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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구 안에 태구

스크린 속 강렬함 뒤에 한없이 수줍은 표정을 짓는 이 남자. 배우 엄태구에게 빠져들다.

On May 20,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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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내면에 여러 가지 모습이 있는 거 같아요. 평소에 꺼내지 않고 묵혀뒀던 모습을 현장에서 꺼낼 수 있다는 게 배우라는 직업의 묘미라고 생각해요.”

굵은 얼굴선, 압도되는 눈빛, 허스키한 목소리의 소유자 배우 엄태구. 충무로에서 강한 캐릭터를 가장 잘 소화하는 배우가 누구냐고 묻는다면, 깊은 고민 없이 그의 이름이 떠오른다. 영화 <밀정>의 비열한 일본 경찰 ‘하시모토’, <택시운전사>의 짧지만 강렬한 인상을 남긴 검문소 중사 등 엄태구가 지금까지 보여준 캐릭터만 봐도 그렇다.

영화 <낙원의 밤> 인터뷰를 통해 만난 엄태구는 영화 속 모습과 달랐다. 자신의 칭찬이 나오면 쑥스러운 듯 두 손을 맞잡아 감사 인사를 전하고, 입을 가리고 수줍은 미소를 지었다.

엄태구는 평소 커피의 쓴맛이 싫어 바닐라라테를 마시고, 술은 한 방울도 입에 대지 못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또 내성적인 그는 촬영 스케줄이 없는 날에는 주로 집에만 머무른다. 가장 좋아하는 가수는 청량한 목소리, 아름다운 가사로 마음을 맑게 만드는 ‘옥상달빛’이란다.

그래서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엄태구가 이번에 선택한 장르는 ‘누아르’다. 가장 잘할 것 같은 장르의 가장 잘 그려낼 것 같은 캐릭터를 만난 것이다. 엄태구 주연의 영화 <낙원의 밤>은 삶의 희망을 잃은 ‘박태구’(엄태구 분)와 ‘재연’(전여빈 분), 이들을 쫓는 ‘마이사’(차승원 분)의 이야기다.

극 중 조직의 타깃이 돼 제주도로 피신한 박태구로 분한 엄태구는 특유의 낮은 보이스, 강렬한 인상으로 ‘엄태구표 누아르’를 완성했다. 그가 아닌 다른 배우가 이 역을 맡았더라면? 상상조차 되지 않는다. 그만큼 대체불가하다는 의미다.

“영화가 개봉된 뒤에 시청자 반응을 찾아봤는데 제 캐릭터를 두고 ‘내성적인 갱스터’라고 표현한 분이 있더라고요.(웃음) 처음 들어보는 말이라 새롭고 기억에 오래 남을 거 같아요.”
 

엄태구표 누아르

엄태구에게 이번 영화는 특별하다. 이미 알만 한 사람은 다 아는 연기파 배우지만, 단독 주연은 이번이 처음이다. 게다가 영화 <신세계> <마녀> 등으로 누아르 장르의 새 지평을 연 박훈정 감독이 연출한 신작의 주연이다. 개봉 전부터 기대감과 동시에 부담감을 느낄 만한 대목이 많지만, 엄태구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다. 비중의 크기와 상관없이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에 집중하자는 그의 연기 철학이 바탕이 된다.

“부담감이오? 다른 작품을 할 때 느꼈던 것과 다르지 않았어요. 제 역할에 충실하자고 생각했어요. 주연이라는 타이틀이 있어도 함께한 전여빈 배우, 차승원 선배님, 박호산 선배님 등 각자 해야 할 역할이 정해져있으니까요.”

엄태구의 이번 연기 역시 섬세한 감정선이 돋보인다. 지금까지 봐왔던 정통 누아르 영화와 달리 극 중 태구의 감성적 요소가 극대화된다. 극의 전반적인 흐름을 이끈 엄태구의 힘이다.

“연기할 때 캐릭터가 처한 상황, 감정 등을 끝까지 가져가려고 해요. <낙원의 밤> 태구도 극 초반에 불의의 사고로 가족을 잃고 큰 상실감에 빠지는데, 그 감정을 끝까지 가져가야 하는 게 가장 중요했고, 가장 어려웠어요. 신마다 마음 한편에 상실감을 갖고 있다는 걸 잊어선 안 됐죠. 감정적으로 힘들어도 캐릭터가 진정성 있게 표현되는 게 가장 중요했어요.”

엄태구는 캐릭터의 완성도를 높이고자 외형을 만드는 데도 신경 썼다. 감독의 요청에 따라 10kg 가까이 증량했고, 거친 모습을 표현하기 위해 메이크업을 과감하게 포기했다.

“입술을 트게 하려고 립밤도 안 발랐어요. 좀 따갑더라고요.(웃음) 피부 화장도 거의 안 해 얼굴을 태우면서 촬영했어요.”

