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리우드에 휴 그랜트, 조지 클루니, 리처드 기어가 있다면 한국엔 엄영수(개명 전 엄용수)가 있다. 두 번의 이혼을 웃음으로 승화시킨 '재혼의 아이콘' 엄영수가 세 번째 결혼을 했다. 지난 2월 미국 LA의 한 교회에서 10살 연하의 재미 교포 의류 사업가 이경옥 씨(59)와 스몰 웨딩으로 부부의 연을 맺은 것. 엄영수는 세 번째 결혼으로 파란만장했던 인생 전반기를 마치고 행복한 인생 후반전을 시작했다.
"꿈인지 생시인지 모르지만 내 나이 69에 두 번 실패하고 세 번 만에 진한 사랑을 만났어요. 난 행운아예요. 나같이 단점이 많은 사람이 아내 같은 사람을 만났으니까요. 70억 인구 중에서 그분과 가장 가까운 사람이 된다는 건 로또에 당첨되는 것보다 어려운 일이에요."
두 사람 인연의 시작은 201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엄영수는 여름이 시작되는 이맘때쯤 아내 이경옥 씨의 전화를 받았다고 회상했다. 한 코미디 프로그램을 통해 엄영수를 알게 된 이경옥 씨는 방송국에 전화를 걸어 "미국에서 의류 사업을 하고 있는데, 패션쇼 사회자로 엄영수를 섭외하려 한다"면서 엄영수의 전화번호를 알아냈다고.
"어느 날 모르는 번호로 전화 한 통이 왔어요. 저의 팬이라면서 용기를 내서 전화를 걸었다고 했죠. 남편과 사별한 지 3년이 됐고 상처가 깊어서 삶의 의욕이 없었는데, 저의 코미디를 보고 즐겁고 힐링이 됐다면서 한번 만나고 싶다고 했어요. 그렇게 우리의 인연이 시작됐죠."
이경옥 씨는 '황혼 이혼'을 주제로 한 엄영수의 코미디 무대를 봤다. 내용은 이렇다. 엄영수가 중년 여성들에게 "우리나라 6070대 남녀 대부분이 한 것이 있어요. 이혼, 졸혼, 별거예요. 그런데 힘들게 이혼하지 마세요. 여성이 남성보다 10년가량 수명이 길어요. 조금만 기다리면 좋은 소식이 옵니다. 집에 가면 좋은 소식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몰라요"라며 농담을 건넸다. 이 씨는 이 무대를 보고 오랜만에 크게 웃었단다.
"사실 아내가 오랫동안 우울했는데 제 무대를 보고 난 후에 운전하다가도 웃음이 나고, 설거지하다가도 웃고 그랬대요. 그래서 엄영수를 만나야겠다고 생각했대요."
두 사람이 처음 통화를 하고 3개월 후인 2019년 10월 엄영수는 공연차 뉴욕에 방문했다가 LA에서 이경옥 씨와 만났다. 20대 중반 한국을 떠나 40년 가까이 미국에서 살아온 이경옥 씨와 엄영수는 생활 패턴, 대화 방식 모두가 달랐지만 서로에게 호감을 느꼈다. 그 후 코로나19 팬데믹이 시작돼 해외를 오가는 게 쉽지 않았지만 엄영수는 "보고 싶다"는 이 씨의 말 한마디에 LA행 비행기에 올랐고 두 번째 만남을 가졌다.
"한 번 LA를 다녀오니까 얼마나 먼 곳인지 알겠더라고요. 사실 호감을 막 가졌을 땐 오래 만날 수 없겠다는 생각을 했죠. 카카오톡으로 메시지를 주고받고 전화 통화를 하면서 지내는데 어느 날 제가 보고 싶다는 거예요. 곧바로 LA에 갈 준비를 했어요. 그런데 사실 공항에 가서도 먼 거리가 아득해서 '집으로 돌아가야 하나?'라는 생각을 했어요. 아, 한 일본쯤 갔을 때도 집에 가고 싶더라고요.(웃음)"
엄영수는 걱정과 설렘을 안고 13시간을 날아 도착한 LA에서 한 달을 보냈다. 그리고 한국에 돌아올 때, 그의 옆자리엔 이 씨가 함께 있었다. 헤어짐이 아쉬워 동행한 것. 2주간의 자가 격리를 끝낸 두 사람은 다시 한국에서 데이트를 했고 그때부터 결혼 이야기가 오갔다.
"아내와 처음 만나 대화를 나누고 좋은 사람이라는 생각을 했어요. 품위가 있고, 영어·일본어·스페인어까지 잘하는 모습이 멋지다고 생각했죠. 이후 두 번째 만났을 때 아내가 제게 '모든 여성의 로망은 프러포즈를 받는 것이다. 오늘 프러포즈를 하면 받아들이겠다'고 했어요. 그렇게 결혼을 약속했어요."
