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측하지 못한 결과였다. 회차를 더할수록 우승 후보의 두각이 드러나는 여느 오디션 프로그램의 룰을 깬 TV 조선 <내일은 미스트롯 2>(이하 <미스트롯 2>)의 이야기다. 결승전까지 왕관의 주인공을 확신할 수 없는 경연이 펼쳐졌고 최종 진(眞)의 자리는 가수 양지은(32세)이 차지했다.
그녀에게 돌아간 왕관에 대해서는 모두가 납득하는 분위기다. 국악으로 다져진 단단한 음색, 아버지에게 신장이식을 하면서 음악인의 삶을 포기했던 지난날에서 비롯된 짙은 감성이 섞인 노래는 굳이 슬픔을 말하지 않아도 듣는 이들의 마음을 울리기에 충분하기 때문이다.
가수 송가인, 임영웅에 이어 트로트 3대 진으로 우뚝 선 양지은은 지난 5월 첫 번째 음원 ‘사는 맛’을 발매하며 공식 데뷔했다. 양지은만의 청아한 음색과 발라드 같은 잔잔한 분위기의 곡은 어느 때보다 위로가 필요한 사회에 “살아내느라 애썼다”는 노랫말로 긍정적인 기운을 불어넣는다.
트로트 열풍 속 깊은 울림을 선사하는 양지은을 만났다. 깊은 보조개가 돋보이는 화사한 미소로 인사를 건넨 그녀는 스튜디오에 들어서자마자 현장 분위기를 환하게 밝혔다.
“평범한 가정의 딸, 한 남자의 아내, 두 아이의 엄마로 살던 제가 가수로 활동하게 될 줄 누가 알았겠어요?(웃음) <미스트롯 2> 출연 이후로 꿈꿔보지 못했던 삶을 살게 됐어요. 어릴 적 즐겨 듣던 SG워너비 ‘라라라’를 만든 조영수 작곡가님의 곡으로 데뷔한 것, 방송을 통해 알게 된 사람들, 제가 설 수 있는 무대가 생겼다는 것까지 모든 게 신기하면서도 감사해요.”
최종 1위의 영예를 얻기까지 과정이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준결승 진출 직전 탈락의 고배를 마신 뒤 본가인 제주도에서 마음을 추스르고 있던 양지은은 학교폭력 논란으로 하차한 가수 진달래의 공석으로 재합류했다. 그녀에게 좋은 기회였지만, 준결승 무대를 하루 앞두고 전해 들은 합류 제안에 망설임이 따랐던 게 사실이다.
“탈락하고 집에만 있는 저를 본 남편이 바람을 쐬자며 아이들과 함께 놀이터에 나가자고 했어요. 놀이터에서 아이들과 도시락을 먹고 있는데 <미스트롯 2> 제작진에게 전화가 걸려왔고, 당장 서울로 와줄 수 있겠냐고 하더라고요. 합류 제안을 듣고 고민하는 제게 남편이 ‘평생 재도전하지 않은 걸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냐’고 묻더라고요. 그 말을 듣고 한 번 더 해보기로 결심했어요.”
고심 끝에 무대에 선 양지은은 지난 경연에서 보여준 적 없는 절절한 표현력으로 극찬을 자아냈다. 두 손을 꼭 쥔 채 열창한 ‘사모곡’으로 단숨에 관객 점수 1위를 얻었고, 감정을 쏟아내다 끝내 울컥하는 모습은 보는 이들에게 감동을 선사했다.
“그동안 보여드렸던 무대와 달라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온몸을 떨면서 노래를 불렀다고 하는데 당시에는 몰랐어요. 나중에 방송으로 보니까 손에 피가 통하지 않을 정도로 주먹을 꼭 쥐고 노래를 불렀더라고요. 이전에는 어떻게 해야 듣기 좋게 부를 수 있을지를 고민했어요. 또 제 방식대로 부르되 담백함을 잃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준결승 무대를 통해 뿜어내야 할 때는 해야 한다는 걸 깨달았어요.”
남편은 가정에 헌신적이에요. 자신의 일을 포기하고 오롯이 아내의 꿈을 응원해주는 게 쉽지 않잖아요. 그래서 제가 두 배로 잘해야 해요. 가끔씩 미안한 기색을 비치면 남편은 ‘그동안 고생했던 세월을 보상받는 거라 생각하라’며 오히려 절 다독여줘요.
힘겨운 고생 끝에 웃을 날 온다
‘국악인 출신’ ‘제주도 대표 효녀’ 등 양지은을 가리키는 여러 수식어에는 그녀의 아픔이 담겼다. 양지은은 국악으로 명창의 꿈을 꿨지만 갑작스러운 아버지의 시한부 선고에 신장이식을 결정하며 음악을 포기해야 했다.
