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부터 매년 대한민국의 대표 트렌드를 분석해온 서울대 소비트렌드분석센터 김난도 교수가 올해도 어김없이 2020년 트렌드를 예측한 <트렌드 코리아 2020>을 출간했다.
김 교수는 2020년 트렌드의 중요한 세 축으로 세분화, 양면성, 성장을 꼽았다. 어려워지는 경제 시장 상황에서 새로운 돌파구를 찾으려면 고객을 극도로 잘게 나눠 그 속에 숨겨진 욕망을 발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촘촘한 그물로 되도록 많은 소비자를 겨냥하는 것이 아니라, 매력적인 미끼를 매단 낚싯대로 소비자 한 사람의 한순간을 잡는 것이 중요해졌다는 뜻이다.
다중정체성을 지닌 '멀티 페르소나'
김 교수가 2020년 가장 힘을 주어 발표한 트렌드 키워드는 '멀티 페르소나'다. 현대인들은 매 순간 다른 사람으로 변신하는 다중정체성을 지니고 있다. 커뮤니티 확산과 수많은 SNS의 등장으로 개인이 지닌 정체성은 셀 수 없이 다양해졌다.
김 교수는 이를 복수의 가면이라는 의미에서 '멀티 페르소나'로 명명했다. 천 개의 가면을 쓴 '멀티 페르소나' 소비자들은 하나의 SNS 채널에서 복수의 계정을 운영하며 더욱더 쉽게 가면을 쓰고 벗는다. 그들은 가족과 친구와 같은 '강한 연대'가 아닌 '좋아요'나 '팔로어'와 같은 '느슨한 연대'를 선호하고, 일면식도 없는 남에게 비밀을 털어놓고 고민을 상담한다. 끊임없이 자신을 '리셋'하고 '모드 전환'이 용이하기에 가능한 일들이다. 다중정체성을 지닌 '멀티 페르소나' 소비자들은 '상황'과 '취향'에 따라 매 순간 다른 사람으로 변신하는 것이 일상이 됐다.
'멀티 페르소나' 소비자들의 선호를 따라잡기 위해 '특화'는 생존의 조건으로 거듭났다. 김 교수가 말하는 '특화 생존'은 단순히 차별화나 전문화가 아니다. 라이벌이나 내 기술의 한계를 뛰어넘어 고객이 무엇을 원하는지 정확히 파악하고 만족시키는 것이다. 핀셋처럼 고객 특성을 골라내고, 현미경처럼 고객의 니즈를 찾아내며, 컴퍼스처럼 상권을 구성하고, 낚싯대처럼 자사의 역량에 집중하는 것이 필요하다.
소비자들의 만족 지점이 달라짐에 따라, 의사 결정 순간에 집중하던 과거와는 달리 이제는 의사 결정 과정의 모든 단계가 중요해졌다. 요즘 유튜브에는 '언박싱' 영상이 인기다. 명품부터 전자제품까지 포장을 푸는 그 짜릿한 순간을 공유하는 것이 유행처럼 자리 잡았다. 제품 자체의 성능보다 제품과 소비자가 맞닿는 그 접점에서의 만족에 집중하기 시작한 것이다.
김 교수는 이를 '라스트핏 이코노미'라 정의했다. 라스트핏은 고객의 마지막 접점까지 편리한 배송을 제공하는 '배송의 라스트핏', 목표 지점까지 최대한 편하게 도달하도록 도와주는 '이동의 라스트핏', 구매나 경험의 모든 여정의 대미를 장식하는 '구매 여정의 라스트핏'으로 구분할 수 있다. 상품의 특성이나 브랜드가 주는 가치보다 이제는 주관적 효용을 기준으로 구매 의사를 결정한다. 제품 속성 위주의 가성비 시대를 지나 서비스의 질로 만족도가 바뀌는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라스트핏'이 중요해짐에 따라 구매 결정 기준이 세밀화되고, 하나의 물건을 오래 소유하기보다 다양한 경험을 그때그때 즐기고자 하는 성향이 강조되면서 '스트리밍'이 라이프스타일 전반으로 확장되고 있다. 요즘 세대들은 소유에 대해 연연하지 않는다. 특히 주거 쪽의 변화는 놀라울 정도. 집은 사야 하는 것이라는 인식이 바뀌어 월세나 렌트로 거주하는 것이 일반화됐다. 길게 보면 비용이 더 들어도 사용해보고 싶었던 물건들을 '소유'가 아닌 '경험'하는 것에 과감히 투자하는 소비자가 많아졌다. 다운로드하지 않고 음악을 감상하는 '스트리밍' 문화가 삶에도 깃든 것이다.
