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그렇게 다 가져가야만 속이 후련했냐”(영화 <해바라기> 중)라는 명대사를 탄생시키며 한국 연예계에 선 굵고 카리스마 넘치는 남자 배우로 기억되는 배우 김래원이 ‘보통 남자’로 돌아왔다.
김래원은 영화 <가장 보통의 연애>(이하 <가보연>)에서 이별의 후유증을 술로 달래고 미련에 허우적대며 지질하지만 순수하게 사랑하는 ‘재훈’으로 분했다. 그는 연애를 해본 이들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법한 미련과 후회, 분노, 부정을 오가는 이별의 과정을 생생하게 그려 관객에게 어린 시절 풋풋한 사랑을 하던 때를 떠오르게 한다. 그의 부드러운 눈빛과 코믹한 모습은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그 때문인지 현재 <가보연>은 누적 관객 수 150만 3,424명(10월 10일 기준)을 돌파하고 손익분기점을 넘기며 순항하고 있다.
나를 비운 영화
“재훈을 보면서 20대 초·중반의 연애가 생각났어요. 나이 들면서 사랑이나 연애 감정이 많이 무뎌졌거든요. 촬영하면서 ‘아, 저런 사랑이 있었지’라는 생각을 했죠. 사실 그동안 출연했던 로맨스극은 대부분 뽀얗고 예쁜 그림에 달콤한 음악이 더해진 것이 대다수라 판타지 같았거든요. 그런데 <가보연>은 그렇지 않아요. 남녀가 티격태격하거나 사랑을 키워가는 모습이 리얼하죠. 지인 중 하나는 영화를 보고 나서 시간이 지날수록 영화 속 장면들이 다시 떠오른다고 하더라고요.”
김래원이 연기한 재훈은 전 여자친구와 파혼하고 매일 숙취 속에 아침을 맞는 남자다. 이별의 아픔을 술로 달래다 옥수수, 비둘기 등 외로워 보이는 것들을 집으로 가져오는 버릇이 생겼고, 술김에 ‘뭐해?’ ‘자니?’ 등의 메시지를 보낸 후 아침에 머리를 쥐어뜯는다. 그러던 어느 날 취중 2시간 동안 통화한 상대가 친하지 않은 직장 동료 ‘선영(공효진 분)’이란 사실을 깨닫는다.
“재훈은 서툴고 엉성하지만 매력 있는 남자예요. ‘선영’에게 사람을 만나서 연애하고 손을 잡고 걸으며 행복하게 늙는 게 사랑이 아니냐고 말하는 순수한 남자죠. 그런데 사실 저는 재훈과 거리가 멀어요. 극에서 재훈은 취중에 통화한 상대가 누군지 알기 위해 전화번호를 저장해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을 보고, 선영이란 사실을 알고 그녀를 피해 다니잖아요. 그런데 저라면 그러지 않았을 거예요. 술에 취해 전화를 했다면 그 상대에게 전화를 걸어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실수를 했다고 사과했을 것 같아요.”
김래원은 자신과 성향이 다른 캐릭터의 행동이 공감되지 않아 상대역 선영을 맡은 배우 공효진과 김한결 감독을 비롯해 촬영 감독 등 스태프에게 재훈의 감정에 대해 묻곤 했다. 하지만 재훈을 안타깝다고 여기면서도 지질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재훈은 연애에 미숙했던 것 같아요. 괴로운 마음을 달래려고 술에 의지하다 보니 실수를 했고요. 그 모습을 보고 지질하다고 얘기하는 것 같은데, 단순히 전 여자친구를 많이 사랑했던 것 아닐까요? 재훈이 술로 마음을 달래다 보니 극 중 음주 신이 자주 등장해요. 제 모습을 본 지인들이 ‘정말 술을 마시고 연기한 거지?’라고 묻더군요. 그런데 100% 연기예요. 제가 오래전부터 술을 잘 마시지 않고 있거든요. 힘든 일이 있을 때 술을 마시면 잠시 잊는다거나 위로가 되지 않고 오히려 더 힘들어질 뿐이더라고요.”
김래원은 이번 영화에서 자신을 비우려고 노력했다. 이전까진 캐릭터를 이해하고 더 나은 작품을 만들기 위해 열정적으로 노력하며 애를 써왔다던 그다. 하지만 이번엔 시나리오의 설정을 조금씩 벗겨내려고 노력했다.
