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치열하게 살아온 것 같아요. 드라마 <미생>과 영화 <변호인>이라는 필모그래피가 남았는데, 되돌아보면 그때 그 작품을 해서 다행이다 싶을 때가 있어요. 연기력이 출중한 아이돌 출신 배우들 사이에서, 지금 그 작품을 제가 다시 한다면 잘해낼 수 있을까요?”
군 제대 후 첫 작품을 끝낸 임시완을 만나러 가면서 빳빳하게 굳어 있을 그의 모습을 상상했는데 생각한 것과는 정반대의 모습이라 사뭇 놀랐다. 순수하고 밝은 소년일 것 같던 그는 ‘상남자’의 화끈함을 지녔고 예의 바르고 진중하면서도 솔직하고 유쾌했다. 농담과 속내가 오묘하게 섞인 센스 있는 답변을 내놓는 그와의 대화는 즐거웠다. 2년간의 공백을 깨고 OCN 드라마 <타인은 지옥이다>를 마친 임시완은 후련해 보였다.
“군 제대 후 달라진 점은 크게 없어요. 여권을 10년짜리로 받을 수 있다는 것 정도? 물론 연기에 대한 걱정은 꽤 했어요. 불안하기도 했고요. 2년 동안 연기를 하지 않았으니 감이 떨어졌을 것 같았거든요. 그런데 감이 떨어지지 않은 것처럼 보이려고 노력하면 촌스러울 것 같아 있는 그대로 표현해보자고 마음먹고 첫 촬영을 나섰는데, 생각보다 덤덤했어요. 그 시간을 지나 다시 온 촬영장이 반가웠죠.”
지난 3월 전역한 임시완은 상경한 청년이 서울의 낯선 고시원 생활에서 타인이 만들어낸 지옥을 경험하는 미스터리를 그린 드라마 <타인은 지옥이다>를 통해 성공적으로 복귀했다. 임시완의 새로운 얼굴을 봤다는 평이 다수다.
“연기할 때 지향점 중 하나가 아직 모르는 나 자신의 새로운 표정을 보려는 거예요. 이번에도 아직 몰랐던 제 연기 스타일을 발견했어요. 극적인 드라마에서 간간이 등장하는 일상적인 장면이 있잖아요. 그때 평소의 나처럼 말하듯이 연기하고 싶다는 욕심이 있었거든요. 군대 후임의 추천으로 알고 있던 웹툰이라 익숙해서 출연을 결심했는데, 드라마를 본 후임이 실제 제 모습과 비슷한 면들이 눈에 보여 신기했다고 하더군요. 처음 목표를 어느 정도 이룬 것 같아서 좋았어요.”
임시완이 맡은 ‘윤종우’는 오랜 시간 소설을 쓰며 공모전을 준비한 작가 지망생이지만 낯선 서울에서 지옥 같은 타인을 만나면서 극한의 감정으로 치닫는 인물. 임시완은 캐릭터의 감정을 섬세하고 입체적으로 그리며 극을 안정적으로 이끌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저는 윤종우를 착한 캐릭터로 만들고 싶지 않았어요. 캐릭터가 타인에 의해 변해간다고 해서 애초에 착할 필요는 없잖아요. 착한 인물이 나쁘게 변한다는 설정이 단조로울 것 같았거든요. 그래서 ‘착하다’ ‘나쁘다’의 갈림길에서 ‘나쁘다’에 가까운 캐릭터로 그리자고 마음먹었죠. 물론 연기하는 게 쉽진 않았어요. 인물이 점차 예민하게 변하는 흐름을 따라 연기하는 게 어려웠거든요. 이미 어두운 부분이 있는데 더 어둡게 표현하려면 다른 무언가가 있어야 했으니까요. 저 나름의 도전이었는데 쉽게 가려고 편한 방법을 선택하고 싶진 않았어요.”
