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살 최순화는 데뷔 3년 차 시니어 모델이다. 2018 F/W 헤라 서울패션위크에서 디자이너 키미제이(KIMMYJ) 무대를 통해 데뷔했고, 시니어 모델 최초로 피날레를 장식했다. 지난해 12월에는 젊은이들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요가복 브랜드의 광고 모델로도 발탁됐다. 지금껏 그 누구도 걸어본 적 없는 파격적인 길이다. 물론 처음부터 순탄했던 것만은 아니다. 이 길에 본격적으로 오르기까지, 최순화에게도 오랜 인고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녀는 불과 얼마 전까지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삶을 살았다. 어릴 적 막연하게 모델을 꿈꾼 적도 있었으나 결혼 후에는 먹고사는 걱정이 우선이었다. 지인에게 돈을 빌려주고 돌려받지 못해 빚을 진 이후로는 생계에 더욱 매진했다. 돌멩이 하나 날아들지 않는 잔잔한 호수 같은 삶이 계속됐다. 그때 모델을 해보는 게 어떻겠냐는 지인의 한마디가 최순화의 마음에 파문을 일으켰다. 잊고 있던 꿈이 되살아났고 심장이 마구 뛰었다.
더 늦기 전에 도전해보리라 마음먹은 최순화는 그 길로 모델 학원에 찾아갔다. 젊은 모델들 사이에서 곱절은 더 노력해야 했고 그때마다 물리적 나이의 한계를 느끼기도 했다. 하지만 그 모든 과정이 최순화에게는 즐거움이었다. 바닥난 줄 알았던 열정이 매일 새롭게 샘솟았고 그 활력을 동력 삼아, 지금의 자리에 이르렀다. 이제는 카메라 셔터 소리에 곧바로 눈빛이 바뀌는 베테랑이 됐다. <우먼센스> 카메라 앞에서도 최순화의 내공은 여실히 느껴졌다. 거침없이, 적극적으로 포즈를 취하는 모습을 보며 '진짜 모델'이라고 불리기까지 그녀가 얼마만큼 노력해왔을지 조금은 짐작할 수 있었다.
오늘 정말 멋지신데요. 이 나이에 화보라니.(웃음) 가끔은 이런 순간이 안 믿길 때가 있어요. 이런 좋은 기회를 통해 제가 살아갈 에너지를 얻죠. 아마 그 에너지 덕분에 저를 더 멋지게 봐주는 게 아닐까요?
요즘 그야말로 시니어 열풍이잖아요. 뜨거운 바람이 불고 있다는 걸 실감해요. 처음 모델 학원에 들어갈 때만 해도 전혀 예상치 못한 분위기지요. 그땐 '시니어'라는 말조차 어색했어요. 모델 학원에 다니는 것도 취미 생활의 개념에 가까웠거든요. 그러다가 재작년 김칠두 선생님 활약 덕분에 갑자기 확 불이 붙었죠. 시니어 모델 학원도 갑자기 생겨나기 시작했고요.
그 열풍에 최순화도 한몫했어요. 소감이 어때요? 늘그막에 복 받았죠, 뭐. 요즘엔 이 활동에 그냥 푹 빠져 살아요. 이제야 인생 사는 맛이 난다고나 할까요? 예전에는 그저 애들이 잘되면 좋고, 남편이 돈 많이 벌어오면 좋았는데 지금은 달라요. 내가 나로 인해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게 신기하고 놀라워요. 무슨 복을 받았기에 매일이 이렇게 즐거울 수 있을까요.
모델이 되기 전후로 최순화의 삶은 얼마나 달라졌나요? 이 나이쯤 되면 그야말로 평소에 할 일이 없어요. 집에서 애들 뒤치다꺼리나 하다가 가끔 노래 교실에나 한번 나가보는 거지. 친구들을 만나는 것도 한두 번이잖아요. 삶이 심심하고 무료할 수밖에 없어요. 그런데 이 일을 하고 나서는 늘 시간이 모자라요. 오늘처럼 스케줄이 있을 땐 하루가 금방 가고요. 평소에는 더 건강한 몸을 유지하기 위해 한방병원에 다니고 있고, 귀찮아도 하루에 40분씩은 스트레칭을 하려고 해요. 틈틈이 워킹과 포즈 연습을 하고요. 아, 시간 쪼개서 유튜브를 보기도 하죠.