“대학 1학년 때, 아버지가 3개월밖에 못 산다는 말을 들었는데 머릿속이 새카매지더라고요. 온 가족이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면서 제가 나서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의사 선생님을 찾아갔고, 검사 후 이식이 가능하다고 해 수술을 결심했죠. 수술 시 개복하는 범위가 커서 회복하기까지 오래 걸리는데 국악은 단전의 힘으로 소리를 내는 음악이라 어쩔 수 없이 휴식기를 갖게 됐어요. 음악을 함께했던 친구들이 전국 대회에서 수상하고 명창이 되는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죠. 아버지가 건강을 되찾아 기쁜 동시에 나만 뒤처지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 국악을 듣는 것조차 힘들었어요. 또 아버지가 긴 투병 생활을 하면서 경제적으로 어려워져 음악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어요. 음악 교사가 되는 걸로 만족하면서 살아야겠다고 생각했죠.”
꿈을 포기한 채 살고 있던 양지은이 다시금 마음을 잡기까지 주변의 도움이 컸다. 그녀의 국악 인생 20여 년을 함께했던 스승은 쉬는 동안 도태된 양지은의 국악 실력을 잡아줬고, 음악을 그만두지 말라는 무언의 메시지로 2014년에 판소리 흥부가 1호 이수증을 안겨줬다. 또 교생실습으로 인연을 맺은 담당 교사는 양지은이 마음에 품은 꿈을 이루기를 바란다며 진심 어린 조언을 건넸다고.
“취미로라도 국악을 계속 배웠으면 하는 마음에 스승님을 찾아갔어요. 수업할 때는 호랑이 선생님이지만, 제가 어렵게 발걸음했다는 걸 아셨는지 따뜻하게 맞아주셨어요. 음악 교사가 되겠다고 교생실습을 나갔을 때 제 담당이셨던 음악 선생님은 대뜸 저에게 ‘교사가 꿈이냐’고 물으시더라고요. 답변을 제대로 못 했는데 선생님께서 ‘저는 은퇴 후에 합창단에 들어가서 노래하는 게 꿈이에요’라고 말씀하시더라고요. 그 말을 듣고 제가 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 진지하게 고민하게 됐어요. 그러던 중 <미스트롯 1>을 보게 됐고 ‘내가 설 무대다’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어서 출전을 결심했죠.”
못다 이룬 꿈에 도전한다고 밝혔을 때 가장 기뻐한 이는 ‘가족’이다. 오랜 기간 가족 사이에서 음악은 일종의 ‘금기어’로 통했다. 신장이식을 받은 아버지는 꿈을 접은 채 살아가는 양지은에게 늘 죄인일 수밖에 없었고, 언니와 남동생은 형제들을 대표해 수술대에 오른 그녀에게 미안함을 느끼며 지냈다. 대화 내내 환한 미소를 잃지 않았던 그녀는 가족 이야기가 나오자 눈시울을 붉혔다.
“종종 아버지는 ‘내가 이식을 안 받았어야 네 꿈을 이뤘을 텐데…’라며 속상해하셨어요. 언니는 ‘왜 하필 음악을 하면서 살아가는 지은이가 꿈을 포기하고 수술을 하게 됐을까’라며 마음 아파했고요. 그런 상황이 이어지는 와중에 제가 노래를 다시 부르겠다고 하니 가족이 얼마나 기뻤겠어요. 제 결심을 듣고 가족 모두가 엉엉 울었어요.”
항간에 양지은이 ‘금수저’라는 소문이 떠돌았다. 그녀의 어린 시절 지역 군의원을 지냈던 아버지, 치과의사인 남편 등 몇 가지 프로필이 그녀를 가리키는 배경의 전부처럼 비친 것.
그러나 양지은은 알려진 것과 달리 지난한 성장 과정을 거쳐 지금의 자리에 왔다. 중학교 1학년 때 집 안 곳곳에 붉은색 경매 스티커가 붙은 장면을 목격했고, 시멘트 바닥인 가건물로 보금자리를 옮겨야 했다. 또 성악을 배우면 좋겠다는 제안을 받았지만 형편상 국악으로 우회해야 했으며 밀리는 레슨비에 눈칫밥을 먹으면서 음악을 이어오는 등 그녀의 삶은 녹록지 않았다.
“아버지가 군의원을 지내신 건 맞지만 봉사직이었고 당뇨 합병증으로 오랜 기간 편찮으셔서 일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어요. 어머니가 요양보호사로 일하면서 3남매를 키우셨는데 상황이 점점 나빠졌어요.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병원비를 어머니 혼자 어떻게 감당하겠어요. 하지만 생활이 여유롭진 않아도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랐어요. 큰 사랑을 받아서 부족함이 없어 보이는 거라고 생각해요.(웃음) 남편이 의사라는 이유로 오해를 사기도 하는데, 예상하시는 것처럼 결혼 생활이 풍족하진 않아요. 남편과 결혼할 당시 양가 도움 없이 성당에서 작은 결혼식을 올렸고 소박하게 가정을 꾸렸어요. 지금도 다른 가정과 다를 바 없이 지내고 있고요.”
