이 오롯이 내가 잘해서 이룬 게 아니듯이 실패 역시 마찬가지예요. 결과는 나의 것이되 나의 것이 아니니 우쭐댈 필요도, 좌절할 이유도 없어요. 내가 무언가를 하다가 '삑사리'가 났다면 운7이 나를 안 도와준 것이죠. 우리는 그저 오늘 하루 3의 노력을 다하면 충분해요. 사실 내일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는 채 살아가는 게 우리잖아요. 지금 좀 잘나간다고 남을 무시하거나 우쭐대는 일만큼 볼썽사나운 일도 없죠. 운칠기삼을 되새긴다면 인생을 겸손하게 살 수 있어요. 나의 성공이 전적으로 나 혼자 잘나서가 아니라 수많은 우연과 외부의 도움으로 이뤄진 운7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사실을 인지하면 자연스럽게 겸손해질 수밖에 없죠.
젊을수록 '삑사리' 나는 것에 좌절감을 크게 느끼죠. 그럴 땐 운칠기삼의 자매품 '아니면 말고'를 소환하세요. 본전 생각에 발목 잡혀 포기하지 못할 때, 고지가 바로 앞이지만 능력 밖에 있을 때 마음을 내려놓는 용기가 필요해요. 아니다 싶은 순간 미련 없이 등 돌려 나오는 기술이에요. 살다 보니 우리 인생의 중요한 순간은 철저한 준비와 노력 끝에 맞닥뜨리기보다 아니면 말고라는 마음가짐 속에 어느 날 불쑥 나타나더라고요.
목표를 이루기 위해 계획하고 실천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며 살아왔어요. 이왕 태어났으니 목표를 지니고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며 사는 건 멋지죠. 상황을 통찰하고 미래를 준비하는 사람은 존경스러워요. 하지만 단순하고 둔감하게 사는 것도 나쁘지 않아요. 목표를 이루기 위한 과정이 아니라 그저 이 순간이 소중한 인생, 지난 일을 소환해 되새기지 않고 눈앞의 오늘에 집중하는 인생, 오늘 하루 최선을 다한 뒤 끝나고 나면 잊어버리는 인생. 그런 삶에는 후회나 자기 연민이 없어서 좋아요. 자기 인생의 모든 순간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고, 외부 자극에 일일이 반응하는 삶은 피곤해요. 한번 익숙해지면 바뀌기 어려운 인간관계처럼 인생도 처음부터 길을 잘 들여야 해요. 신경 안 쓰면 저절로 풀릴 일도 남보다 잘하고 싶어 안달하다가는 오히려 삐끗하기 쉬워요. 인생을 순하게 길들이는 최고의 방법은 '그냥' 사는 거예요.
오늘 하루 최선을 다하는 태도가 오랜 직장 생활의 비결었나요? 일복이 넘쳤어요.(웃음) 직업적인 특성 때문이기도 했지만 일을 장악하려는 태도 때문에 주말 근무와 야근, 밤샘 작업을 밥 먹듯이 했어요. 지나고 보니 일에는 완벽이란 게 없어요.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만큼만 하고 필요한 건 팀원들과 나누고 해야 하는데, 저는 늘 일을 싸 짊어지고 살았죠. 또 눈치가 없는 것도 직장 생활을 하는 데 도움이 됐어요. 지인들은 제가 눈치를 안 보고 윗사람에게 하고 싶은 말을 다 한다고들 하는데, 사실은 눈치가 없어서 그런 거예요. 눈치가 없으니 사내 소문에 관심도 없고 어디에 줄을 서야 할지도 몰랐죠. 결과적으로 제가 오랫동안 직장 생활을 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됐어요.
어디에서나 인간관계가 가장 어려운 것 같아요. 사실 전 둔감해서 인간관계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 편인데 부모, 자식이나 친구일지라도 '내가 이렇게 했는데 뭐가 남는 거지?'라며 본전이 생각나지 않게 거리를 두고 지내는 게 좋다고 생각해요. 이때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중심을 잡는 거예요. 모든 일이 100% 좋을 수 없듯이 인간관계도 마찬가지로 좋다가 나쁘다가를 반복한다는 것을 알고 사사로운 것에 휘둘리지 않아야 해요. 그리고 서로를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봤으면 좋겠어요. 저 역시 주변 사람에게 따뜻하게 대하고 내가 있는 자리를 양보하는 할머니가 되고 싶어요.
