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기는 것'이 가장 큰 힘이죠
노영희 셰프가 운영하는 스튜디오 '푸디'에 들어서면 공간이 주는 힘을 다시 한 번 절감하게 된다. 높은 층고에 볕이 잘 드는 스튜디오의 한쪽 벽면은 바닥부터 천장까지 다양한 식기를 빼곡하게 담은 선반이 차지하고 있다. 선반 맞은편에는 주방을 등지고 있는 커다란 조리대가 위치하고, 그곳에서는 서너 명의 스태프가 무언가를 분주하게 만들고 있다.
적당한 활기와 고소한 음식 냄새, 어디로 시선을 둬도 호기심이 절로 이는 다양한 그릇과 소품으로 가득한 이 공간은 노영희 셰프가 매일 출퇴근하며 일과를 보내는 곳이자, 요리에 관한 그녀의 열정과 삶의 방향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일종의 '공간 아카이브'다. 스튜디오를 가득 채운 가구와 식기는 그녀가 <우먼센스>를 세상에 선보인 창간호 기자로 커리어를 시작하는 순간부터 푸드스타일리스트, 한식 셰프로 거듭나기까지 자신이 거쳐온 모든 곳에서 수집해온 귀한 역사가 담긴 물건들이다.
얼핏 둘러만 보아도 소박한 듯 개성이 뚜렷한 모든 그릇과 컵 하나하나에서 과장되지 않되 진정성이 담긴 것을 사랑하는 그녀의 취향을 확실히 느낄 수 있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이곳으로 출근하는 그녀는 적지 않은 수의 스태프의 작업과 지도를 일과로 소화하고 있다.
그간 다양한 일을 거친듯하지만 요리라는 하나의 커다란 맥락에서 풍요로운 커리어를 꾸릴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었이었을까? 답은 간단했다. "즐기지 않았으면 이렇게 오래 할 수 없었겠죠. 32년 전 <우먼센스> 창간호 기자로 일하던 당시에 요리 칼럼을 맡았어요. 당시에는 푸드스타일리스트라는 직업 명칭조차 없을 때라 기자가 직접 스타일링을 하기도 했죠. 대학 시절 꽃꽂이를 오래 한 덕분인지 저는 그 작업이 재미있고, 결과도 좋았어요. 당시에는 디지털카메라도 없었는데 결과물이 좋으니 칭찬도 많이 받았죠. 그렇게 시작된 열정이 지금으로 이어졌어요. 새삼스럽지만 좋아하는 일을 한다는 것은 굉장히 중요해요. 제가 이 일을 비교적 오래, 잘해왔다면 비결은 그것이 아니었을까요?"
좋은 재료가 좋은 요리를 완성하죠
노영희 셰프의 손길이 닿은 모든 요리는 항상 최상의 식재료를 쓴다. 좋은 식재료가 좋은 음식을 완성한다는 그녀의 확고한 신념 때문이다. "좋은 음식은 그냥 먹어도 훌륭한 요리가 될 수 있지만, 좋은 재주가 좋은 요리를 만들 수 있는 것은 아니에요. 기본적으로 재료가 좋아야죠."
정말 좋은것을 접해봐야 주어진 여건이 나빠도 그것을 닮은 걸 만들기 위해 노력할 수 있다고 믿기에 교육할 때 쓰는 재료 역시 아끼지 않는다. 간장 하나, 조미료 하나도 대량으로 구매해 두고두고 쓰는 법이 없다. 레스토랑 '품'에서 한 번에 구입하는 쌀은 5kg을 넘지 않고, 스튜디오 푸디에서 사는 쌀은 3kg 넘지 않도록 한다. 쌀은 갓 도정해 마르지 않은 것을 먹는 게 가장 좋다는 노영희 셰프의 확고한 믿음 때문이다.
당연히 식재료비가 높을 수밖에 없지만, 구매 비용을 낮추기보다 낭비를 줄이자고 당부하는 데서 그친다. 음식의 가치를 귀히 여기는 만큼 그녀 자신을 위해 요리할 때도 좋은 재료를 사용한다.
일부 셰프들이 정작 자신은 라면으로 끼니를 때운다는 에피소드는 노영희 셰프에게 해당 사항이 없다. 아침에 가볍게 커피 한 잔을 하고 출근해 점심에는 직원들과 가장 좋은 재료로 가장 좋은 음식을 만들어 먹는다. 급한 업무가 없을 때는 점심을 차리는 것이 오전 일과다.
한식의 기본에 충실하지만 찌개나 국은 올리지 않는다. 개인적으로 선호하지 않을뿐더러 염분이 높은 편이라 건강에도 좋을 것이 없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탄수화물을 줄이고 반찬을 더 많이, 고루 먹는 쪽으로 식습관이 바뀌었다.
