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제의 드라마 tvN <마인>의 중심에는 배우 박원숙(73세)이 있다. 그녀는 극 중 '효원그룹' 한 회장의 아내인 왕사모 '양순혜' 역으로 시청자를 사로잡았다. 양순혜는 심기가 불편하면 집안의 메이드들을 쥐 잡듯이 몰아세우며 자신의 위치를 확인하는 괴팍한 성격의 소유자다. 그런 그녀를 '빌런'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박원숙이 그려낸 양순혜에게는 측은함과 공허함이 담겨있다. 이는 박원숙의 연기 철학과 맞닿아 있다. 그녀는 캐릭터가 가진 서사의 어느 한 부분도 놓치지 않는다. 그렇기에 박원숙이 그려내는 캐릭터는 미워할 수만 없는 것이다. 무엇보다 그녀의 연기력은 51년 내공을 고스란히 녹아낸다.
대한민국 상위 1% '효원가'에서 권력을 손에 쥐려는 기 싸움, 그 과정에서 벌어진 살인 사건의 진실을 찾아가며 극 후반을 달려가고 있는 <마인>. 그 촬영장에서 박원숙을 만났다. 환한 미소로 인사를 건네는 그녀는 <마인> 대본을 품에 안고 있었다. 이날 박원숙의 촬영 파트너는 드라마의 시그너처로 통하는 공작새 '노덕이'. 그녀는 카메라가 꺼진 뒤에도 극 중에서 자식처럼 대하던 노덕이를 다정하게 부르며 교감했다.
tvN 드라마 <마인>의 인기가 높습니다. 모든 스태프와 연기자의 의기투합이 시청자에게 잘 전달된 거라고 생각해요. 작품의 반응이 좋은 것만큼 보람찬 일이 없어요. 시청자의 관심이 작업을 더 열심히 하게 만드는 원동력이 돼요.
'양순혜'를 연기한 배우 박원숙에 대한 호평이 이어지고 있어요. 확실한 색깔을 가진 캐릭터를 만나면 고민이 많아져요. 배우가 어떤 색을 입히느냐에 따라 캐릭터가 다르게 해석되기 때문이죠. 극 중 양순혜의 목소리 톤, 표정, 감정을 과하게 표현하면서도 시청자에게 거부감이 들게 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촬영한 뒤에 '내가 과하진 않았나?' '미흡하진 않았나?'라는 생각을 거듭했는데 좋게 봐주셔서 다행이에요.
양순혜는 며느리에게 소리를 지르며 자신의 권력을 과시하고 물건을 집어 던지는 등 재벌가의 민낯을 드러내는 캐릭터인데 어떻게 해석했나요? 우리 사회에서 벌어진 갑질 문제를 떠안은 현실적인 캐릭터라고 생각해요. 배역을 맡았을 때, 포악하게 변하게 된 계기와 서사를 깊이 고민해봤어요. 막대한 권력을 쥔 회장의 부인이기 전에 한 여자로서 양순혜를 바라보고 접근한 거죠. 극에서 효원가의 며느리가 될 정도면 배울 만큼 배웠을 거고 부족함 없이 자랐을 거라 상상했어요. 그런 여자가 첫사랑을 잊지 못하고 한평생을 살아가는 남편 앞에서 제정신으로 살 수 있겠어요? 물론 타인을 무시하고 자신의 욕망만을 좇아 사는 건 잘못됐지만, 사랑받지 못한 채 살아가는 한 여자의 슬픔이 인생을 추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했어요.
상위 1%의 삶, 겪어보니 어떤가요? 생경해요. 커다란 식탁이 놓인 다이닝 룸에서 고급스러운 식기에 매끼를 대접받는 인생을 언제 겪어보겠어요.(웃음) 촬영하면서 먹기 아까울 정도로 정성스럽게 차려진 음식들을 맛봤어요. 한편으로는 '매일 이렇게 먹고 살면 재미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죠. 푸짐하게 차린 상 앞에 가족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이것저것 골라 먹는 재미가 있잖아요. 멀찍이 떨어져 앉아 각자 앞에 놓인 음식에 칼질을 하면서 먹고 사는 사람들은 평생 모를 즐거움이죠.
