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이너이자 공예 예술가인 윤라희 작가를 대변하는 작품은 깊고 오묘한 색으로 긴 여운을 남기는 아크릴 공예 작품이다. 요란하지 않지만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그녀의 작품은 크고 작은 다양한 브랜드와 리빙 편집 숍을 통해 알려졌다. 오묘하고 깊은 컬러를 심은 듯한 묵직한 물성의 오브제를 선보이는 그녀는 자신의 작품을 꼭 닮은 라이프스타일을 지향하는 인물이다.
종묘 거리에서 멀지 않은 종로에 위치한 그녀의 작업실은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건축물 중 하나다. 119년이 된 건물이지만 낡기보다는 모던하고 단아한 미를 지닌 이 독특한 건물은 오래전에 지어진 덕분에 나지막하되 넓고 트인 저만의 공간을 가지고 있다. 윤라희 작가가 이 공간에 자신의 새 작업실을 마련하기로 결심한 것은 이 오랜 공간이 빚어내는 느긋함과 평화로움 때문이다.
“입주한 지는 이제 막 2개월에 접어들었지만, 사실 오래전부터 눈여겨보고 있던 공간이었어요. 제 첫 작업실이 이곳에서 가까운 곳에 있었고, 작업에 필요한 공장이 모두 가까이 있어서 이곳에 주차를 하고 근처에서 업무를 본 적도 많았어요. 공간이 주는 기운이 가장 마음에 들었지만, 실용적인 면에서도 완벽한 곳이죠.”
낮고 넓은 창이 이면을 감싼 직사각 형태의 작업실은 1층에 자리하고 있다. 창이 넓고 특수 코팅을 하지 않았기에 작업실 안이 쉽게 들여다보이지만 윤라희 작가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눈치다. 창밖을 통해 널찍한 마당에 심어져 있는 나무를 바라보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경험인지 진심을 담아 천천히 말하는 것만 봐도 그렇다.
“작업실을 완성한 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오래 지켜봐서 알아요. 봄에는 벚꽃이 가득하고, 여름엔 이렇게 푸르죠. 겨울의 앙상한 나무들도 그 나름의 운치가 있어요.” 야외 공간에 의자를 꺼내어놓고 인터뷰를 하던 윤라희 작가가 말했다.
가깝게 지내는 인테리어 디자이너들과 작업실을 정리했다는 그녀의 작업 공간은 작품만큼이나 단정한 우아함을 지녔다. 오랜 건물에서 쓰인 커다란 벽돌 구조의 크기에 맞춰 실내 선반장도 그 폭과 길이를 크게 정리했다.
작업실 가운데 놓아둔 긴 직사각형의 테이블 상판에는 두꺼운 유리가 놓여 있는데, 이를 마주 보고 있는 벽면에 길게 난 창의 나무가 비쳐 아름다운 그림을 만들어낸다. 작가가 가장 좋아하는 스폿이다. 건물을 둘러싼 외부의 넓은 야외 주차장이 작업실보다 아래에 있어 지나친 개방감 없이 창밖의 나무나 바람을 즐길 수 있는 데다 거리의 소음으로부터 떨어져 있어 작업에 집중하기 좋은 환경이다.
물론 불편한 점도 있다. 각기 구분된 공간을 임대해 관리하는 오랜 건물인 만큼 출입 시간이 정해져 있는 것. 새벽 6시에 문이 열리고, 밤 10시면 건물 밖으로 나가야 한다. 특정 작업을 앞두고 마감에 쫓길 때도 있는 작가 입장에서는 불편할 수 있지만 윤라희 작가는 이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건강한 사이클을 유지하면서 작업할 수 있게 됐어요. 정해진 시간 안에 집중해서 작업하고 규칙적인 생활 패턴을 갖게 된 거죠.”
엘리베이터도 없고, 붙박이 에어컨도 없지만 이 공간이 주는 자연스러움에 빠져 있다는 윤라희 작가는 공간이 작가에게 주는 영감에 대해 강조했다.
“작업 공간이 주는 영감은 작가의 힘을 유지하는 중요한 요소 중 하나예요. 개인적으로 예술가에게는 아무 생각 없이 앉아 있는 시간도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지금의 작업실에서는 창밖을 보며 그런 소중한 시간을 가질 수 있어요. 붙박이 에어컨보다 값진 거예요.”
값싼 산업 소재에 불과했던 아크릴에 숨겨져 있던 새로운 가능성과 미학을 발견한 재능 넘치는 작가다운 생각이었다. 종묘 거리 뒤편에 자리한 나지막하고 오래된 건물에 위치한 그녀의 작업실은 그 모든 영감과 작품을 껴안는 것으로서 그 자체로 작품이 되는 공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