대화의 주제는 치과의사로 알려진 양지은의 남편으로 이어졌다. 남편을 두고 삶의 동반자이자 동지라고 표현하는 그녀에게서 부부의 믿음과 감사함이 느껴졌다.
“남편은 워낙 조용한 성격이에요. 제가 경연곡을 고를 때도 적극적으로 제안하기보다는 혼자 음악을 듣다가 좋은 노래를 발견하면 ‘이 노래 어때?’라고 조심스럽게 권하는 스타일이죠. 결승전에서 진으로 선정됐을 때도 큰 리액션 없이 메시지로 축하한다고 말하더라고요.(웃음) 제가 트로트 가수에 도전하고 싶다고 말했을 때 남편이 저보다 더 기뻐했어요. 남편이 의사 시험을 준비할 때 제가 도왔던 것처럼 본인도 제게 도움이 되고 싶다고 말하더라고요. 저의 행복을 자신의 행복처럼 여기는 사람이에요.”
최근 남편은 바쁜 양지은을 대신해 잠시 일을 접어두고 ‘육아 대디’로 변신했다. 동시에 양지은의 제2의 매니저로 활약하면서 완벽한 외조를 이어가는 중이다. 단언컨대 100점짜리 남편이다.
“남편은 점수로 매길 수 없을 정도로 가정을 위해 노력해요. 제가 집안일에 신경 쓰지 않고 오롯이 가수 활동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해줘요. 아침부터 스케줄이 있는 날에는 먼저 일어나 저를 깨우고, 일과를 마치고 집에 가면 얼른 자라고 방으로 떠밀어요.(웃음) 또 끼니를 잘 챙겨 먹어야 한다며 손수 밥상을 차려요. 자신의 일을 포기하고 오롯이 아내의 꿈을 응원해주는 게 쉽지 않다는 걸 알아서 남편 몫까지 두 배로 잘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가끔씩 제가 미안한 기색을 비치면 남편은 ‘그동안 고생했던 세월을 보상받는 거라 생각해줬으면 좋겠다’고 말해요.”
전업주부로 지낼 때 문득 우울해지는 순간이 있었어요. 아이들을 돌보기만 했는데 시간이 훌쩍 흐르더라고요. 무엇보다 꿈을 이루기엔 너무 늦었다는 생각에 마음이 아팠어요.
전업맘에서 워킹맘으로
3살, 5살 두 아이를 키우는 양지은은 자녀 이야기가 나오자 여느 엄마와 다를 바 없는 모습을 보였다. 제주도와 서울을 오가며 일과 가사를 양분했던 그녀는 엄마의 손길이 필요한 나이인 아이들을 위해 최근 제주도에서 경기도로 보금자리를 옮겼다.
“항상 함께 있던 엄마와 떨어져 지내는 게 힘들다는 걸 알아서 아이들에게 미안한 마음이에요. ‘엄마가 돈 벌어서 장난감 사줄게’라는 수법으로 마음을 달래요.(웃음) 스케줄이 없을 때는 오롯이 아이들에게 집중하려고 해요. 제가 부모님께 받았던 것처럼 충분한 사랑과 안정감을 아이들에게 안겨주고 싶어요.”
전업주부에서 일하는 엄마로 변신한 양지은. 이제 처음 사회생활을 시작한 그녀는 일과 육아의 균형을 어떻게 지키고 있을까? ‘워킹맘’이 된 소감을 묻자 양지은은 엄지손가락을 세워 보였다.
“세상의 모든 워킹맘을 존경합니다.(웃음) 일하면서 아이를 돌보는 일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몸소 깨달았어요. 남편이 육아를 많이 도와줘도 엄마의 손길이 필요한 부분이 있잖아요. 또 아무리 피곤해도 눈에 보이는 집안일을 못 본 채 넘어갈 수 없겠더라고요.”
이어 양지은은 전업주부였을 때 겪었던 고충을 털어놓았다. 사회 경험이 없는 애 엄마, 집안일만 하는 여자 등 사회가 규정한 전업주부의 부정적인 타이틀로 인해 위축된 적도 있단다.