양순혜의 헤어와 메이크업, 화려한 의상도 화제입니다. 작품마다 캐릭터에 어울리는 외형을 만드는 데 심혈을 기울여요. 보는 즐거움도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의상이나 메이크업을 어떻게 해야 배역의 이미지를 각인시킬 수 있을지 고민해요. 이번 역할은 주로 집에만 있는 사모님이라서 로브를 활용하기로 했고, 캐릭터의 색깔을 반영해 과하게 느껴질 만큼 화려한 디자인으로 준비했어요. 의상팀이 외출복은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물었는데 영부인처럼 꾸미는 게 좋겠다고 의견을 제시했어요. 백발의 올림머리와 날카로워 보이는 메이크업도 마찬가지예요. 양순혜는 집에 머무르는 시간에도 품위를 유지하는 스타일일 것 같았거든요. 촬영 초반에는 분장만 2~3시간이 소요됐는데 이제는 다들 손발이 척척 맞아서 1시간 30분으로 줄었어요.
과거에는 자기 잘난 맛에 살아서 내 인생만 생각하면서 버텼어요. 그런데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내 마음을 돌보면서 살아야 했나 싶어요. 지금은 일상에서 느끼는 크고 작은 감사함으로 살아요.
맏며느리 '정서현'(김서형 분), 둘째 며느리 '서희수'(이보영 분)와 함께하는 장면이 많았는데 후배 배우들과 연기 호흡은 어땠나요? 모든 순간이 아름다웠어요. 큰아들로 출연했던 박혁권의 일품 연기와 어느 한 부분 빠짐없이 예쁜 (이)보영이의 당찬 연기를 지켜볼 수 있었던 시간이에요. 또 (김)서형이에게는 "이번 드라마가 네 인생 작품이 될 거다"라고 말했어요. 극 중 정서현은 강인한 동시에 섬세한 감정선을 놓치지 않아야 하는 역할인데 서형이가 가진 에너지와 만나 충분한 시너지를 낼 거라 확신했거든요.
선배로서 현장에서 어떤 조언을 해줬나요? 저는 웬만하면 연기 조언을 안 해요. 배우마다 자신이 생각하는 연기의 방향이 있을 테니까요. 다만 극의 맥락을 짚기 어려워하는 것 같으면 도와줘요. 예를 들어 화를 내는 장면이면 지금 왜 화를 내는지, 맡은 캐릭터가 화를 낼 때 어떤 식으로 표현할 것 같다고 의견을 전하는 거죠. 그리고 후배들은 제가 현장에 함께 있는 것만으로 어려울 테니까 행동을 조심하려고 해요. 가급적이면 웃을 일을 많이 만들어주려고 하고요. 그게 선배가 현장에서 보여줘야 할 모습이라고 생각해요.
<마인>을 통해 배우 박원숙은 무엇을 얻었나요? 드디어 손녀가 할머니의 직업이 배우라는 걸 알게 됐어요.(웃음) 2003년 아들이 사고로 떠난 뒤 손녀를 만나지 못한 채 지내다가 최근 다시 왕래를 하게 됐거든요. 한 번씩 만나서 데이트하는데 같이 외출할 때 사람들이 저를 알아보면 손녀는 "왜 인사하는 거야?"라고 묻곤 했어요. 제가 배우라는 걸 몰랐대요. 그런데 <마인>을 통해 할머니가 TV에 나오는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됐다고 해요. 손녀가 올해 대학교 졸업을 앞두고 있어 자주 만나지 못하는데 드라마를 통해서라도 만날 수 있어서 감사해요. 앞으로 손녀를 위해서라도 더 열심히 활동해야겠단 생각이에요.
지난 1970년 MBC 2기 공채 탤런트로 데뷔해 줄곧 연기라는 외길을 걸어온 박원숙. 수더분한 아내(MBC <한 지붕 세 가족>)부터 소심한 어머니(MBC <커피프린스 1호점>), 도도하지만 내 사람들에게는 따뜻한 중년 여배우(tvN <디어 마이 프렌즈>) 등 그녀의 필모그래피는 캐릭터에 구애받지 않는 다양한 작품들로 가득하다. 연기 인생 51년, 공백기없이 활동을 이어온 박원숙은 배우로서 첫발을 디뎠을 때 마음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다.
