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을 만나는 것도 인연이죠
국내에서 가장 유명한 한복 디자이너 중 한 사람이자, 보자기 아티스트인 이효재(이하 효재)의 새로운 작업 공간은 예상치 못한 곳에 짐작하지 못한 형태로 있었다. 충북 괴산에서도 제법 깊은 산속에 위치한 조그마한 마을.
그곳에 드문드문 자리한 현대적인 디자인의 집을 몇 채 지날 때만 해도 비슷한 형태의 건물을 상상했지만, 그 기대는 완전히 어긋났다. 마을 안쪽에 위치한 작은 언덕 위에 ㄱ자 형태로 배열된 두 채의 한옥. 그리고 그곳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작은 오두막 같은 화장실. 그곳에서 효재가 나왔다.
넓게 깔아둔 돌계단을 오르자 정면에 자그마한 돌집이 모습을 드러냈다. 흙으로 다져 돌로 장식한 한옥이 아닌 커다란 돌이 중심이 돼 바닥과 벽을 만들고 청석으로 지붕을 다진 진짜 ‘돌집’이었다.
흥미로운 점은 집의 크기다. 5.6㎡(약 1.7평)의 작은 방 한 칸에 불과한 이곳은 가까운 절의 스님이 원래 명상을 위한 공간으로 구상하고 지었다. 명상을 위한 공간이니 방은 작을 수 있다 해도 처음 이 집을 보면 놀라게 되는 것은 성인 여성의 평균 키 정도 되는 나지막한 집의 높이다. 덕분에 성인이라면 거의 모두가 납작한 청석으로 덮인 천년능애의 지붕을 볼 수 있다.
“비가 오는 날이면 저 돌 지붕 위에 빗방울이 떨어지는 것을 보면서 그 소리를 감상할 수 있어요. 그 소리가 마치 자연이 선물하는 오케스트라 연주 같죠.”
효재는 이 집을 중심으로 생활하면서 비 오는 날 이런 소리를 듣고 바라보는 순간의 행복을 즐기게 됐다. 그 옆에는 좀 더 정돈된, 익숙한 형태의 단칸 한옥이 자리하고 있지만 그녀가 이곳에 머물게 된 것은 순전히 이 돌집 때문이다. ‘효루정’이라 이름 붙인 이 진짜 돌집을 보자마자 첫눈에 반했다고.
“마치 사람과의 관계가 그러하듯 집도 인연이 있는 거 같아요. 저는 예전부터 돌을 좋아했어요. 생물과 무생물 모두 자연 속에서 변하는데 돌은 아마 마지막까지 그 형태로 존재할 테니까요. 그래서 이 투박하고 자연스러운 공간이 매력적으로 다가왔어요.”
효루정이라 이름 붙인 이 집은 바닥과 벽은 물론 천장까지 모두 돌로 만들어져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아궁이에 불을 때면 적당한 온도로 오랫동안 훈훈하다. 이 공간에 아늑함을 더하는 것은 효재가 직접 수놓은 요와 방석 그리고 그녀가 만든 옷을 입혀 구석에 놓은 인형 등이다.
“제가 이곳에서 하는 일은 이 공간에 문화를 더하는 거예요. 아무런 문화와 콘텐츠가 없다면 이는 그냥 시골의 작은 오두막에 불과해요. 공간에 어떤 성격과 색채를 입힐 지를 연구하고 더하며 이 마을을 완성해갈 예정이에요.”
어렵고 거창하지 않아도 아름다워요
돌집 옆에 단아한 형태의 단칸 한옥으로 만들어진 다실은 커다란 창이 3면으로 나 있어 현대적인 것과 전통 가옥 형태가 멋진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이곳에서는 효재의 의식주에 관한 문화 수업이 이뤄진다. 서울에서 충북까지 찾아온 그녀의 제자들은 불편하기보다 여행 온 것 같아서 좋다고 입을 모은다고.
효재의 수업에서는 자수와 매듭, 보자기에 관한 것은 물론 삶의 모습을 아름답게 가꿔가는 데 도움이 되는 애티튜드에 대한 모든 것을 배운다. 요약하면 단정하고 품위 있는 삶을 만들어가는 데 도움이 되는 것들이라고도 볼 수 있겠다.
방 입구에는 제자가 그녀에게 선물한 귀여운 바느질 그림이 걸려 있다. 효재가 등지고 앉는 벽면에는 크게 낸 창이 있어 눈이 시릴 정도로 푸른 숲이 그림처럼 펼쳐진다.