“솔직히 말하면 전업주부로 지낼 때 문득 우울해지는 순간이 있었어요. 아이들을 돌보기만 했는데 시간이 훌쩍 흐르더라고요. 또 입고 싶은 옷이나 경험해보고 싶은 것이 생겨도 ‘아이를 키우는데 해도 되나?’라며 스스로를 막아 세우게 됐어요. 애초에 시도조차 하지 않는 거죠. 무엇보다 꿈을 이루기엔 너무 늦었다는 생각에 마음이 아팠어요. 그 시기를 버틸 수 있었던 건 아이들이 어느 정도 성장했을 때 나만의 일을 꼭 할 거라는 희망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힘이 되는 아이들 덕분이에요. 지금 전업주부인 분들도 마음 한편에 꿈을 꼭 품으셨으면 좋겠어요. 저를 보면서 ‘나도 할 수 있다’는 마음을 가지시길 바라요. 자신이 사랑하는 일을 하면서 사는 게 정말 가치 있는 일이거든요. 우리는 엄마니까 해낼 수 있어요.”
사회의 일원으로 존재하면서 비로소 행복을 찾았다는 양지은. 그녀에게 노래를 제외하고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게 무엇인지 물었다. 한참을 고민하던 양지은이 어렵게 말문을 뗐다. 그녀가 걸어온 삶의 여정이 담긴 대답이었다.
“건강이요. 오랜만에 만난 사람에게 안부를 물을 때 건강에 대해 묻잖아요. 그만큼 우리 삶에서 중요한 거라고 생각해요. 경연에서 탈락 위기에 처했을 때도 ‘나는 건강하니 앞으로 또 기회가 올 거다’라는 마음으로 버텼어요. 일상에서 행복을 느끼는 순간도 별거 없어요. 맑은 하늘을 바라보며 편안함을 느낄 때, 지인들이 모두 건강하게 큰 탈 없이 일상을 즐기고 있을 때가 가장 행복해요.”
가수로 활동하면서 많은 부분이 달라졌지만, 그중에서도 자신을 응원해주는 많은 팬이 생겼다는 사실이 가장 얼떨떨하다는 양지은. 그녀는 일면식도 없는 사람이 건네는 무해한 사랑을 경험하면서 이에 보답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가고 있다.
“누군가의 팬이 되어본 적은 있지만, 누군가가 나를 사랑해준다는 건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어요. 저에게 직접 보내주신 편지나 응원의 댓글을 몇 번씩 읽어봐요. 그중에서 ‘아버지께 왼쪽 신장을 기증한 효녀 양지은, 신장의 빈자리는 국민의 응원으로 채워질 겁니다. 파이팅 하세요’라는 글이 기억에 남아요. 말씀하신 대로 빈자리가 따뜻한 기운으로 채워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고요. 행복하다는 말로 다 형용할 수 없을 만큼 감사하고 벅찬 나날을 보내고 있어요.”
트로트 가수로서 첫발을 뗀 양지은은 노래 이야기를 할 때마다 어린아이 같은 순수함과 발랄한 모습이 돋보였다. 국악인으로 살면서 몰랐던 트로트의 매력에 흠뻑 빠졌다는 그녀다. 한 치 앞을 내다보지 못했던 인생이기에 앞으로의 활동도 어떤 선을 긋지 않고 주어진 상황에 맞춰 도전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20여 년간 국악만 하던 제가 트로트에 도전한 것을 의아하게 생각하는 분들도 있을 거예요. 또 실력을 의심하는 분들도 있을 거고요. 그럼에도 제가 행복하게 활동을 이어가면 각종 우려를 없앨 수 있다고 믿어요. 앞으로 제가 어떤 음악을 하든 제약 없이 즐기는 모습을 보여드리면서 잘해낸다는 일종의 ‘증명’을 하고 싶은 마음이에요.”
끝으로 양지은은 가수로서, 사람으로서 살아가는 데 있어 최종 목표를 전했다. 대화를 이어가면서 보였던 인생에 대한 진중한 태도와 아이 같은 양가적인 모습을 관통하는 말이다.
“인간 양지은은 지금처럼 소소한 행복을 놓치지 않고 누리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지금은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지만, 어떤 시련이나 아픔을 겪게 될지 아무도 모르죠. 시련이 찾아와도 일상에서 일어나는 행복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런 마음을 잃지 않기 위해 스스로 노력할 거고요. 가수로서 양지은은 끊임없이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드리는 게 최종 꿈이에요. 제가 진의 자리에 오를 수 있도록 투표해주신 분들이 ‘양지은 참 잘 뽑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색다른 모습, 점점 더 잘하는 모습을 보여드리는 것이요.”
양지은은 자신이 차지한 왕관의 무게를 잊지 않는 사람이다. 오늘의 기쁨에 빠져들기보다 자신을 믿어준 많은 이들에게 갚아야 할 내일을 떠올린다. 그렇기에 앞으로 그녀가 들려줄 노래에 기대감이 모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