한평생 연기만 하면서 살았어요. 오랜 세월을 배우로 살 수 있음에 행복하고 감사하고, 지금까지 잘해왔다는 생각을 해요.(웃음)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배우가 되는 게 꿈이었어요. 충무로에 살면서 자연스럽게 배우를 많이 보게 됐고 연기자가 못 되더라도 시나리오 작가나 감독이 돼서 그 언저리에 머물고 싶었죠. 연극 무대에 서면서 연기자가 제 길이라는 걸 확신하게 됐어요. 데뷔한 후 한창 활동할 때는 연기 욕심을 채우려고 사시사철 쉬지 않고 일했어요. "메뚜기도 한철인데 '박뚜기'는 쉴 새 없이 뛴다"는 이야기를 들을 정도였죠.
시간이 흐르면서 맡게 되는 역할의 비중이 줄어드는 게 중년 배우들의 고민이던데 본인도 그런가요? 작품에서 비중이 크든, 작든 맛깔나게 내 역할에 집중하면 된다는 마음을 잃지 않으려고 해요. 보는 분들에게 즐거움과 감동, 진심을 전하는 것만큼 배우에게 큰 사명감이 있을까 싶어요. 이제는 나이가 들다 보니 더운 여름이나 추운 겨울에는 작품 활동을 하는 게 힘들어서 봄이나 가을 정도에 들어오는 작품을 주로 선택해요. 그러니 역할의 비중에 대한 욕심은 자연스럽게 내려놓게 되더라고요.
어떤 배우로 남고 싶나요? 연기할 때는 강하고 독하지만 카메라 밖에서는 허술하고 인간적인 배우. 어느 현장에서나 제가 고령자이니까 어렵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데 더 가까이 다가가서 호흡을 맞추고 싶은 마음이 커요. 시청자에게는 '박원숙 연기 맛깔난다'는 느낌을 주고 싶고요.
이성과의 사랑은 하고 싶지 않아요. 70년 넘게 살면서 여러 형태의 사랑을 했고 그 기준치가 높아졌어요. 소중하고 숭고한 사랑이 아니면 구태여 감정을 소모해야 하나 싶어요. 불완전한 둘보다는 완전한 하나가 낫다고 생각해요.
"사람하고 나누는 것만이 사랑은 아니더라"
박원숙은 자신의 이름을 내건 KBS2 예능 <박원숙의 같이 삽시다>로 시청자를 만나고 있다. 가수 또는 배우로서 화려했던 전성기를 보내고 인생의 후반전을 살아가는 중년 여자 스타들의 동거 생활을 담은 리얼리티 프로그램으로 가수 혜은이, 배우 김영란·김청과 함께 출연한다. 순탄하지 않았던 인생에 대한 이야기를 허심탄회하게 털어놓으며 눈물을 짓다가 작은 농담에 금방 웃어 보이는 이들의 모습에 많은 시청자가 공감하고 있다.
<박원숙의 같이 삽시다>가 시즌 3까지 이어지며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본인의 이름을 내건 방송에 대한 부담은 없나요? 즐거운 마음이 커요.(웃음) 시즌 1은 제 이름 없이 <같이 삽시다>로 시작했는데 여자 넷이 모여서 복닥거리고 농담하고 편하게 지내는 게 보기 좋았는지 많은 분이 사랑해주시더라고요. 솔직하게 말하자면 처음에는 제가 잘하고 있는지 확신이 서지 않았는데 방송인 주병진 씨가 게스트로 출연했을 때 저에게 "후배를 배려하는 모습에서 리더십이 느껴진다"고 말하더라고요. 리얼리티 프로그램인 데다 제가 나오는 TV 프로그램을 챙겨 보는 편이 아니라 어떻게 행동하고 말했는지 몰랐는데 칭찬해줘서 기분이 좋았죠.
같이 살아보니 어떤가요? 맞춰가는 과정에서 잡음이 생기는 게 자연스럽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같이 사는 게 행복하기만 하다면 거짓말이에요. 다만 갈등이 생겼을 때 배려와 양보를 하고 스스로를 내려놓을 줄 아는 게 중요해요. 그래야 큰 싸움으로 번지지 않고 행복을 누리면서 살 수 있죠. 그리고 혼자일 때는 몰랐던 것들을 새롭게 알게 됐어요. 누구나 다 힘들고, 어려움을 겪으면서 근근이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요. 방송에서 눈물을 보일 때가 많은데 동생들이 빚에 시달렸던 이야기, 사랑에 배신당한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마음이 정말 아려요. 방송을 본 지인이 "연기할 때는 주로 센 역할만 해서 진가를 보여줄 기회가 없었는데 예능에서 박원숙의 진짜 모습을 느낄 수 있어서 좋다"고 말하더라고요. 저에게 보너스 같은 프로그램이에요.