엄영수는 아내 이경옥 씨를 멋있는 사람이라고 칭했다. 인터넷도 없던 시절에 미국으로 건너가 살았기 때문에 가족, 친구, 사업 등 모든 것이 미국에 있는데 오롯이 엄영수만 보고 한국으로 건너왔기 때문이다.
"아내는 제가 착하고 부지런해서 좋다고 해요. 그러면서 제게 '나는 차도 있고, 반지도 있고, 다 있다. 엄영수만 있으면 된다'고 했죠. 앞으로 저와 함께 살면서 저를 뒷바라지하고 저를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겠다고 했어요. 사랑이 아니면 할 수 있을까요? 아내의 마음에 깊이 감동했어요."
18개월 동안 진한 사랑을 한 두 사람은 미국에서 결혼식을 올렸고, 이 씨는 한국으로 왔다. 그녀는 1997년부터 24년간 홀로 살아온 엄영수를 살뜰하게 챙기고 있다. 엄영수는 그녀의 보살핌이 고맙다.
"어느 날 아내가 제가 잠잘 때 숨소리, 맥박 뛰는 것, 잠꼬대하는 것을 관찰하더니 병원에 데려갔어요. 그래서 부정맥과 수면무호흡증이 있는 것을 알게 됐죠. 그리고 아내가 수시로 카카오톡으로 코미디 콘텐츠를 보내줘요. 제가 코미디를 할 때 도움이 되라는 의미죠. 아내가 코미디를 볼 줄 알고, 예우할 줄 아는 여자거든요. 이제 남은 인생 동안 즐겁게 살기만 하면 돼요."
모든 결혼은 존중받을 가치가 있어요. 누구에게도 타인의 사랑과 결혼을 판단할 자격이 없어요.
“결혼 실패가 인생의 실패는 아냐”
엄영수는 지난해 MBC 예능 <라디오스타>에서 "한 번 헤어지면 15년 동안 방송에서 쓸 얘기가 나온다"며 '이혼 토크'로 입담을 자랑했다. 이를 두고 일각에서는 그가 사랑, 결혼, 이혼을 가볍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냐는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철학은 분명했다.
"사랑은 인생에서 가장 숭고한 일이에요. 그런데 우리가 살아 있는 시간이 굉장히 짧아요. 그러니까 만약 이별의 순간이 오면 빨리 다시 사랑을 해야 해요. 좋은 것을 가능한 한 많이 해야죠."
이어 그는 아무리 영원을 노래해도 우리에게 영원한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불교의 '무상'의 진리에 대해 말했다. 모든 것이 무상하기 때문에 사랑 또한 마찬가지라는 것. 사랑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순간에 집중해 열심히 사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우리 모두 사랑할 때 영원을 약속하지만 사실 영원한 것은 없어요. 지금 사랑을 하고 있어도 언제 잃어버릴지 몰라요. 그래서 더 아쉽고 아까운 것이니까 가능한 한 열심히 사랑하세요. 한 번에 여러 사람 혹은 일방적인 사랑을 하라는 게 아니에요. 하고 싶다고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내가 사랑할 수 있고, 상대가 사랑을 느낄 수 있을 때 열심히 해야 해요.”
또 '평생의 배우자'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세상이 시시각각 변하듯이 사람도 마찬가지라는 것. 누구나 실수할 수 있기 때문에 만약 결혼이 실수라고 판단하면 정정해도 된단다.
"사람은 언제든지 변할 수 있어요. 만약 누군가가 '천사 같고 아름다워서 네게 반했어'라고 말했다고 생각해봅시다. 그럼 더 천사 같고 아름다운 사람이 나타나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 사람을 좋아해야죠. 좋아하지 않으면 위선이에요. 이렇듯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어요. 결혼해서 살다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어요. 한 면만 보고 결혼을 결정할 수 없듯이 이혼도 마찬가지지만 만약 내가 잘못 판단했다는 생각이 들면 주저하지 않았으면 해요. 상황을 받아들이고 다시 출발하면 돼요. 이제 100세 시대인데, 그 긴 시간을 어떻게 참고 살 수 있겠어요?"
그는 결혼의 실패가 인생의 실패는 아니라고 말했다. 결혼은 골인 지점이 아니기 때문에 결혼으로 한 사람의 인생이 결정지어지지 않는다는 것. 결혼은 출발이라서 모두의 축복을 받는 것이니, 이혼했다면 즉각 다시 결혼하라는 엄영수만 할 수 있는 조언을 하기도 했다.
"우리나라는 결혼에 대해서만큼은 실패에 관대하지 않아요. 취업에 실패하거나 입시에 실패하면 '그럴 수 있다'고 하면서 결혼에 실패하면 이상한 시선으로 바라보죠. 물론 결혼을 한 번만 하면 좋겠지만 두 번, 세 번 할 수 있어요. 법으로 결혼을 또 하지 말라고 막지 않잖아요."
결혼을 망설이는 이들에게 용기를 내라고 덧붙였다. 지금 내 옆에 있는 좋은 사람이 10년 뒤에도 옆에 있으리란 보장이 없기에 기회가 있을 때 잡아야 한다는 것.
