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구혜선을 수식하는 말들이 있다. 배우, 영화감독, 작가, 화가, 작곡가, 5대 얼짱, 4차원. 하나의 단어로 그녀를 설명할 수 없지만 이것만은 분명하다. 구혜선은 자기만의 세계가 확고한 사람이다. 그리고 그 확고함을 표현할 줄 아는 사람이다.
구혜선과 기자의 첫 만남은 201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은 그녀는 배우 안재현과의 결혼 생활과 이혼에 대해 차분하게 말했다. 그녀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제 인생에서 제일 상태가 안 좋았던 때예요. 결혼은 생각보다 복잡한 제도예요. 사람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이상한 감정에 허덕거리게 만들거든요. 되돌아보면 제가 그렇게 화를 낼 수 있었다는 사실이 놀라워요. 인생에 총량의 법칙이 있다고 하잖아요. 제가 살면서 낼 수 있는 화의 총량을 다 채운 것 같아요. 그래서 지금은 원래의 저로 돌아왔고요."
다사다난했던 결혼 생활을 정리한 구혜선은 그림을 그리고 작곡을 했고, 미뤄뒀던 학업을 마치기 위해 성균관대학교 영상학 전공으로 복학했다. 그리고 영화감독으로서도 복귀한다. 노란 꽃집에서 일하는 여자에게 관심을 보이는 낯선 남자가 그녀의 비밀스러운 공간에 들어가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 영화 <다크옐로우>의 크랭크인을 앞둔 것.
2년 전 그녀와 이야기를 나눴던 그 자리에서 구혜선을 다시 마주했다. 분위기는 사뭇 달랐다. 여름방학이 시작됐다며 미소를 짓는 그녀에게 대학 생활의 여운이 남아 있었다.
"오랜만에 학교에 가니까 좋아요. 졸업을 목표로 한곳을 향해 갈 때 나오는 소집단의 에너지가 제게 기운을 줬어요. 제가 한창 대학에 다닐 땐 의견을 주장하는 게 쉽지 않았어요. 내 의견에 타인의 기분이 상할까 봐 걱정하는 분위기가 있었거든요. 그런데 요즘 친구들은 편하게 서로 의견을 주고받더라고요. 함께 노력해 좋은 결과가 나오면 만족이라고 생각하는데, 그 친구들과 함께하는 과정들이 재미있었어요."
구혜선은 웃으며 공부가 제일 쉬웠다는 말을 덧붙였다. 공부를 잘하고 말고의 이야기가 아니라 내가 노력하면 좋은 결과가 나오기에 합리적이라는 것. 이른 나이에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노력이 꼭 좋은 결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배웠기 때문에 그 과정이 더 좋다.
"학교에서 만난 친구들은 목표가 같으니까 행동이 순수해요. 그런데 사회에서 만난 사람들은 모두 목표가 다르잖아요. 누군가는 집을, 누군가는 차를, 누군가는 명품을 목표로 하는 것처럼요. 목표가 다르니까 행동하는 방식이 다르고 그 안에서 잡음이 생길 수 있어요. 돌아보면 일을 하면서 맺은 인간관계가 저를 힘들게 했어요. 일보다 사람을 상대하는 게 부담스러워서 항상 긴장한 상태였던 것 같아요."
구혜선은 인간관계를 콩나물 키우기에 비유했다. 시루에 거즈를 깐 후 콩을 담아 하루에 세 번씩 물을 붓는 것이 방법인데 콩이 물에 잠기지 않는 것이 포인트다. 키우면 키울수록 콩나물이 수분 보충을 제대로 하고 있는지 의문을 갖게 된다.
"어렸을 땐 나의 행동이 인간관계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몰라서 힘들었어요. 그런데 나이를 먹으면서 여유와 노하우가 생기니까 내가 관여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해결되는 것들이 있다는 걸 알겠더라고요. 과거엔 내가 도움을 줄 수 있는 것과 줄 수 없는 것을 구분 짓지 않고 오지랖을 부렸다면 이젠 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선 정확하게 안 된다고 말할 수 있게 됐죠."
그녀는 겸허해졌다는 말을 덧붙였다. 인생을 살면서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른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한 번 불행한 일을 겪었다고 또 겪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는 생각을 하면서 모든 인간관계에서 행동을 조심하려고 더욱 노력한단다.