그 맞은편에는 그녀가 서울에서 수업을 위해 챙겨 온 다양한 형태의 다기가 소담하게 진열돼 있다. 이 모든 것이 작은 공간 속에 저마다 자리를 잡고 있지만 북적댄다는 느낌보다 아늑하고 소박한 한국적인 멋이 있다.
하지만 정작 이런 공간을 완성한 효재는 이 모든 것을 복잡하고 어렵게 받아들이길 거부한다. 일례로 방구석에 놓인 커다란 항아리에 감탄한 방문객들이 그 안에 무엇을 보관하냐고 물어보면 “지인들이 선물한 휴지”라는 예상치 못한 답변이 나온다.
“어렵고 복잡한 건 개인적으로도 좋아하지 않지만, 무엇보다 그럴 필요가 없어요. 항아리는 수납공간이잖아요. 내가 필요한 것을 보관하는 거죠. 어렵게 받아들이지 마세요.”
단순한 것의 유용함과 아름다움을 이야기한 그녀가 요즘 몰두하고 있는 일은 뒷마당에 붓꽃을 심는 것이다. 그녀가 이제 막 가꾸기 시작한 이 작고 예쁜 문화 공간이 초라한 움막과 구분되는 것은 그런 차이에서 비롯된다.
“마당의 수도를 틀어 물을 흘려보내고 풀을 뽑는 시간을 좋아해요. 공간도 계속 가꾸다 보면 성장해요. 하지만 과정을 즐기는 인내는 필수죠. 자연이 시간을 요구하며 천천히 변하는 것을 지켜볼 수 있어야 그 결과물을 볼 수 있어요. 바느질은 밤새우면 서두를 수 있지만, 어제 심은 나무가 굵어지는 것은 최소한 3년 이상의 시간이 필요하거든요.”
편리하고 세련된 시골 도시를 꿈꿔요
“10년 전에 허영만 선생님 그리고 사모님과 함께 일본의 한 시골 도시를 방문한 적이 있어요. 산속에 있는 곳이었는데 흔히 떠올리기 쉬운 시골 마을이 아니라, 작지만 세련되고 편리한 자연 속의 도시였어요. 말로 설명하기에는 부족함이 있지만 취향을 막론하고 누구나 좋아할 법한, 세련되면서도 자연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곳이었죠. 그 뒤로 에코 시티에 대한 로망이 생겼어요.”
국립공원 홍보대사이기도 한 그녀는 한동안 한국에서 그런 도시를 만들 수 있을 만한 곳을 찾아다니기도 했다고. 지금의 이 마을은 그녀가 막연히 상상한 ‘시골 도시’ 구상에 적합한 조건을 모두 갖췄다. 서울에서 멀지 않으면서 자연으로 둘러싸인 지역에 마을이 형성됐다는 점이 특히 그렇다. 과거 일본에서 방문한 마을처럼 전통문화를 접할 수 있으면서도 세련된 도시형 마을이 생겨나길 바라며 이곳에 온 그녀는 현재 대부분의 시간을 괴산에서 보낸다.
신기한 점은 마을엔 이미 그녀가 오기 전부터 소수의 아티스트가 터를 잡고 살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중에는 그녀가 오랫동안 수소문해온 작가도 있다. 20년 전 구매한 은 다관의 기술과 디자인에 감탄해 찾았던 운용(박창범) 작가를 이곳에서 만난 것.
그는 차를 제대로 마시기 위해 스스로 독학으로 터득한 은공예를 20년간 발전시켜온 인물이다. 접합 부위 없이 한 개의 덩어리로 다관과 숙우(물 식힘 그릇)를 완성하는 작가는 국내에서도 몇 안 된다. 산속 깊은 곳에 자리한 마을이지만 돌집을 만드는 스님과 은공예 작가, 한복 디자이너이자 보자기 아티스트인 효재, 그리고 화가도 이곳에 터를 잡았다. 빼어난 아티스트들이 한곳에 모였으니 효재가 원하던 마을이 실현될 날도 머지않은 듯하다.
“시골이라서 특별하다고 말할 생각은 없어요. 자연에 둘러싸인 곳에서 일상을 영유할 수 있다는 것은 행운이지만 그곳이 특별한 이야기를 품은 마을이 되기 위해서는 문화가 꼭 필요해요.” 마당의 수돗가에 놓아둔 장독 뚜껑에 담긴 복숭아를 매만지며 효재가 말했다. “제가 이곳에서 앞으로 해나갈 일이 그런 거예요. 스님이 지은 천년능애 돌집 마당에 붓꽃을 심고, 보자기와 수놓은 작품으로 내부를 채우며 이곳을 특별하게 가꾸는 것. 그런 일부터 시작해 마을에 색을 입히는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