"결혼에 실패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니까 실패하는 거예요. 결혼 혹은 이혼으로 인생이 바뀌지 않아요. 어느 날 한 여성 팬이 꽃을 들고 저를 찾아온 적이 있어요. 이혼한 게 창피해서 움츠리고 살았는데 제 얘기를 듣고 재혼에 성공했다는 거예요. 결혼, 이혼, 재혼. 어려워 보이지만 별거 없어요. 내가 두 번을 실패했지만 세 번째 결혼을 해서 잘살면 그만이에요. 이전에 실패가 있기 때문에 지금이 좋다는 것을 아는 것이고요."
엄영수는 인생은 전화위복이라고 말했다.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았지만 모든 경험이 도움이 됐다는 것. 그는 그래서 인생이 재미있다고 말했다.
"인생에 일어난 일 중 어느 하나 버릴 것이 없어요. 제가 자녀가 많아요. 첫 번째 결혼으로 낳은 아들, 입양한 아들과 딸, 그리고 세 번째 결혼으로 두 아들과 하나의 딸이 생겼죠. 관계가 복잡하지만 제가 아이들에게 더 사랑을 준다면 그것만으로 성공이에요. 그래서 모든 결혼이 존중받을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요. 누구에게도 다른 사람의 사랑과 결혼을 판단할 자격이 없어요. 그 사랑에 대해서는 당사자들만 아는 것이니까요."
엄영수는 사회를 풍자하는 게 코미디언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때문에 이혼한 당사자의 상처는 안중에도 없이 '실패자'로 낙인찍는 사회 분위기에 맞서 "내일 헤어질 것이니 취재하러 오라"며 셀프로 기자에게 이혼 사실을 공개하기도 했다. 또 방송에서 이혼과 결혼에 대해 숨김없이 말하는 이유도 이와 일맥상통한다.
"결혼과 이혼을 다 보여줘야 진짜 코미디죠.(웃음) 인생의 모든 일은 투자예요. 제가 젊었을 때 스타 코미디언이 아니라 바람잡이 역할을 많이 했어요. 그런데 제가 도왔던 그 코미디언들은 지금 방송 활동을 하지 않고 저만 활동하고 있어요. 인생이 이런 거예요. 제가 언제 스타가 될지 몰라요. 사실 스타가 되지 않아도 괜찮아요. 저는 그저 제가 가고 싶은 길을 꾸준히 가면 돼요. 그것만으로 성공한 인생이라고 생각해요."
그에게 결혼 생활을 잘할 수 있는 팁을 물었다. 그는 단번에 '대화'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자칫 식상할 수 있는 대답이지만 그것이 정답이라고 말했다.
"내가 앞선 결혼에 실패한 건 대화의 부재 때문이었어요. 서로 말을 하지 않았다는 의미가 아니라 대화가 이어지지 않았던 게 문제였다고 생각해요. 공통 관심사가 없어서 이야기를 이어갈 주제가 없었죠. 그래서 이번엔 골프를 배웠어요. 아내와 미국의 자식들이 함께 골프 치는 것을 좋아하거든요."
엄영수의 아내 이경옥 씨는 연애 당시 그에게 골프를 배우라고 부탁했다. 아내의 부탁에 그는 밤을 새워 골프를 배웠고, 이후 미국에서 만났을 때 이 씨와 그녀의 자녀들과 함께 골프 라운딩에 나섰다. 함께 골프를 치며 승부를 가리고, 식사를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대화가 생겼다고.
"여태까지 주변에서 골프를 배우라고 해도 관심을 두지 않았어요. 그런데 아내와 아이들과 함께 골프를 치고 나니 왜 취미를 공유하라는지 알겠더라고요. 같은 목적을 갖고 총력을 기울이니까 동지애가 생기고 대화가 시작되더라고요. 부부가 함께할 수 있는 일이 많을수록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또 그는 대화하는 방식에 대해서도 조언했다.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는 속담이 있듯이 같은 말이라도 상대를 배려하는 말 한마디를 해야 한다는 것. 존경하는 마음을 담은 용어를 사용해야 서로를 존경하는 마음을 기를 수 있다고 직언했다.
"부부 사이에 자존심이 어디 있나요? 가장 가까운 사람이니까 서로가 서로를 위해야죠. 저는 아내가 말을 예쁘게 해서 좋아요. '미안해' '잘못했어'라고 말하는 데 망설임이 없고, '당신이 이런 행동을 하면 내가 마음이 힘들어. 조금 노력해줄 수 없을까?'라면서 다정하게 말하죠. 솔직하게 감정을 표현하니까 저도 따라 하게 되더군요. 아내는 여러모로 제가 배울 게 많은 사람이에요. 저는 지금 아주 행복해요. 사람은 역시 짝이 있어야 한다는 걸 다시 깨달았어요."
엄영수는 긴 시간을 돌고 돌아 제짝을 만난 것 같다며 웃었다. 과거의 경험이 있기에 '찐사랑'을 찾았다는 그의 인생 3막이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