"모든 사람을 부정적으로 바라보진 않아요. 제가 잠시 나쁜 일을 겪었던 것뿐이니까요. 이젠 나쁜 일이 또 생길 수 있고 그 또한 지나갈 것이란 걸 알게 됐어요. 만약 또 어떤 일이 생긴다면 과거와 다르게 대처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해요."
나를 둘러싼 오해와 편견
오랫동안 구혜선을 설명하는 단어로 통하던 것들이 있다. 4차원, 허세, 허언증이 그것이다. 기자 역시 그녀를 두고 ‘독특하다’ 혹은 ‘특이하다’라고 말하는 관계자들의 이야기를 들은 바 있다.
"특이하다는 말엔 '그런데 조금 이상해요'라는 의미가 담겨 있어요. 사람들이 오랫동안 저를 4차원이라고 하는데 저는 제가 특이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저도 한때 사람들이 저보고 특이하다고 하니까 '내가 특이한가?'라는 의문을 품은 적이 있어요. 그런데 제가 한 말과 행동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렇지 않더라고요."
'구혜선은 4차원'이라는 말이 기정사실화된 데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그녀가 예고 입학시험에서 유화를 그려 불합격했다는 이야기다. 과거 한 인터뷰에서 "서울에 예고 시험을 치러 갔는데 불합격했다. 학교가 사립이라 집안의 경제적인 면을 보고 집이 멀어서 떨어진 것 같다"고 말한 바 있다. 이후 온라인에서는 유화로 입시를 치르는 학교는 없다는 말이 나오면서 그녀에게 허언증이라는 수식어가 생겼다.
"유화로 시험을 볼 수 없다는데 볼 수 있어요. 자유화가 주제면 유화로 그림을 그려도 되는 거니까요. 당시 유화를 그렸던 것은 나름의 전략이었어요. 아무도 유화를 그리지 않을 테니 눈에 띌 것 같았거든요. 또 유화가 마르는 데 일주일이 걸려요. 그럼 작품 중 맨 위에 올려놓을 거니까 자연스럽게 심사위원들이 내 그림을 오래 볼 것이라는 생각도 있었고요. 결론적으로는 잘못된 전략이었죠. 집이 멀어서 불합격했다는 것은 스스로를 위로하는 농담이었어요."
그녀는 허세라는 수식어에 대한 해명도 덧붙였다. 한 인터뷰에서 "어릴 때 스케이트를 타다 크게 다친 적이 있어서 지금은 스케이트를 못 탄다. 그래서 김연아 선수를 통해 대리 만족하고 있다. 김연아 선수가 메달을 땄을 때, (기뻐서) 울면서 혼자 와인으로 축배를 들었다"고 말한 바 있다. 당시 온라인에서는 "구혜선은 김연아의 경기를 보고 와인으로 축배를 든다"며 그녀를 조롱하는 분위기가 형성됐다.
"김연아 선수가 금메달을 땄을 때 행복하고 신이 나서 와인을 마셨어요. 그런데 저는 이게 왜 허세라는 말을 듣고 웃음을 사는 일인지 모르겠어요. 잊을 만하면 다시 수면 위로 올라오는 이야기인데, 몇 년 후에 한 분이 '그런데 저 말의 문제가 뭐예요?'라고 물은 적이 있어요. 그러자 사람들이 '생각해보니까 나도 맥주를 마셨네'라면서 제 말이 허세가 아니라고 했어요. 한 사람을 평가하는 데 집단의 분위기가 중요한 것 같아요. 어떤 행동이나 말에 한 사람이 '이상하네?'라고 의문을 품기 시작하면 주변 사람들이 동조하고, 그 이미지가 고착화되는 거죠. 어떤 분은 제가 네 마리의 반려동물을 키운다는 말을 듣고 '특이하네'라고 하시더라고요. 반려동물을 키우는 인구가 1,000만 명이 넘는 시대에 동물을 키우는 게 특이한 건가요?(웃음)"
그림 그리고 글을 쓰는 사람
구혜선은 최근 '아트테이너'를 둘러싼 논란의 중심에 서기도 했다. 사건의 발단은 이렇다. '홍대 이작가'로 활동 중인 이규원 작가가 지난 5월 팟캐스트 <정영진 최욱의 매불쇼>에서 "구혜선은 미술 작가도 하고 영화감독도 하고 글 쓰는 작가도 하지만 적어도 미술 하나만 봤을 땐 제대로 하는 것이 없다. 개인적인 바람으로 미술은 즐기고, 연기자나 했으면 좋겠다"고 발언한 것. 이에 구혜선은 "예술은 판단 기준을 갖고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느끼는 것이기에 객관적일 수 없다"고 반박했다.