경상남도 남해에서 살고 있는데 '박원숙표 자연 라이프'를 소개해주세요. 하루하루 자연의 생기 속에서 생명의 신비함을 느끼면서 행복하게 지내고 있어요. 햇빛, 공기, 바람을 천천히 느낄 수 있는 여유가 생겨서 좋고요. 원래 자연 속에서 사는 게 꿈이라 강원도 청평 별장에서 지냈는데, 2003년 아들이 사고로 세상을 떠난 뒤에 더 이상 머무르고 싶지 않아서 다른 곳으로 옮기기로 한 거예요. 옮길 곳을 찾다가 주변에서 남해를 추천받았어요. 처음 방문했을 때 지중해의 한 마을에 온 것 같았어요. 그래서 곧장 남해에 보금자리를 마련했죠.
적적한 곳에서 혼자 지내면 외롭지 않나요? 불완전한 둘보다는 완전한 하나가 낫다고 생각해요. 둘이서 살아보려고 그릇을 비롯해 식기를 전부 세트로 장만했는데 안 돼서 어쩔 수 없기도 하고요.(웃음) 원해서 혼자가 된 건 아니지만 둘이 사는 건 이제 그만해도 된다고 생각해요. 혼자 살고 있지만, 세상의 많은 사람과 얽혀서 관계를 맺고 있으니 결국 혼자가 아닌 셈이죠.
사랑은 안 하세요?(웃음) 늘 하고 싶죠. 그런데 남녀 간의 사랑은 하고 싶은 마음이 없어요. 70년 넘게 살면서 여러 형태의 사랑을 했고 그 기준치가 높아졌어요. 제가 겪어본 아름다운 사랑이 기준점이 된 거죠. 소중하고 숭고한 사랑이 아니면 구태여 감정을 소모해야 하나 싶어요.
세 번의 이혼, 전남편의 사업 실패로 빚 독촉에 시달리는 등 힘든 시기를 겪기도 했습니다. 이 시간을 이겨낼 수 있었던 원동력이 궁금합니다(박원숙은 지난 1969년 서 모 씨와 결혼 후 1981년 이혼, 1984년 재결합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이혼했다. 그 후 1989년 사업가 김 씨와 결혼해 1995년 이혼했다). 과거에는 자기 잘난 맛에 살아서 내 인생만 생각하면서 버텼어요. 그런데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내 마음을 돌보면서 살아야 했나 싶어요. 지금은 일상에서 느끼는 크고 작은 감사함으로 살아요. 건강한 몸으로 일할 수 있으니 감사하고, 나를 찾아주는 사람이 있으니 감사하다는 마음을 가져요.
박원숙의 전성기는 언제였다고 생각하나요? 내가 살아 숨 쉬는 모든 순간이요. 외출했을 때 저를 알아보고 같이 사진을 찍자고 하는 분들을 만날 때마다 느껴요. 남해로 보금자리를 옮길 때 카페(박원숙의 커피앤스토리)를 운영하려고 했던 게 아닌데, 많은 분이 관광지처럼 생각하고 찾아주셔서 시작하게 됐어요. 먼 걸음 와주신 걸 알기 때문에 최선을 다해서 즐겁게 맞아들이려고 하고요.
끝으로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나요? 힘들 때 생각나는 사람. 그리고 밥 한 끼 사달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고 싶어요. 힘든 사람들을 보고 있으면 다 내주고 싶은 마음이랄까요? 저도 쉬운 삶을 살아온 게 아니다 보니 삶에서 아픔을 겪는 사람들을 못 본 체 지나칠 수 없더라고요.
촬영 전 한 손에 대본을 쥐고 허공을 바라보며 감정을 가다듬는 박원숙에게 한참 동안 시선을 뗄 수 없었다. 그녀의 얼굴에 기쁨과 슬픔, 욕망과 처연함 등 수많은 감정이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우리가 지금 그녀의 연기에 열광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