극 중에서는 ‘에덴고시원’에 거주하는 이들이 타인을 거침없이 살해하거나 인육을 먹는 등의 장면이 등장한다. 사실적인 표현 때문에 일각에서는 ‘드라마를 보기 힘들다’는 반응이 나오고 윤종우 역을 맡은 임시완의 정신 건강을 걱정하는 반응도 나왔다.
“캐릭터 때문에 임시완이 보기 싫어진다는 반응도 있던데, 칭찬인 거죠?(웃음) 걱정과 달리 현장 분위기는 좋았어요. 감독님이 촬영장을 놀이터처럼 만들어주셨거든요. 작품 분위기가 무거워도 즐기면서 재미있게 촬영하자는 것이 감독님의 생각이었죠. 배우들이 현장에서 즐겁게 연기하며 시간을 보낼 수 있었는데, 그래서인지 어느 날은 우리 작품이 어떤 장르인지 잊게 되더라고요. 만약 감독님이 캐릭터에 깊게 몰입하지 말라는 주문을 하지 않았다면, 윤종우의 감정이 이입돼 회복하기 위한 과정이 필요했을 것 같아요.”
드라마의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고시원 세트장 또한 화제였다. 어두컴컴하고 지저분한 고시원의 모습이 보는 것만으로도 불쾌한 기분이 들게 했기 때문. 임시완 역시 감정을 이끌어내는 데 도움을 받긴 했지만 촬영이 진행되지 않을 땐 고시원 세트장에 들어가고 싶지 않을 정도였다고.
“저 역시 윤종우처럼 부산에서 서울로 상경해 20만원대의 고시텔에서 산 적이 있어요. 하지만 드라마 속 고시원과 달리 깔끔하고 조용한 곳이었죠. 제게는 희망적인 공간으로 기억되는 곳이에요. ‘새로운 시작’이라는 생각을 했었거든요.”
친구와 함께 좁은 단칸방에 앉아 페트병에 든 맥주를 종이컵에 따라 마시며 건설적인 이야기를 나눴다는 임시완은 당시 자신의 시야가 편협했었다고 회상했다.
“건설적인 이야기라고 거창하게 말했지만, 사실 꿈이 구체적이진 않았어요. 돈을 많이 벌어 좋은 집에서 살고 싶다는 꿈을 가졌었죠. 연습생 땐 돈을 벌지 못해 용돈을 받아 썼으니까 돈을 아끼려고 술안주로 1,000원짜리 튀김을 먹곤 했어요. 튀김을 사면 떡볶이가 조금 딸려 왔거든요. 당시엔 제가 이렇게 성장할 수 있을지 몰랐죠. 요즘엔 금전적인 부분보다 행복을 추구하는 편이에요.”
부산에서 서울로 상경해 고시텔에서 산 적이 있는데 제겐 희망적인 공간으로 기억되는 곳이에요.
당시 튀김을 사면 서비스로 떡볶이를 주는 분식집이 있었는데, 돈을 아끼려고 튀김을 사서 맥주를 마시곤 했어요.
종이컵에 따른 맥주로 건배를 하며 친구와 함께 새롭게 시작해 그려갈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했죠.
‘브로맨스’보다는 ‘로맨스’
임시완은 유독 ‘브로맨스’를 잘 살리는 배우다. <타인은 지옥이다>에서는 이동욱과, <미생>에서는 이성민과 호흡을 맞췄고 영화 <불한당>에서는 설경구와 함께했다. 실제 설경구와 그는 막역한 사이다. 설경구는 임시완의 제대를 기념해 그를 집으로 초대해 상다리가 휘어질 만큼의 진수성찬을 대접했단다. 설경구는 초대만 했을 뿐, 상차림은 송윤아가 맡았단다.