"저는 '위기를 기회로'라는 말을 믿어요. 인간은 탄성적이라 부정하는 사람이 있으면 긍정하는 사람도 생겨요. 부정 이슈가 생겼을 때 오히려 제 그림을 구입하고 싶다는 기업이 생기더라고요. 저는 삶이 공평하다고 생각해요. 찬사를 받는 순간에 비판이 나올 수 있고, 비판을 받는 상황에 찬사를 보내는 사람도 있을 테니까요. 100% 좋은 삶 혹은 나쁜 삶은 없어요. 삶의 흐름을 지켜보면 흥망성쇠가 균형을 이루더라고요."
그녀는 타인과 자신을 비교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살다 보면 타인과의 비교를 통해 만족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충만한 만족이 아니라는 의미다.
"타인의 실패에서 동력을 얻는 사람이 있어요. 그런데 인간은 누구나 실패해요. 누군가의 실패를 보고 웃는 순간 또 다른 누군가가 내 실패를 보고 웃는다는 것을 알아야 해요. 내가 실패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으니까요."
그렇다면 구혜선이 예술가로서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무엇일까? 그녀는 '죽음'이라는 답을 내놨다. 인간의 삶은 유한하기 때문에 우리 모두는 공평하다는 것. 결국 예술을 통해 공평한 삶에 대해 말하고 싶다는 의미였다.
"존경을 받거나 돈이 많은 사람일지라도 결국엔 죽게 돼요. 인간의 삶이 유한해서 공평한 것이고요. 그러니까 우리는 하나의 일로 불행하지 않아도 돼요. 각자의 위치에서 각자의 기준을 갖고 삶을 만들어가면 돼요. 저는 죽음이라는 목적지를 향해 가는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게 예술이라고 생각해요."
어떤 질문을 해도 본인의 생각을 명확하게 밝히는 구혜선에게, 대중에게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냐고 물었다. 역시나 짧고 명확하게 답변을 했다.
"단단한 사람이요. 저는 사람들이 누군가를 험담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해서 어떤 사람이 제게 누군가의 험담을 하면 '듣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편이에요. 그래서 버르장머리가 없다는 말을 듣기도 했어요. 하지만 그래도 잘못된 건 잘못됐다고, 불합리한 건 불합리하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으로 살고 싶어요."
구혜선은 과거엔 호불호가 정확한 사람이었지만 나이가 들면서 조금은 유연해졌다고 말했다. 자신이 생각하는 정의가 모두에게 정의가 아닐 수 있다는 생각을 한 후부터다. 그때부터 모두가 좋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는 방법에 대한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누군가 상처를 받을 수 있는 결정은 안 하려고 해요. 예를 들어 조직에서 어떤 한 사람만 제외되면 모든 일이 잘 진행되는 경우가 있잖아요. 예전 같으면 당사자를 제외했겠지만 이젠 그 일을 포기해요. 남의 눈에 눈물 나게 하고 행복할 수 없거든요. 이 원칙을 지키니까 손해를 봐도 마음이 편해요. 처음엔 손해에 대한 아쉬움이 컸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올바른 결정을 했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 후 원칙주의자가 되고 있어요. 하지 말아야 할 것은 어떤 경우에도 하지 말아야 하는 거죠. 꼰대처럼 보일 수 있겠지만 좋은 꼰대는 괜찮다고 생각해요."
구혜선은 죽기 전 하루의 시간이 있다면 아무도 없는 곳으로 도망가고 싶다고 했다. 죽음이 두려워서가 아니다. 남겨진 사람들이 슬퍼할 것이 걱정돼 자신의 죽음을 알리고 싶지 않다는 것. '독특하다'고 평가되는 그녀의 생각엔 남다른 이유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