배우 전여빈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말수가 적은 엄태구가 지금까지 작품을 하면서 가장 말을 많이 나눈 배우가 바로 전여빈이란다. 앞서 전여빈은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엄태구가) 낯가림이 심하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생각보다 웃기고 장난이 많은 사람”이라고 말했다.

“감독님이 (전여빈과의) 식사 자리를 많이 만들어주셨어요. 제가 좋아하는 바닐라라테 같은 디저트도 사주셨죠.(웃음) 전여빈 배우와 함께하는 신이 많아 자리를 마련해주신 거 같아요. 그리고 워낙 전여빈 배우가 성격이 좋아요. 상대방을 편안하게 해주는 스타일이에요. 또 작품에서 함께하는 회차가 많아 자연스럽게 의지를 하게 되더라고요. 전여빈 배우의 연기를 보면서는 ‘연기 괴물’이라는 수식어가 왜 붙었는지 단번에 이해했어요. 굳이 표정으로 캐릭터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아도 보는 이들에게 감정을 전달할 줄 아는 배우라고 생각해요. 예를 들어 무표정으로 연기해도 그 안에 아픔이 있다는 게 느껴지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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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기하고 싶었던 적도 많아요. 연기적으로 재능이 있는 건지 헷갈리기도 했어요. 그런데 할 줄 아는 게 연기밖에 없어서 ‘더 열심히 하자’는 마음으로 버텨냈어요.

“제가 소녀 같다고요?”

연기하는 엄태구, 사람 엄태구의 상반된 성격은 ‘반전 매력’으로 통한다. 예능 <바퀴 달린 집>에서 보여준 안절부절못하는 모습, 하나의 질문에도 진땀을 빼는 모습은 인상적이었다. 엄태구는 예능에서 공개된 자신의 모습에 걱정이 앞섰지만, 시청자는 그에게서 인간미가 느껴진다는 반응을 보였다.

“예전에는 예능이 저와 안 맞는다고 생각했어요. 낯가림이 심하고 볼살이 떨릴 정도로 긴장을 많이 하거든요. 또 말수가 적은데 목소리까지 작아 출연하는 게 맞나 싶었어요. 지금은 기회가 생기면 또 한번 나가고 싶을 정도로 안정됐어요. <바퀴 달린 집> 영향이 커요. 같이 출연했던 선배님들과 배우들이 많이 챙겨주셨어요. 보시는 분들도 저를 좋게 생각해주셔서 자신감이 생겼죠. 여러모로 고마운 프로그램이에요.”

한때 한 포털 사이트에 ‘엄태구와 결혼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냐’는 질문 글이 올라와 화제가 된 바 있다. 또 그의 이름을 검색하면 관련 검색어에 따라붙는 키워드는 ‘이상형’이다.

“결혼하고 싶어요. 가정이 있으면 참 좋겠단 생각이 막연하게 들어요. 제가 워낙 말수가 적어 밝은 분을 만나고 싶어요.”

소년미가 돋보이는 그의 성격을 반영한 ‘로맨스물’을 기다리는 팬들도 적잖다. 엄태구표 멜로는 어떤 모습일지 궁금하다는 것. 엄태구는 독립영화 <시시콜콜한 이야기>, 영화 <안시성>을 통해 감칠맛 나는 러브라인을 선보였다.

“로맨스가 중심이 되는 영화는 아직 만나지 못했어요. 안 해본 것을 해보고 싶은 마음이 있죠. 기회가 주어진다면 정통 멜로에 꼭 출연해보고 싶어요.(웃음)”

엄태구와 함께 작품을 했던 배우들은 그를 향해 “소녀 같다”고 말한다. 어떤 일이든 섬세하고, 철저하게 접근하기 때문이다. 그의 연기 실력에 이견이 없는데도 섬세함이 큰 역할을 했다.

“소녀요? 제가 소녀 같은 건 잘 모르겠는데….(웃음) 섬세하다기보다는 긴장을 많이 해서 뭐든지 준비를 철저하게 하는 편이에요. 특히 연기는 직업이니까 더 신경 쓰죠. 연기에 답이 정해져 있는 게 아니고 현장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부분이 많아 준비한 대로 안 나올 때가 있는데, 그럼에도 준비는 늘 해요. 최선을 다해 준비해둬야 일단 마음이 편하더라고요.”
 

“지금까지의 연기 활동, 기적 같은 일”

“물에 빠진 아이를 구해줘도 나쁜 의도가 있을 거 같다”는 영화감독 변영주의 말처럼 지금까지 그가 풀어낸 악역은 강렬했다. 그러나 이 안에도 숨은 반전이 있다. 엄태구는 사실 독실한 크리스천이다. 평소 새벽 기도를 나가는 것은 물론 발음 연습도 성경책으로 해올 만큼 굳건한 믿음을 갖고 있다.