또한 '시간 빈곤'에 시달리는 현대인들은 자신의 손발이 되어주는 편리한 상품과 서비스에 목마르다. 가격과 품질보다 '편리함'을 추구하는 '편리미엄' 트렌드가 등장하게 된 배경이다. 김 교수는 소비자들이 과감한 소비를 주저하지 않는 데에는 '시간을 아껴주는 편리함'을 가장 큰 요소로 꼽았다. '소유'에서 '경험'으로 패러다임이 넘어가면서 가장 중요한 자원은 단연 '시간'이라는 것. 간편 가정식의 발달이나 배달 대행 업체의 성장 등이 이를 뒷받침한다. 이런 세분화가 가능해진 것은 데이터와 인공지능 알고리즘을 기반으로 하는 '초개인화 기술'이 발전했기 때문이다. 인간을 데이터화함으로써 상황과 맥락에 따라 같은 사람에게도 다른 제안을 할 수 있게 됐다.
초개인화는 개인의 고유한 니즈를 예측하고 파악해 서비스와 상품을 구매하도록 유도하지만, 소비자의 입장에서는 기업이 자신을 꿰뚫고 있다는 불쾌감을 야기할 수 있다. 개인의 프라이버시 문제를 둘러싼 무수한 우려에도 불구하고 기업들은 생존을 위해 초개인화 전략에 더욱 힘을 쏟을 것으로 예상했다. 과녁의 정중앙, 즉 불스아이를 맞추지 못하면 살아남기 어려운 시대. 신데렐라의 발에만 꼭 맞는 구두처럼 이제 개개인의 취향과 니즈를 반영한 상품과 서비스만으로 승부를 걸어야 한다.
'오팔세대' '업글인간' 신유형의 등장
소비 시장을 이끌 신유형들의 등장 역시 눈여겨볼 만하다. 모바일과 밀레니얼 라이프에 익숙한 '오팔세대'는 새로운 소비 트렌드를 형성하고 구매 시장의 판도를 바꾸고 있다. '오팔세대'는 모든 보석의 색을 담고 있는 '오팔' 보석의 색을 닮았다는 의미이자, 베이비붐 세대를 중심으로 한 50~60대 소비자들을 명명한 것이다. 그들은 단순한 중년 소비층이 아니다. 윗세대들의 구매 형태를 물려받은 '브랜드 다운'이 아닌 젊은 층의 의견을 적극 반영하고 트렌드를 따르려는 '브랜드 업'의 소비 형태를 보인다. 예전의 중년층이 아닌 '신중년층'의 등장이다. 5060세대가 '젊은 소비'를 시작하게 된 배경엔 수명이 길어지고 은퇴 연령이 점차 낮아진 데에 있다. 은퇴해서 쉬기에는 너무 젊어 은퇴 이후의 삶에 대해 적극적으로 도전하고 여전히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나이를 불문하고 '업글인간'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트렌드도 소개했다. 김 교수가 말하는 '업글'은 단순히 '스펙'을 높이는 것과는 다른 의미다. 타인 지향적이고 업무와의 연관성이 높은 '스펙'과는 별개로 '업글인간'은 인간으로서 성장하고 있는지, 어제의 나보다 오늘의 내가 나아지고 있는지에 집중한다. '평생 직장'이란 의미가 무색해지면서 생긴 변화다. 어떤 직급으로 직장을 그만뒀는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어떤 업무를 수행했고 또 어떤 프로젝트에 참여했는지가 더 중요해졌다. 성장은 매우 고상한 단어 같지만 보편적인 단어일 뿐이다. 인간이 지닌 아주 기본적인 욕구라는 것. 나를 어떻게 성장시킬까 하는 '스펙'이 전부였던 시대를 지나 내가 어떠한 존재가 되고 있는지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업글인간'의 주요 관심사다.
