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들은 으레 영화 개봉에 앞서 언론 매체와 릴레이 인터뷰를 한다. 그는 최근 기자가 만난 가장 근사한 인터뷰이였다. 유쾌하고 솔직하며 무던하고 담백했다. 이 모든 것이 확고한 소신에 기반했다. 스페셜한 연기력만 봐도 보통의 내공이 아닐 거라 예상했지만, 그 이상이었다. 적절한 비유와 그 전반에 깔려 있는 유머러스함은 주변의 공기를 부드럽게 만들었다.
성동일(52세). tvN 드라마 <응답하라> 시리즈를 연달아 히트하면서 '국민 아빠'로 등극했다. 그러고 보면 그의 연기엔 별다른 '장치'가 없다. 실제로 그것이 그의 연기 철학이기도 한데, 그는 특별할 것 없이 그저 대본대로 배역을 녹여낼 뿐이라고 했다. 인터뷰도 마찬가지다. 더하지도 빼지도 않고, 그저 자신을 말할 뿐이다.
그가 데뷔 후 처음으로 공포 영화에 도전했다. 영화 <변신>은 사람의 모습으로 변신하는 악마가 가족 안에 숨어들며 벌어지는 기이하고 섬뜩한 사건을 그린 공포 스릴러 영화다. 영화 <기술자들> <공모자들>을 연출한 김홍선 감독의 신작이며, 배성우와 함께 출연한다. 극 중 성동일은 가족 구성원의 모습을 하고 가족 안에 숨어든 악마 때문에 사랑하는 가족을 의심하게 되는 가장 '강구' 역을 맡았다.
주연배우로서 완성된 영화를 본 소감은 어떤지요?
가장 익숙한 공간인 '집'에서, 가장 익숙한 '가족'이 악마라는 모티브가 재미있었어요. 친숙함이 가장 무섭잖아요. 감독님이 그런 말을 했어요. 사람이 가장 무섭다고요. 그걸 느낄 수 있는 영화예요.
그러고 보면 첫 공포 영화 출연이죠?
결과물이 공포이지 현장은 코미디였어요.(웃음) 저는 배역을 선택하는 것에 대해 기준이 없어요. 연기자라기보다 기술자라고 생각하는 쪽이거든요. 특별히 선호하는 역할도, 싫어하는 역할도 없죠. "요즘 왜 액션 영화에만 출연하세요?"라는 말을 종종 듣는데, 섭외가 오니까 하는 거예요. 나이 한 살 더 먹기 전에 주먹 좀 흔드는 거 해보자 싶은 거죠. 저는 훌륭한 배우보다 훌륭한 가장 혹은 남편이라는 소리가 더 좋아요. 솔직히 말해 훌륭한 연기자도 아닌 것 같고요. 물론 배우는 내 직업이니까 최선을 다합니다.
'기술자'라는 정의가 오히려 프로페셔널하게 들려요.
저는 아내의 "여보 사랑해", 자식들의 "아빠 사랑해"라는 말이 세상에서 가장 듣기 좋아요. 물론 연기 잘했다고 상 주고 칭찬해주면 좋지요. 한데 굳이 꼽으라면 전자가 더 좋다는 거예요. 그래서 일도 많이 합니다. <변신>을 끝내놓고 곧바로 다음 영화에 들어갔고, 줄줄이 찍고 있어요. 주위에선 언제 쉬냐고 하는데, 죽어서 쉬면 되죠, 뭐. 가족을 위해서 일하는 게 제 행복이거든요. 아, 첫 공포 영화 출연, 맞아요. 그런데 큰 의미는 없어요. 직업이 목수면 양옥이든 한옥이든 창고든 경계 없이 다 지어야죠. 그게 목수죠. 주변 사람들은 저에게 작품을 안 가리냐고 하는데 그게 제 신조예요. 기술자라니까요.
'배우'라는 직업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세상에서 가장 좋은 직업이죠. 영화를 찍으면 먹여주고 재워주고 돈까지 줍니다. 연기가 부족하면 감독님이 가르쳐주기도 해요. 그래서 전 현장에 나가면 행복해요. 짜증 낼 일이 없어요. 그 많은 스태프가 나를 배우로 만들어주려고 노력하는 걸 보면 눈물 나게 고맙죠. 그래서 스태프와 소주 한잔 기울이는 게 제 낙입니다.