"좋은 음식이 곧 약이 된다고 생각해요. 반찬 재료 하나 소홀히 고르지 않으니까 식사를 잘하는 것만으로도 건강한 라이프스타일을 유지해왔어요. 가끔 컨디션이 좋지 않은 날이면 진공포장해 둔 안심을 구워 먹어요. 간을 하지 않고, 기름도 많이 두르지 않죠. 양질의 단백질을 보충해준다는 차원에서요."
노영희 셰프는 예순이 된 나이에도 흔한 건강 보조제 하나 섭취하는 법이 없다. 좋은 음식이 곧 좋은 영양분이자 약이 된다는 그녀의 믿음은 잔병치레 없이 활기찬 일상을 영유하는 그녀 자신이 증명하고 있다.
진정성이 곧 럭셔리죠
좋은 음식을 좋은 장소에서 즐길 수 있다는 것은 어쩌면 굉장히 진귀한 경험일지도 모른다. 푸드스타일리스트부터 셰프로 커리어를 발전시키기까지 요리를 즐기는 모든 과정을 세심하게 다듬어온 노영희 셰프의 식탁이 사랑받는 이유다. 과장되지 않았지만, 내공이 느껴지는 그녀가 만든 한식 요리의 가치에 공감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신념이 담긴 한 숟갈의 밥이 주는 힘은 남다르기 때문이다.
"1993년에 음식을 제대로 배우기 위해 유학을 계획 중이었어요. 어쩌다 실행하지 못하게 됐는데, 그 무렵 반가 음식을 전문으로 연구하는 강인희 선생님의 수업을 듣게 됐어요. 한식이라고 하면 사람들이 대부분 궁중 음식과 일반 음식만 생각하던 시절이었죠. 그때 소박한 한식 밥상에 쏟은 정성과 식재료에 대한 엄격한 기준을 배웠어요. '아, 이런 것이 진짜 '고급'이구나'라고 깨달았 던 거 같아요. 푸드스타일리스트로 자리를 잡아갈 때라 일이 무척 많았음에도 두 시간 가까이 버스를 타고 경기도까지 가는 길이 무척 즐거웠어요. 제대로 된 음식에 대한 교육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이 좋았거든요."
훗날 레스토랑을 열면서도 좋은 음식을 좋은 타이밍에 내놓는 것에 대해 고민이 많았던 그녀는 따뜻한 것은 따뜻하게, 찬 것은 차게 먹는 것이 좋다는 신념을 자신의 레스토랑에 반영했다. 한 번에 모든 음식이 다 올라오는 한식의 전통적인 테이블 세팅을 따를 경우 그렇게 먹을 수 없기 때문에 코스 요리의 형태로 음식을 내놓기 시작했다. 덕분에 각각의 음식이 어울리는 식기에 담겨 적절한 온도로 서빙됐다.
배우는 삶이 풍요로운 삶이죠
"저는 열정이 있는 사람이 좋아요. 자기 일과 배움에 대한 열정이오."
노영희 셰프는 늘 꾸준히 무언가를 배우는 데 시간과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기자에서 푸드스타일리스트로 전향하기 위해 끝없이 일본어로 된 푸드스타일링 책을 찾아 읽고 여기저기 배우기 위해 뛰어다니던 과거에도 그랬고, 일주일에 한 번 두 시간씩 버스를 타고 가서 반가 요리를 배우던 시절에도 그랬다. 공부를 한다는 것은 지금의 그녀를 만들어낸 힘이었으며, 지금도 그녀를 가장 기쁘게 하는 행위 중 하나다. 경험 역시 배움이라고 믿고 있다.
올해 예순이 된 그녀는 이를 스스로 기념하기 위해 파리나 뉴욕에서의 한 달 살이를 계획하고 있었다고 한다. 코로나19가 대유행하면서 이는 잠시 보류하게 됐지만, 과거에도 한 달 살이 경험을 드물지 않게 했었다고.
몇 년 전 대학의 초청으로 푸드스타일링 강사로 출강한 적도 있는 그녀는 가끔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발전하기를 바라는 제자들이 안타까웠다고 했다. 여행이 자유롭던 시기에는 한 달에 한 번 일본에 식문화사를 배우러 가기도 하고, 일 년간 한 달 주기로 깨진 그릇을 붙이는 수업을 들으러 다니기도 했다고 한다.
"변하고 싶으면 무엇이라도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특히 공부요. 자신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나를 둘러싼 무언가가 변하길 바랄 수는 없잖아요. 그래서 공부해요. 무엇이라도 자꾸 배우면서 자신을 성장시키는 거죠. 준비가 돼 있어야 기회가 왔을 때 잡을 수 있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