“‘브로맨스’를 잘하고 싶다는 욕심은 없는데 돌이켜보니 대다수 작품이 그렇더군요. 데뷔 후 10년 동안 로맨스나 멜로 장르에 출연한 적이 없어요. 일부러 배척한 것도 아닌데요. 제 기준과 회사의 관점을 취합해 작품을 선택하다 보니 그렇게 된 것 같아요. 그런데 로맨스 연기를 잘하고 싶다는 욕심이 가득해요. 언젠간 출연하겠죠.”
그러면서도 ‘브로맨스’를 통해 연기의 맛을 알았다고 이야기하는 그다. 영화 <변호인>에서 호흡을 맞춘 송강호의 도움이 있었다. 극 중 공안 사건에 연루된 ‘진우(임시완 분)’와 그의 변호인 ‘송우석(송강호 분)’이 접견실에서 만나는 장면에서 송강호가 그에게 연기 조언을 건넸는데, 그 순간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는 것.
“송강호 선배님의 말을 듣고 눈물이 쏟아지는데, 처음 해보는 경험이었어요. 연기의 매력을 알게 된 거죠. 그때부터 연기에 스파크가 튀었고 지향점을 찾게 됐어요.”
임시완은 성공한 ‘연기돌’ 중 하나다. 2010년 그룹 ‘제국의아이들’로 데뷔해 2012년 MBC 드라마 <해를 품은 달>로 연기를 시작한 후 드라마 <미생>과 <왕은 사랑한다>, 영화 <변호인> <불한당> 등을 통해 배우로서 존재감을 드러내면서 국내 영화계를 이끌 차세대 배우로 인정받고 있다. ‘아이돌 출신 배우’라는 수식어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할까?
“아이돌 출신이라는 꼬리표는 중요하지 않은 것 같아요. 아이돌 가수 활동을 하면서 배우들이 하지 못한 경험을 했으니까요. 군대에서도 아이돌 출신이었기 때문에 할 수 있었던 것이 있었고요. 요즘 아이돌 친구들을 보면 노래면 노래, 춤이면 춤, 연기면 연기까지 다 잘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한편으론 지금이 아닌, 더 이른 시기에 연기를 시작한 게 다행인 것 같아요. 제가 할 수 있는 것을 하나씩 해나가면서 배우고 있어요. <불한당> 이후엔 제안받는 캐릭터의 폭이 넓어진 것 같기도 하고요. 원래 스스로 몰아세우며 연기하는 편이었는데, <불한당> 때부터 어느 정도 느슨하게 했거든요. 이번엔 ‘연기를 좀 더 즐기면서 해야겠다’는 것을 더욱 느꼈고요. 시간이 흐를수록 저의 다양한 가능성을 봐주시는 것 같아 반가워요.”
위스키 즐기는 남자
어느덧 데뷔 10년 차에 접어든 임시완은 30대로 접어들었다. 20대 때는 도전보다 신중함을 택해 어려울 것 같은 작품은 거절했지만, 이젠 젊은 기운을 발산하고 싶다.
“20대 때는 캐릭터가 이해되지 않으면 연출자에게 직접 말했어요. 노련미 없이 직설적으로 이의를 제기했죠. 사실 제가 감정이 앞서면 말을 잘 못하거든요. 그런데 지금은 제 의견을 밀어붙이기보다는 연출자의 설명에 설득당할 마음의 준비를 하죠.”
감정을 혼자 삭이곤 한다는 그는 머리가 복잡할 땐 사색을 하며 정리하거나 스포츠를 즐긴다. 필라테스도 하고 여름엔 수상 레저나 수영 등을 즐긴다.
“운동과 스포츠를 구분하려고 해요. 운동은 외적인 모습과 건강을 위해 힘든 것을 참고 하는 것이고, 스포츠는 온전히 즐길 수 있는 것이죠. 운동하기 싫은 것은 저도 마찬가지예요. 그래도 다행인 건 제가 몸이 좋아야 할 것 같은 이미지가 아니라는 점이에요. 처음부터 근육질 몸매의 배우로 각인됐다면 얼마나 고달팠을까요. 그저 직업이라고 생각하고 좋은 사람들과 맛있는 음식을 먹고, 술을 마시며 삶을 윤택하게 살 수 있을 정도로만 운동을 해요.”