인생, 그까짓 거, 뭐
이은숙 작가가 농담처럼 건네는 말엔 따뜻함이 있었다. 아는 척, 그런 척, 아닌 척과 같은 '척'이 없는 솔직담백한 말에서 위로를 받았다. <불량한 오십>에도 그녀의 화법이 짙게 녹아 있다.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나면 '인생엔 정답이 없다. 최선을 다했으면 충분하다' '뭐든 지나고 나면 별일 아니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어떤 문제든 영원한 것은 없고, 무엇이든지 잘 해결되리라는 긍정 에너지가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작가님은 언제 가장 행복한가요? 지금까지 살면서 깨달은 바에 의하면 행복해지는 최고의 방법은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않는 거예요. '승부보다 완주가 더 중요한 걸까?'라는 글귀를 본 적이 있는데 질문의 전제 자체가 잘못됐어요. 타인과의 경쟁에 집착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완주에 대한 강박관념도 버려야 해요. 승부나 완주보다 중요한 건 지금 걷고 있다는 사실이에요. 각자 자신만의 길을 걷고 있는데 남들보다 뒤처진 것도 앞선 것도 있을 리 없죠. 내가 유일하고 독립적인 존재인 만큼 타인도 마찬가지예요. 우리 모두 혼자라서 외롭지만 동시에 자유롭기도 해요. 혼자의 시간을 온전히 즐길 수 있는 사람만이 진정으로 행복할 수 있어요.
혼자의 시간을 온전히 즐기는 순간은 언제인가요? 매일 밤 임신부 수면 자세로 웹툰을 볼 때나 빈집에서 혼자 리모컨을 독점하는 시간이요. 또 어머니는 동생 집에 가시고, 아들은 여행을 떠난 3년 전 연말은 지금 떠올려도 흐뭇해요. 한겨울 따뜻한 집 안, 모닝 맥주와 함께 드라마 <시그널>을 몰아 봤던 2박 3일, 마음에 그늘이라곤 1도 없이 완벽한 평화를 즐겼어요.
독자들이 <불량한 오십> 읽고 무엇을 느끼길 바라나요? 인생 그게 뭐라고!(웃음) 방송인 유재석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어요. 먼 미래에 대한 계획 없이 그저 하루를 열심히 살면서 매일매일 쌓아나간다고요. 저는 그런 태도가 좋아요. 단순하게 최선을 다해 오늘을 마무리하는 거죠. 내 인생에 거리를 두고 살았으면 좋겠어요. 물론 지금 당장 내게 직면한 문제가 힘들고 버거울 수 있지만 인생에 푹 빠져 있으면 허우적거릴 수밖에 없어요. 그런데 지나고 나면 대단한 게 아니더라고요. 무엇이든지 올인하면 지쳐 나가떨어지니까 나의 에너지 중 20%는 남겨둬야 해요. 그래야 쓰러졌을 때, 다시 일어설 힘이 생겨요.
마지막 질문입니다. 좋은 인생이란 어떤 걸까요? 그런 날 있지 않나요? 하루를 마치고 잠자리에 누워 하품을 늘어지게 하면서 기분 좋게 기지개를 켜는 밤이요. 아, 오늘 하루도 별일 없이 잘 보냈구나, 오늘 할 일을 다 끝냈구나 하는 충만한 기분이 들면서 편안하게 잠을 청하는 순간이요. 그런 하루하루를 쌓아나갈 수 있다면, 그런 게 좋은 인생이라고 생각해요. 조금 다른 맥락이지만, 자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 자식에게 존경을 받는 게 성공한 인생이라고 할 수 있죠. 자식들이 모르는 거 같아도 감추고 싶은 부모의 약점이라든가 뒷모습을 다 알고 있거든요. 자식에게 존경받는 거, 그거 진짜 어려워요.
이은숙
<주부생활> <우먼센스> 외 여러 잡지의 편집장을 거치며 30년간 커리어 우먼으로 살았다. 직업은 전문직이었지만 퇴직 후 모르는 게 많은 어리바리 초보 생활인으로 지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