어떤 유튜브 채널을 보나요? 요즘 주변에서 트로트 때문에 난리인데 저는 잘 안 봐요. 패션쇼 보느라 바쁘거든.(웃음) 샤넬, 조르지오 등 브랜드 패션쇼를 보면서 정신없이 감탄해요. '어쩜, 이렇게 잘할까?' '어쩜, 이렇게 예쁠까?' 생각하다 보면 앉은자리에서 몇 시간이고 볼 때도 있어요. 근데 하나도 지루하지 않고 그저 재미있더라고. 새롭게 배우는 것도 많고요. 마음에 드는 의상이나 머리 스타일이 있을 때는 사진으로 찍어놓기도 해요. 다음번엔 나도 한번 도전해보고 싶어서. 나한테 이런 열정이 있었나, 스스로가 신기할 때도 있어요.
열정의 원동력은 어디서 오는 걸까요? 그동안 내 나이에 모델을 했던 사람이 없으니까 다들 나를 높게 쳐줘요. 요즘에는 저를 보고 "최순화 선생님~" 하면서 부르는데 나이 때문에 대접받기는 싫은 거야. 사람들이 진짜 나를 인정해줄 때 '선생님' 호칭도 떳떳하다고 생각해요. '내가 정말 잘해야겠다' '더 노력해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하죠. 그런 생각들이 원동력이 되는 것 같아요.
다른 시니어 모델들에게 자극도 받나요? 좋은 자극이 돼요. 나보다 젊은 5060 시니어 모델들은 조금만 배우면 금방 익혀요. 근데 70살이 훌쩍 넘으니 발을 삐끗하지 않고 똑바로 걷는 것도 너무 힘들어요. 아무래도 순발력이나 적응력이 떨어지다 보니 남들보다 곱절로 노력해야 해요. 그렇게 노력해도 얻는 대가는 한 50% 되려나?(웃음) 다행히 이제야 조금씩 모델답게 걷기 시작했다는 느낌이에요. 아직도 갈 길이 멀어요.
자기 관리가 대단한 것 같아요. 몸매도 멋지고요. 밀가루 음식을 너무 좋아하는데 어느 순간부터 소화가 안 돼 점점 멀리하게 됐어요. 처음에는 끊기가 너무 힘들더라고요. 길 가다가도 빵집이나 국숫집을 보면 그렇게 고민이 되는 거야.(웃음) 요즘에는 하루에 두 끼를 먹으면서 식단을 조절해요. 아침에는 과일이나 샐러드를 먹고요. 그러다 보니 뱃살도 좀 빠지데요. 원래 살이 잘 안 찌는 체질인 것도 한몫하고.
외모만큼 내면 관리도 중요할 것 같아요. 너무나 중요하죠. 사실 이 나이에 이렇게 왕성하게 활동할 수 있다는 게 기적 같은 일이잖아요. 그런데 간혹 학원만 좀 다니면 빨리 데뷔할 줄 알고 모델 되겠다며 찾아오는 사람이 있어요. 나이가 있으니 마음이 조급한 거죠. 근데 조급해하고 어떤 결과나 성과를 바라면 이 일을 오래 할 수 없어요. 저는 무엇보다 내가 즐겁고 행복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이 일을 시작했어요. 모델로 데뷔해야겠다는 생각조차 못 했던 것 같아요. 그냥 느긋하게 즐기고 꾸준히 하다 보면 좋은 날이 있겠거니, 영광의 순간이 오겠거니 한 거지. 내 노년을 행복하게 보내고 싶고 좋아하는 이 일을 언제까지고 해보겠다는 느긋하고 긍정적인 마음을 가져야 해요.