훌륭한 배우가 아니라고 말했지만, 이 정도면 훌륭한 배우인데요.
후배 배우들에게 사람을 많이 만나라고 해요. 연기라는 게 국·영·수처럼 사교육을 받는다고 느는 게 아니거든요. "선배님, 시간 되면 소주 한잔해요"라고 할 게 아니라 시간 내서 만나야죠. 기자님도 저를 시간 내서 인터뷰하러 온 거잖아요. 서울역 앞 노숙자들도 시간 내서 거기 앉아 있는 거예요. 싫은 사람도 만나고, 좋은 사람은 더 자주 보며 느끼고 경험해야 좋은 연기가 나옵니다. 배우라는 직업이 그런 것 같아요.
뜬금없는 질문이지만, 배역을 거절할 땐 어떻게 하나요?
일단 제게 도착한 시나리오는 다 읽어요. 거절할 때는 반드시 술자리를 만들어 얼굴을 보고 거절합니다. 전화로 하지 않아요. 저를 먹고 살게끔 해주는 분들인데 적어도 감사의 인사는 해야죠. 거절하는 이유요? 간단해요. 그 역할을 하기에 내가 부족하다고 느낄 땐 당연히 거절해야 마땅하죠. 목수로 치면 가진 게 망치밖에 없을 때 거절하고, 연장이 많으면 승낙합니다.
배우에게 중요한 덕목이 뭐라고 생각하나요?
저는 도태되지 않고, 무위도식하지 않고, 오랜 시간 꾸준히 활동하는 배우이고 싶어요. 그리고 즐기는 배우이고 싶고요. 그래서 스스로 기술자라고 말하는 거예요. 후배들에게도 그래요. 쉬지 말고 일해라. 어떤 후배는 그래요. "선배님, 저 이번 역할이 너무 마음에 들어요." 그럼 평생 그 역할밖에 못 해요. 벗어나지 못하는 거죠. 전 연극할 때부터 빨래하기가 너무 싫어 어두운색 옷만 입었어요. 그게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죠. 그런데 결혼하고 나니 아내가 밝은색 옷을 입혀주는 거예요. 처음엔 질색했는데 입다 보니 잘 어울리더라고요. 배우도 그런 것 같아요. 쉬지 말고 닥치는 대로 일해봐야 인생도 알고 재미도 알지요.
훌륭한 배우는 어떤 배우일까요?
사람을 다스릴 줄 아는 배우, 스스로를 버릴 줄 아는 배우요. 한 영화가 탄생되기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립니까. 감독이 수년에 걸쳐 시나리오를 쓰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투자도 받고 배우도 만나죠. 그 기간 동안 감독은 시나리오를 수백 번 읽고 고치고를 반복할 거예요. 그래서 전 어지간하면 감독에게 대들지 않아요. 시나리오를 3~4년 준비한 사람을 누가 이겨요. A백화점에 갔는데 예쁜 가구가 있어요. B백화점에 가보니 또 예쁜 가구가 있어요. 둘 다 예쁘지만 모아놓으면 따로 놀죠. 한집에 들어갈 가구니 어지간하면 한곳에서 사는 게 맞아요. 그 역할을 감독이 하는 겁니다. 감독만이 그 역할을 할 수 있어요.
김홍선 감독의 전작에도 출연했어요. 연이어 김 감독과 함께 작업하는 이유가 있나요?
김 감독은 일에 미친 사람이에요. 게다가 마음도 착해요. 예의 바르고 의리도 있죠. 해병대 출신이라 술도 잘 마셔요. 소맥을 그냥 쏟아붓는 스타일인데, 놀랍게도 촬영에 들어가면 개봉할 때까지 술을 일절 마시지 않아요. 물론 꼬셔봤죠. 안 넘어와요. 그래봤자 맥주 몇 모금 정도? 그렇게 영화에 미친 사람이에요. 더 이상 뭐가 더 필요합니까.
전 배역을 선택하는 것에 대해 기준이 없어요. 연기자라기보다 기술자라고 생각하는 쪽이거든요.
특별히 선호하는 역할도, 싫어하는 역할도 없죠.