김 교수는 요즘 세대들이 추구하는 공정함에도 주목하라고 강조했다. 젊은 세대들은 사회를 바꿔본 경험을 가지고 있다. 적극적으로 정치적 견해를 표명하기도 하고, 불공정함을 타파하기 위해 피해를 감수하고 맞서기도 한다. 이러한 '페어 플레이어' 기질은 젊은 세대에 폭넓게 퍼져 있는 현상이다. 이 때문에 기업은 단순히 제품을 판매하는 것이 아니라 제품의 소비가 불러올 환경과 사회에 대한 영향력까지도 고려해야 한다.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공정을 추구하는 세대가 일어서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적극성은 팬 마케팅에도 새로운 유형으로 등장했다. '팬덤'을 넘어 '팬슈머'라는 새로운 소비층이 생겨난 것. '팬슈머'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스타에게 무조건적인 지지와 지원만 하지 않는다. 요즘 팬들은 자신이 응원하는 스타를 홍보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움직인다. 지하철 역사에 광고를 하기도 하고, 비행기에 스타의 얼굴로 래핑을 하기도 한다. 반면 '내가 키운다'는 생각이 커졌기 때문에 간섭과 견제, 비판도 그만큼 늘어났다. 팬슈머와의 올바른 파트너십은 연예와 마케팅, 정치, 비즈니스 모든 부분에서 필수 요소로 자리 잡았다.
김 교수는 10가지 키워드로 2020년 소비 시장의 트렌드를 정리하면서 이러한 키워드들이 긍정적으로 작용함과 동시에 부정적으로 전개될 가능성에 대해 우려를 나타냈다. 지나치게 빠른 가치관의 확산이 미처 정돈되지 못한 소비 시장에서 부작용으로 나타나 예상치 못한 문제들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트렌드 코리아 2020>이 '전망서'임을 강조하며 '사람은 자신이 희망하는 것을 예측한다'는 격언처럼 전망에 알게 모르게 스며든 소망이 희망찬 2020년으로 이어지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김난도 교수 일문일답
Q 2020년 가장 주목할 키워드는 뭔가요?
'멀티 페르소나'라는 개념은 2020년 소비 트렌드를 전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키워드입니다. 일례로 아마존은 0.1명 규모로 세그먼트를 나눠 소비자를 공략한다고 해요. 100명의 고객이 있으면 1,000개의 시장이 있다는 거죠. '특화'와 '초개인화' 등 듀얼 정체성을 겨냥한 차별화가 필요한 때예요.
Q 듀얼 정체성을 예로 들면 어떤 건가요?
요즘 젊은 사람들은 출근 시간인 오전 9시 이후부터 회사원이라고 생각해요. 그 전엔 상무님을 만나도 인사를 안 하죠. 이런 현상은 현대사회에서 아주 심해지고 있고, 정체성을 표현하는 방식이 달라지고 있습니다.
Q 어떤 방식의 특화가 필요한가요?
'요가복의 샤넬'로 불리는 캐나다 기업 룰루레몬의 경영자가 꼽은 타깃 고객은 '콘도 회원권을 소유하고 여행과 운동을 좋아하는 32세 전문직 여성'이에요. 31세도, 33세도 아니죠. 하지만 32세 여성 외에도 다양한 연령층에서 해당 브랜드를 선호하고 있어요. 기업이 정한 타깃에 대한 열망이 통한 거죠. 이는 타깃 고객에 대한 이해가 얼마나 정밀해야 하는지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Q 부정적인 효과는 없나요?
미세화한 유목적 소비자의 증가는 얼어붙은 경제에 새로운 시장과 소비를 창출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를 통해 사회적 역동성이 강화되는 효과를 볼 수 있죠. 그러나 반대로 쏠림이 심해지고 부정적인 가치관도 너무 빨리 확산되는 것은 우려되는 부분입니다. 최근 극단적 선택을 한 '설리 사건'처럼 페르소나 뒤에 숨어 쏠림 현상을 부추기는 부정적 효과도 배제할 수 없어요.
미래의창 <트렌드 코리아 2020>
감난도, 전미영, 최지혜 외 6명 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