“평소보다 의견을 적극적으로 어필했어요. 저를 비우고 느끼는 대로 하려고 노력했죠. 지금까지 부딪히면서 제가 쌓아놓은 것을 무기로 여유 있게 해나가는 방법은 어떨까라는 기대를 했던 거죠. 전엔 더 완벽한 모습을 보여주려고 애썼는데 이젠 여유를 갖고 흐름에 맡기는 게 더 완벽해지는 방법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요. 저 혼자 작품을 만드는 게 아니니까요.”
김래원이 이전과 달리 자신을 내려놓을 수 있었던 것은 공효진 덕분이다. 로맨틱 코미디 장르에서는 남녀 배우의 호흡이 영화의 핵심인데, ‘로코 장인’이라 불리는 ‘공효진 효과’를 톡톡히 본 것.
“예전엔 ‘내가 잘할 수 있을까?’ ‘힘들 것 같은데’라는 생각이 든 작품에만 출연했어요. 대본을 읽으며 어떤 식으로 연기하면 되겠다고 감이 잡히는 작품은 대부분 출연하지 않았죠. 사실 <가보연>은 어떻게 연기할지 그림이 그려졌지만, 시나리오가 재미있었고 새로운 방식으로 연기를 해보고 싶었어요. 만약 영화에서 재훈이란 캐릭터가 매력적으로 보였다면 그건 공효진 덕분이에요. 제가 스스로 아쉽다고 느꼈던 장면이 있었는데 공효진의 호흡이 더해지니까 장면이 살아나더라고요.”
그만큼 공효진과의 호흡도 좋았다. 김래원은 공효진 같은 상대 배우를 만나는 것은 쉽지 않다며 공효진을 “묘한 매력이 있는 배우”라고 설명했다.
“시사회 때 공효진과 영화를 같이 봤는데, 긴장해서인지 제가 팝콘을 계속 먹었어요. 중간에 공효진이 ‘그만 좀 먹어’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저는 그냥 ‘알았어’라고 했죠. 그 순간 이런 모습이 그대로 영화에 담겼겠구나 싶더라고요. 우리 참 자연스러웠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오래 활동하다 보니 주목받고 사랑받는다고 우쭐하면 안 된다는 걸 알겠더군요. 그래서 작품으로 인기를 얻었다고 우쭐하지 않기 위해 낚시를 가요. 그렇게 몇 달 지내고 나면 금세 다른 작품과 배우가 사랑받고 있거든요. 평정심을 유지하는 저만의 방법이에요.
나의 전부, 낚시
김래원은 연기와 낚시가 자신의 전부라고 설명했다. 연예계 대표 낚시 마니아인 그는 5세 때 낚시 전문 잡지에 ‘낚시 신동’으로 소개되기도 했다. 지금도 1년 중 200일은 낚시, 165일은 촬영을 하며 지낸단다. 실력도 상당하다. 채널A <도시 어부>에서 이덕화가 낚시를 잘하는 후배로 김래원을 꼽기도.
“제가 원래 하나에 빠지면 푹 빠져요. 대학생 때 미팅도 하지 않고 낚시를 하러 가곤 했죠. 과거 사귀었던 여자친구 중 하나는 ‘내가 물고기한테 질투를 해야 돼?’라는 말을 한 적도 있어요. 낚시를 하러 가면 방해 요소를 차단하고 싶어 휴대폰 전원도 꺼놓고 낚시만 하거든요.”
그가 하는 낚시는 독특하다. 로프로 몸을 묶고 한 평만 한 절벽에 서서 낚시를 한다. 친구들도 그가 낚시하는 모습을 보고 혀를 내두른다고.
“아버지가 은어를 잡는 계류낚시의 명인이셨어요. 지금은 연세가 많아 활동하지 않지만 당시엔 국내 넘버원이셨죠. 아버지는 제가 낚시에 지나치게 빠질까 봐 낚시를 가르쳐주지 않았는데 피를 속일 순 없나 봐요. 처음엔 호수에서 붕어 낚시를 했고, 그러다 배 위에서 낚시를 했죠. 이젠 절벽 위에서 낚시를 하고 있어요.”
낚시를 할 땐 그 어느 때보다 철저하다. 망망대해에서 물고기를 잡는 어부만큼 물때를 알고, 수온과 바람을 따지며 낚시에 나선다. 물고기는 절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편의점도 없는 섬에 들어가서 45일 동안 머문 적도 있어요. 생필품과 식재료를 파는 곳이 없어 동네 어르신들이 갖고 계신 것을 사야 하는 곳이었죠. 태풍이 오면 등산을 가거나 방 안에서 쉬고, 날씨가 좋을 땐 낚시하러 나가면서 보냈어요. <롱 리브 더 킹>에 함께 출연한 최재환 배우가 낚시광인데, 저를 보더니 ‘형님, 저도 어지간히 비정상인데 형님은 저를 정상으로 만드는 분이에요’라고 하더군요. 요즘엔 자제 중이에요. 낚시를 하느라 얼굴이 너무 까매져서 소속사에서 걱정하더라고요.”
