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1월 1일은 가족 셋이 함께 새해 첫 일출을 바라보며 한 해를 어떻게 보낼지 계획을 세우고, 지난 한 해의 추억을 회상하는 즐거운 날이다. 올해 첫날, 주안이가 2020년을 맞아 약속한 게 있다. 매일 엄마 아빠와 문제집을 풀고 그림일기를 쓰기로 한 것.
요즘 슬그머니 주안이의 상태를 살펴보는 게 나의 새로운 재미가 됐다. 스케줄이 없는 날엔 아직 방학인 주안이와 하루 종일 신나게 놀다가 저녁이 되면 집 안 분위기를 공부 분위기로 잡았다. 엄마는 평소 읽고 싶었던 책을 읽고, 나는 대본을 읽으며 학습 분위기를 조성했다. 그러자 주안이도 스스로 문제집을 풀겠다며 방에 들어가더니 약속했던 만큼 문제를 풀고, 심지어 책까지 읽겠다며 동화책 3권을 들고 나오는 것이 아닌가. 금세 잠에 빠지고 말았지만 그 모습이 얼마나 사랑스럽고 귀엽던지 잠든 주안이를 보며 ‘우리 아들이 정말 많이 자랐구나! 이제 나만 잘하면 되겠구나!’라는 생각에 책임감이 강하게 밀려왔다.
하지만, 역시 자식 키우는 일은 생각대로, 내 뜻대로 흘러가지만은 않는다. 그날 이후 주안이는 슬슬 꾀를 부리기 시작했다. 스스로 방에 들어가 문제집도 풀고 그림일기도 쓰면 좋으련만. 공부 시간이 됐다고 부르면 못 들은 척하다 두세 번 부르고 나서야 “응? 아빠! 불렀어?”라며 뒤를 돌아볼 때는 이 녀석이 나보다 한 수 위인 느낌이다.
결국은 한다. 아빠가 화를 내서 하는 게 아니라 주안이도 스스로 약속한 걸 알기 때문에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노력한다. 그런데 뭔지 아빠를 약 올리는 듯한 묘한 기분이 드는 건 왜일까? 날 위한 공부도 아니고 자기를 위한 공부인데 말이다. “아빠! 오늘은 문제집을 2장만 풀고 싶은데 3장 풀기로 약속했으니까 3장 푸는 거야”라든가, “내일 오늘 거랑 합쳐서 6장 풀고 싶은데, 그냥 오늘 할게”라고 말할 때면 대단히 아빠를 위하는 듯한 말투다. “고… 고마워”라고 자동적으로 나오는 내 대답까지 더해져 이 녀석이 나를 아주 들었다 놨다 하는 것 같달까.
주안이는 문제집을 푼 뒤 꼭 들고 나와 채점을 요청한다. 그리고 채점할 때는 문제집을 쳐다도 보지 않는다. 틀린 문제에 ‘V’ 표시나 ‘X’ 표시를 하는 것을 싫어하는 녀석. 그런 마음을 알기에 틀린 문제가 있으면 빈칸으로 남겨두고 그 자리에서 다시 한 번 풀어보라고 한다. 전체적으로 동그라미로 가득 찬 문제집을 보며 비로소 환한 미소를 짓는 주안이는 스스로 뿌듯해하며 잠들기 전에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늘어놓는다. 그 모습이 참 사랑스러우면서 기특하다.
약속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주안이의 모습은 정말 예쁘다. 아들이 가족만이 아니라 주변 사람들, 나아가 자기 자신과의 약속도 철저하게 지키는 사람이 되길 소망해본다. 2020년 역시 주안이가 그런 사람으로 성장하는 한 해가 됐으면 좋겠다. 손주안 사랑해!
글쓴이 손준호
1983년생으로 연세대학교 성악과를 졸업한 뮤지컬 배우다. <팬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오페라의 유령> 등 다수의 뮤지컬에 출연했다. 지난 2011년 8살 연상의 뮤지컬 배우 김소현과 결혼해 2012년 아들 손주안 군을 얻었다. 뭘 해도 귀여운 주안이의 행복을 위해 고군분투 중인 대한민국의 평범한 아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