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나리>는 한국계 미국인 리 아이삭 정(정이삭) 감독의 자전적 이야기를 바탕으로, 1980년대 아메리칸드림을 꿈꾸며 이주한 한인 가족을 그린 영화다. 윤여정은 딸 ‘모니카’(한예리 분)와 사위 ‘제이콥’(스티븐 연 분)의 부탁으로 어린 손주를 돌보기 위해 미국으로 건너가는 할머니 ‘순자’ 역을 맡았다. 그녀는 딸의 부탁을 거절하는 법이 없는 한국 엄마의 특성과 한국식 정서, 영어를 하지 못해 빚어지는 어린 손주와의 미묘한 갈등을 실감 나게 표현해 호평을 받았다.
윤여정의 활약은 세계 유수의 영화제에서 감탄을 자아냈고, 가장 권위 있는 영화 시상식으로 알려진 아카데미 시상식의 여우조연상 수상에 대한 기대감을 모았다. 많은 이들의 예상처럼 윤여정은 <미나리>로 제93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한국 배우 최초로 여우조연상을 수상했다.
그녀의 신드롬은 수상에서 그치지 않았다. “고상한 척하는 영국 사람들이 인정해줘서 특히 더 고맙다”(영국 아카데미 시상식 여우조연상 수상 당시) 등 매 시상식에서 보여준 ‘윤여정표’ 수상 소감으로 연륜에서 풍기는 여유가 무엇인지 일깨워주었다.
특히 MZ세대가 윤여정에게 뜨거운 찬사를 보냈다. 내뱉는 말마다 어록이 되는 그녀에게 스며들었다는 ‘윤며들다(윤여정+스며들다)’라는 신조어가 붙었을 정도다. 독보적인 배우, 대체 불가하다는 말에 이어 ‘유쾌한 K–할머니’로 자리매김한 윤여정의 인생은 지금부터다.
최고라는 말을 싫어한다. 경쟁으로 1등을 거머쥐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동등한 세상에서 함께 행복하게 사는 게 가장 좋은 거 아닌가.
한국인 최초로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수상했다. 5명의 후보보다 약간의 운이 더 따랐다. 후보에 이름을 올린 모든 배우가 각기 다른 작품에서 다른 연기를 선보였기 때문에 누가 더 훌륭한 연기를 했는지 가려낼 수 없다. <미나리>를 같이 만든 식구들이 함께했으면 좋았을 텐데 코로나19로 참석하지 못해 아쉽다.
함께 아카데미 수상을 염원해온 국민에게 한마디 전해달라. 너무 많은 응원을 받아서 눈의 실핏줄이 다 터졌다.(웃음) 태극 마크를 달고 경기에 임하는 운동선수들이 가졌을 부담감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됐다. 개인적으로는 후보에 오른 것만으로도 큰 기쁨이었는데 수상을 기대하는 분이 많아 상을 못 받으면 어떡하나 싶었다. 기대에 부흥할 수 있어 다행이다.
세계가 영화 <미나리>에 주목한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맡은 역할을 충실히 연기했을 뿐이다.(웃음) 좋은 대본이 큰 역할을 했다. <미나리>는 감독의 진심이 담긴 순수한 이야기다. 대본을 처음 읽었을 때 기교 없이 담백한 내용이라고 생각했다. 전 세계 어느 나라나 부모가 자식을 위해 희생한다. 이를 한국식 서사로 풀어낸 영화이지만 국적, 나이, 성별을 떠나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지점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재치 있는 수상 소감으로도 화제를 모았다. 오래 살다 보니 내공이 쌓인 게 아닌가 싶다. 평소 친구들하고 수다 떠는 것을 좋아해서 입담이 저절로 생긴 거 같기도 하다.
수상 소감에서 영화 <화녀>의 김기영 감독, <미나리>의 정이삭 감독을 언급했다. 두 사람은 윤여정에게 어떤 존재인가? 영화는 종합예술이기 때문에 전체를 아우를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다. 그래서 어떤 감독이 메가폰을 잡느냐가 중요한데, 이 사실을 60살이 넘어서 깨달았다. 20대 초반의 어린 나이에 김기영 감독을 만났다. 사람들이 입을 모아 천재라고 불렀던 분인데 나는 영화를 찍는 동안 감독이 나를 힘들게 한다는 이유로 싫어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김기영 감독이 아니었으면 내가 영화라는 예술을 이해하는 데 어려움을 겪지 않았을까 싶다. 돌아가셔서 직접 전할 수는 없지만 기회가 주어진다면 감사함을 느낀다고 말하고 싶었다. 정이삭 감독은 나이가 들어서 만난 감독이다. 내 아들보다 나이가 어린데 정말 차분하다. 또 현장에서 그 누구도 업신여기거나 모욕을 주지 않는 세련된 사람이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연기 생활을 하면서 흉을 안 본 감독은 정이삭이 처음이다.(웃음)
세계 최고의 자리에 올랐다. 나는 최고라는 말을 싫어한다. 경쟁으로 1등을 거머쥐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어느 한 사람이 최고가 되기보다 다 같이 ‘최중’이 되면 좋겠다. 동등한 세상에서 함께 행복하게 사는 게 더 좋은 거 아닌가. 그리고 아카데미 시상식이 전부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감사하지만 나는 나고, 상은 상이다. 이번 수상으로 인해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이 크게 달라질 거라 믿지 않는다.
연기를 시작한 지 어느덧 55년이 흘렀다. 연기 철학이 궁금하다. 처음에는 열등감이 강했다. 무대 경험 없이 연기 활동을 시작했는데 남들에게 피해를 주면 안 된다는 생각에 대사를 열심히 외웠다. 연기와 현장에 웬만큼 적응됐을 때는 연기에 대한 절실함이 생겼다. 대본을 성경처럼 여겼다. 60살이 넘어서는 스스로와 약속한 게 있다. 내 마음에 맞는 사람과 함께 작업을 하겠다는 것이다. ‘내 마음대로 살겠다’는 일종의 사치를 부리기로 결심했다.
앞으로의 계획은? 살던 대로 살 거다.(웃음) 오스카상 탔다고 윤여정이 김여정이 되는 건 아니다. 다만 배우로서 나아갈 길에 대해선 생각해둔 게 있다. 나이가 들다 보니 대사를 외우는 게 점점 힘들어진다. 타인에게 민폐를 끼치고 싶지 않기에 피해를 주지 않는 날까지만 일하는 게 배우로서 가진 최종 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