김래원은 제주도의 추자도, 전남 여수의 거문도, 전남 신안의 만재도와 태도, 전북 익산의 왕등도를 자연경관이 좋은 낚시 포인트로 추천했다. 모두 대한민국에 있는 섬이지만 유럽에 가는 시간만큼 오랜 시간 찾아가야 하는 곳들이다. 그만큼 멀기 때문에 간 김에 오래 있는데, 그가 세상과 단절된 채로 낚시에 몰두하는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오랫동안 연예계 활동을 하면서 좋을 때도 있고 나쁠 때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사랑받다가 어느 순간 잊히는 경험을 해봤으니까요. 주목받고 사랑받는다고 우쭐하면 안 된다는 걸 알겠더라고요. 그래서 드라마나 영화로 화제가 돼도 우쭐하지 않기 위해 낚시를 가요. 그렇게 몇 달을 지내면 금세 다른 작품과 배우가 사랑받고 있거든요. 평정심을 유지하는 저만의 방법이죠. 동시에 작품 속 인물에서 벗어나 ‘김래원’으로 돌아가기도 하고요.”
“이상형요? 이해심 많은 사람요”
바닷가 바위에서 자고 싶을 정도로 바다를 좋아한다는 김래원에게 운동을 비롯해 취미에 푹 빠진 남자는 여자들에게 인기가 없다고 하자 그 역시 걱정을 내비쳤다.
“낚시를 이렇게 좋아하는 남자를 누가 좋아하겠어요? 그래서 저도 많이 바뀌었어요. 항상 결혼 생각은 있었는데 마음처럼 되지 않았어요. 몇 년 전 명절에 할머님이 가족들에게 카드를 써주신 적이 있어요. ‘아이의 탄생을 축하한다’ ‘예쁜 가정을 꾸려라’ 같은 덕담이 적혀 있었는데, 제게 주신 카드엔 ‘만인의 연인이 되세요’라고 적혀 있더군요. 내심 섭섭했어요.”
김래원은 좋은 인연을 만나면 언제든지 결혼할 생각이 있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나이가 들고 경험이 늘면서 점점 더 결혼을 결심하는 게 어려워지는 것 같다고.
“어른들이 조금이라도 어리고 멋모를 때 결혼하라고 하시는 이유를 알 것 같아요. 나이가 한 살씩 더 들수록 고려하는 것이 많아져요. 이상형요? 무난한 스타일이 좋아요. 물론 저한테 모든 것을 맞춰야 한다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직업 특성상 제가 무난하지 않으니까요. 어머니가 제 성격이 특이해서 이해심이 많은 사람이 좋을 것 같다고 하셨는데 저도 동의해요. 한편으로 ‘나는 내가 원하는 만큼 상대방에게 훌륭한 사람일까?’라는 고민을 해요. 연애나 결혼이라는 게 서로 타협점을 찾아가는 과정이니까요.”
사랑에 대한 환상이 없다는 말도 더했다. 사랑한다고 모든 문제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기에 현실적인 부분을 고려한다고. 그러면서도 김래원은 영화 속 재훈처럼 ‘썸’을 타고 ‘밀당’을 하면서 연애 상대를 알아가는 스타일이기보단 한눈에 반하는 쪽에 가깝단다.
“제가 낚시를 좋아하니까 낚시가 취미인 여자를 만나라는 말을 많이 듣는데, 여자는 하기 어려운 게 낚시라서 실현되긴 힘들 것 같아요. 저는 자연스럽고 유한 사람이 좋아요. 예전엔 고집도 세고 자기주장이 확실했는데 나이 들고 보니 좋은 게 좋은 것이라는 걸 알겠더라고요. 그래서인지 주변과 조화되는 유한 스타일의 사람이 좋아지는 것 같아요. 연애한 지 오래돼 연애 세포가 죽어가고 있는 것 같긴 하지만 언젠간 좋은 짝을 만나겠죠?”
20대엔 조심스러운 연애를 했고, 그것이 특별하다고 여겼던 김래원은 지금은 편안한 연애를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마트에 들러 장을 보고, 줄을 서서 닭강정을 사 먹기도 한다는 김래원의 보통의 연애, 그리고 결혼이 기다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