간절함은 모든 것을 이겨요. 마음속에 품은 꿈이나 희망이 있다면 뭐든 도전하기를 바라요. '70대 노인도 하는데 나는 왜 못 해?' 라는 생각으로 모두 용기내시길 바랍니다.
언제부터 모델을 꿈꿨나요? 어렸을 때부터 예쁜 것에 관심이 많았어요. '체크무늬'라는 말도 몰랐던 초등학생 시절에 친구가 입은 옷이 그렇게 예뻐 보이더라고요. 그땐 그걸 '사각형 무늬'라고 불렀어. 어렸을 땐 할머니 손잡고 거의 매일 영화를 보러 다녔는데, 외국영화에 나오는 옷이나 모자에도 시선을 뺏겼어요. 영화 내용은 잘 모르는데도 그 예쁜 화면을 보는 게 그렇게 좋았어요. 아마 그때부터 그런 감각을 조금씩 키워나갔던 것 같아요. 그러다가 성인이 돼서 언니와 함께 양장점에 옷을 맞추러 갔는데, 거기 꽂혀 있는 잡지를 보면서 '나도 이런 책에 나갈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죠. 그냥 막연한 꿈이었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방법도 몰랐어요. 그러다가 결혼하고 아이를 낳으면서 모델 꿈은 완전히 잊고 살았죠.
꿈을 이뤄봐야겠다고 결심한 계기가 있다면요? 지인에게 거액의 돈을 빌려주고 그걸 못 돌려받아 빚을 떠안은 적이 있어요. 어쨌든 먹고살아야 하니 간병 일 하면서 돈을 벌었는데 어느 날 제 환자가 그러더라고요. "모델 해보면 어때? 잘 어울리겠네"라고요. 이 나이에 무슨 모델이냐고 손사래를 쳤더니 "요즘 실버 모델도 많잖아~"라고 말하더라고요. '실버 모델' 네 글자에 가슴이 뛰었어요. 잊고 있던 꿈이 되살아나는 기분이랄까요. 더 늦기 전에 하고 싶은 걸 해봐야겠다는 생각에 수소문해 학원에 등록했어요. 다달이 빚 갚는 게 너무 힘든 때라 온갖 부정적인 생각에 완전히 빠져 있을 때 유일한 탈출구를 찾은 거야. 매주 화요일마다 모델 학원에 나갔는데 그날을 위해 남은 6일을 버텨냈어요. 그곳에서는 내가 살아 있음을 느꼈고요.
가족들도 응원해주던가요? 손가락질 받을 것 같아 처음에는 아무한테도 얘기 못 했어요. 학원에 다니기 시작하고 한 3년쯤 됐나? 슬그머니 아이들에게 털어놨더니 "그래, 엄마도 취미 생활 하나 있어야지" 하더라고요. 그땐 이렇게 본격적으로 활동하게 될 줄 아무도 몰랐으니까요.(웃음) 지금은 많이 격려하고 응원해줘요. 무엇보다 손자들이 참 좋아해요. '네이버'에 프로필 검색이 되니까 "할머니, 네이버까지 진출했어? 그거 엄청 힘들잖아!" 하면서 꽥꽥 소리를 지르더라고. 처음에는 그게 그렇게 유명한 줄도 모르고 손자들이 좋아하니까 같이 좋아했었죠.
또 다른 뿌듯한 순간이 있었나요? 런웨이에 설 때가 가장 뿌듯해요. 2018년 헤라 서울패션위크의 키미제이 디자이너의 무대가 저의 첫 무대였는데 그땐 정말 온몸이 벌벌 떨리더라고요. 혹시 실수해서 다리가 꼬일까 봐 어찌나 긴장을 했던지. 남들 보기엔 괜찮았다고 하는데 자기만족이 안 되는 거죠. '잘하자! 나를 더 알려야겠다!'는 의욕을 갖고 무대에 오르는데, 막상 끝나고 내려오면 후회 천지예요. 하지만 떨리는 만큼, 그 순간이 가장 행복하고 좋아요.