“그동안 악한 캐릭터를 연기했다고 하나님이 저를 정말 나쁜 사람으로 생각하진 않을 거 같은데….(웃음) 오히려 제 직업이니까 더 잘해내기를 바라시지 않을까 싶어요. 맡은 배역을 잘 그려내는 게 소임이니까요.”

엄태구에게도 포기하고 싶은 순간이 있었다. 지금까지 연기 활동을 이어올 수 있던 것을 ‘기적’이라고 말하는 그다. 지금도 그 생각은 여전하다. 그래서 철저하고 섬세하게, 그리고 치밀하게 캐릭터를 쫓아간다.

“언제든 물으면 기적이라고 답할 거예요. 이 일을 포기하고 싶었던 적이 무수히 많아요. 항상 긴장을 많이 하고 누군가와 잘 어울리지 못한다는 게 이유였어요. 연기적으로 재능이 있는 건지 스스로 헷갈리기도 했고요. 이런 순간들을 애써서 극복한 건 아닌데, 할 줄 아는 게 연기밖에 없어요. 연기에만 몰두하면서 지내서 취미, 특기라고 할 게 없거든요.(웃음) 그래서 ‘정말 잘해보자’ ‘더 열심히 하자’는 마음으로 버텨냈어요.”

엄태구의 연기 철학은 ‘진정성’이다. 살아 있는 연기를 하는 데 대한 갈망이 있다. 캐릭터와 그것을 연기하는 본인이 하나가 될 때 배우로서 보람을 느낀단다. 많은 이들이 엄태구의 연기에 열광하는 지점과 닿아 있다.

“연기 철학이라고 하면 너무 큰 의미 같은데(웃음) 항상 진실하게 연기하고 싶은 마음이에요. 그래서 진정성을 놓치지 말자는 데에 가장 큰 주안점을 둬요. 연기해야 할 인물과 제가 찰싹 달라붙는 느낌이 들 때가 있어요. 순간 연기를 하고 있는 게 아니라 그 캐릭터가 돼버린 거죠. 가만히 서 있는 장면이라도 진짜인 것처럼 느끼는 순간을 마주할 때 가장 뿌듯해요.”

데뷔 15년 차, ‘연기 천재’라는 별명을 얻었지만, 자신의 연기에 있어 만족감보다 아쉬움이 더 큰 그다.

“10년 넘게 연기를 해왔지만 연기가 잘돼 기분이 좋을 때보다 아쉬울 때가 훨씬 많아요. 최대한 만족도가 높은 연기를 끌어내기 위해 외부의 요소를 끌어오기도 하고, 내면을 들여다보는 데 집중하기도 해요.”

엄태구에게 가장 행복한 순간은 언제인지 물었다. 그의 대답에서 연기밖에 모르는 배우이자 사람이라는 게 느껴졌다.

“촬영 끝나고 집에 가는 차에 탔을 때, 그날의 연기가 만족스러우면 행복하더라고요. 평소에는 심심하게 집에만 있는 편이에요. 가끔 산책하고, 그 외에는 주로 집에서 휴식을 취해요. 정말 별게 없죠?(웃음)”

그의 삶에 활력을 불어넣는 존재는 반려견 ‘엄지’다. 본가에 계신 부모님이 보내주는 엄지의 동영상을 보면서 힐링을 한다. 그런 그답게 가장 좋아하는 예능 프로그램도 <동물농장>이다. 제안이 들어온다면 꼭 한번 출연해보고 싶다는 마음을 전했다.

“최근에는 집에 자주 내려갈 수 없어 엄지를 많이 못 봤는데 어머니가 영상을 찍어서 보내주세요. 보면서 어느샌가 웃고 있는 제 모습을 발견하게 돼요.”

끝으로 엄태구에게 ‘낙원’의 의미를 물었다. “장소로 존재하진 않는 거 같아요. ‘낙원이란 게 있다면 여기가 아닐까’ 싶었던 찰나는 있어요. 아주 잠깐, 지금 이 순간 정말 좋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잖아요. 고생해서 준비한 연기가 잘 나와 안도감을 느낄 때 여기가 낙원이구나 싶더라고요. 곧바로 내일 할 일을 걱정하긴 하지만요.(웃음)”

서툴지만 진심이다. 모든 말에서 그가 인생에서 꼭 지켜내고 싶은 ‘진정성’이 느껴졌다. 그 어떤 질문에도 허투루 답하지 않았고, 수줍어했지만 그 안에는 단단함이 있었다. 엄태구가 관객에게 보여준 낙원, 앞으로 보여줄 진실한 연기에 기대감이 모이는 이유다.

CREDIT INFO
에디터
김연주
사진
넷플릭스 제공
2021년 05월호
2021년 05월호
에디터
김연주
사진
넷플릭스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