임시완은 최근 위스키를 즐기게 됐다. 취할 때까지 마시는 것은 좋아하지 않고 분위기를 돋우는 정도로 곁들이는 것을 즐긴다는 그는 건전한 음주 문화를 주변에 알리고 싶다고 이야기했다.
“예전엔 소주를 마셨는데 요즘엔 위스키를 스트레이트로 마셔요. 아로마·바닐라·피트·초콜릿·꽃 향 등 다양한 맛의 위스키를 알아가는 재미가 있더라고요. 저는 무작정 술을 많이 마시는 것은 좋지 않다고 생각해요. 술은 좋은 자리를 만드는 윤활유라고 여기거든요. 대화거리가 떨어질 때 어색한 분위기를 없애려고 건배를 하거나 ‘내가 마셨으니 너도 마셔야지’라며 술을 권하는 것은 바람직한 음주 문화가 아닌 것 같아요. 음주 문화가 각자 주량에 맞게 마시면서 대화를 나누는 건전한 취미가 되면 좋겠죠.”
집에서는 넷플릭스를 보거나 요리를 한다. 화려한 실력은 아니지만 인터넷에서 레시피를 찾아 먹고 싶은 음식을 만들어 먹으려고 한단다.
“군대에서 맛있게 먹었던 것을 해 먹어요. 다음 날 식단에 비엔나소시지조림이나 돼지고기김치볶음이 있으면 전날 밤부터 기다려졌어요. 평범한 메뉴인데 아무리 먹어도 질리지 않더군요. 그래서 전역하기 전에 취사병한테 레시피를 전수받았어요. 지난주에도 만들어 먹었는데 밥도둑이 따로 없어요.”
맛있는 음식을 먹고 운동을 하면서 평범한 일상을 보낸다는 임시완에게 MBC 예능 <나 혼자 산다>에 출연하면 재미있을 것 같다고 하자, 예능보단 연기하는 모습으로 대중을 만나고 싶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아직까진 예능보다 연기가 더 편해요. 인스타그램 계정을 만든 지도 얼마 되지 않았어요. SNS 활동에 크게 관심이 없는데 팬들과 소통하고 싶다는 마음으로 시작했거든요. 게시물을 자주 올리진 못하고 숙제를 하는 기분으로 하고 있어요. 음악에는 관심이 있어요. 군대에서도 ‘코노(코인 노래방)’에 자주 갔고, 코노에서 부르던 십센치(10cm)의 ‘콘서트’를 팬미팅에서 부르기도 했어요. 출연하는 작품의 OST에 참여하는 것도 좋고, 언젠가 싱글 앨범을 내고 싶어요.”
그는 요즘 ‘나는 타인에게 어떤 사람인가’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 <타인은 지옥이다>에 출연하면서 시작된 고민이다. 만약 극에서 윤종우의 여자친구 ‘민지은(김지은 분)’이 종우의 이야기를 좀 더 자세히 들어줬다면 종우가 에덴고시원의 사람들을 살해하는 지옥 같은 타인이 되지는 않았을 거란 생각 때문이다.
“종우가 지옥 같은 타인이 된 것이 누구의 잘못인지 생각해봤는데 지은의 잘못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종우가 유일하게 믿는 사람인 지은이 그에게 믿고 의지할 만한 존재가 됐다면 종우가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았을 것 같아요. 그렇게 생각하니 나는 주변 사람들에게 어떤 존재일지 고민되더라고요. 나는 누군가가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인지에 대해 생각하게 됐어요.”
그는 행복을 공유하는 사람이고 싶고, 현실에 안주하지 않으며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말했다. 임시완은 그렇게 조금 더 다채롭게 인생 2막을 시작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