시니어 모델 시장이 점점 커지는 것을 실감나세요? 시장은 확실히 커지고 있어요. 다만 시니어 모델에 도전하려는 사람이 많다 보니, 이걸 이용하려는 일부 사람들도 나오더라고. 학원도 갑자기 우후죽순 생기기 시작했고요. 한마디로 시니어 모델을 돈벌이로 활용하려는 파렴치한 사람들이 생기는 거지. 그걸 보면 씁쓸해요. 나처럼 열정 하나로 뛰어든 사람도 많을 텐데 그 꿈을 펼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곳이 많았으면 좋겠어요. 아직은 과도기니까 앞으로 점점 더 나아지리라 믿습니다.
최순화는 어떤 사람인가요? 매사에 긍정적이고 명랑한 사람이에요. 그 힘으로 여기까지 올 수 있었어요. 잘 안 돼도 그만이니 일단 가보자고 생각해요. 70대에 모델이라니 누군가는 '나이가 몇인데, 미쳤나?' 생각할 수도 있잖아요. 하지만 내가 정말 하고 싶고 하기로 마음먹었다면 밀어붙여요. 결정하기까지 고민이 많지, 한번 결정하면 돌진하는 스타일이에요. 모든 책임은 내가 지는 거니까요. 그런 성격 때문에 지금의 제가 있을 수 있는 것 같아요.
요즘 5060세대의 새로운 롤 모델이에요. 해주고 싶은 조언이 있나요? 간절함은 모든 것을 이겨요. 마음속에 품은 꿈이나 희망이 있다면 뭐든 도전하기를 바라요. 저 또한 어릴 적 꾸었던 꿈을 펼치는 데 주저함이 없잖아요. 하고 싶은 것이 있을 때 직접 행동으로 실천하는 것과, '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끝나는 것은 완전히 달라요. 게다가 지금은 원하면 뭐든 이룰 수 있는 시대라고 생각해요. 나를 보면서 '70대 노인도 하는데 나는 왜 못 해?'라는 생각을 하고 용기 내서 나아가길 바랍니다.
앞으로 어떤 모델이 되고 싶어요? 카르멘 델로레피체라는 미국의 패션 모델이 제 롤 모델이에요. 경력이 70여 년이고 현재 80대인데 그분처럼 오래 꾸준히 일하고 싶어요. 저 또한 그 모델처럼 '우아한 아름다움'을 전파하기 위해 노력 중이고요.(웃음) 현실적으로는 어떤 옷이든 소화할 수 있는 모델이 되고 싶어요. 저는 옷에 상당히 관심이 많아요. 이 옷을 입었을 때 내 모습이 어떤지,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봐줄지, 또 나에게 얼마나 어울릴지에 대한 생각을 해요. 옷을 사지 않고 맞춰 입은 지 한 30년쯤 됐어요. 어떤 무늬를 할지, 어떤 천을 고를지 생각하는 게 행복하더라고요. 그런 것에서도 소소한 행복을 얻어요.
향후 목표가 궁금합니다. 내가 건강할 동안엔 계속 모델 활동을 하고 싶어요. 그게 가장 첫 번째 목표예요. 두 번째로는 많은 시니어에게 꿈과 희망을 주는 사람이고 싶어요. 제가 모델로 더 많이 알려져 저를 보고 희망을 얻는 분이 많아지길 바라요. 마지막으로는 시니어 모델업계가 부흥했으면 좋겠어요. 저희 소속사 대표님이 최초로 시니어모델학과를 개설해 그곳에서 전문적으로 교육과 양성을 하고 있어요. 이 업계가 앞으로 더 주목받고 성장해서 우리가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할 수 있으면 좋겠네요.
가슴이 뛰는 일을 좇는다면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 최순화를 보고 있자니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 누구에게라도 늦은 때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