직업이 목수면 양옥이든 한옥이든 창고든 경계 없이 다 지어야죠. 그게 목수죠.
주변 사람들은 저에게 작품을 안 가리냐고 하는데 그게 제 신조예요. 기술자라니까요.
<응답하라> 시리즈도 그렇지만 '서민' '아버지' '중년 남편'을 대표하는 얼굴입니다. 하지만 그 안에서 늘 변주하는데, 비결이 뭔가요?
시나리오가 중요합니다. 이번 역할만 해도 그래요. 제게 온 배역이 '강구'이지 성동일이 강구는 아니거든요. <응답하라>에서는 서민적인 아빠 역할이 제게 온 거죠. 그래서 변주할 수 있었던 거예요. 예를 들어, 공포 영화인 <변신>에서 제가 망치 들고 달려가면 무섭지만, 그 장면을 <응답하라>에서 했다면 웃겼을 겁니다. 그래서 전 시나리오를 믿고 감독을 믿어요. 작품의 톤이 저를 결정하지, 제가 잘해서 변주하는 건 아니라는 거죠. 성동일이 뭐 그리 대단한 배우라고요.
배성우 씨와는 영화 <안시성>, 드라마 <라이브>에서 연이어 함께 작품을 하네요.
그 친구는 화면이나 실제나 똑같아요. 연극을 했던 친구라 남을 배려하는 게 몸에 베어 있고, 주변을 밝게 만드는 에너지를 지녔죠. 그래서 전 성우와 뭔가를 하자고 하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합니다. 그런 친구예요. 눈을 보고 대사를 하고, 멋 부리지 않고 연기를 하는데, 그것도 너무 좋고요. 성우는 사람도 좋아하고 술도 좋아해요. 아직 싱글이라 제가 술이 고플 때 부르기 딱 좋은 친구이기도 하죠.(웃음)
오늘 술 얘기가 꽤 많이 나옵니다.(웃음)
영화에 들어간다고 치면, 촬영 5회 차까지는 배우도 감독도 어색해요. 그래서 감독도 배우의 부족한 연기를 지적하기 쉽지 않죠. 한 10회 차쯤 되면 어색함이 어느 정도 사라지는데, 그 시간을 줄이는 게 중요해요. 영화라는 게 큰돈을 들여 하는 작업 아닙니까. 빨리 친해져 감정 소통이 돼야 연기로 드러나죠. 그래서 전 촬영 시작 무렵 일주일 내내 스태프와 술을 마시기도 하고, 단합 대회를 주선하기도 해요. 이번에도 1박 2일로 단합의 장을 마련했어요.(웃음) 족구도 하고 술도 마시고 해장도 같이하고 말이죠. 근사한 카페에서 에스프레소 마시며 대화한다고 빨리 친해지겠어요?
동료 배우들과 집에서도 술을 자주 마신다고 들었어요.
2차로 맥줏집에 가면 새벽 2시쯤 되는데, 대부분 문을 닫을 시간이잖아요. 그러면 술을 사서 집으로 가죠. 아내는 대수롭지 않게 안주 몇 가지 슬쩍 내주고 다시 자요. 이렇게 술을 마시다가 누구 하나 꾸벅 조는 사람이 있으면 미련 없이 자리를 마무리합니다 "자, 이게 막잔!" 하고요. 이렇게 말하니 미친놈처럼 주야장천 술만 마시는 줄 아는데 저도 양심이 있죠. 30%는 일에 대해 얘기하면서 마셔요. 촬영감독, 조명감독, 배우들과 내일 촬영에 대해 이런저런 얘기를 하며 마십니다. 워밍업을 한 셈이니 그 얘기를 기반으로 각자 자기 분야에서 풀 세팅을 해놓는 거죠. 촬영이 수월해져요. 남의 돈 100억을 투자 받아서 만드는 작품인데. 최선을 다해야죠.
올해는 유독 영화만 연이어 하는 것 같아요.
지난해엔 드라마 위주로, 올해는 영화 위주로 하고 있어요. 내년엔 영화와 드라마를 모두 할 생각이에요. 드라마를 너무 안 하면 대중은 제 신변에 이상이 있는 줄 알더라고요. 영화와 드라마는 연기하는 방법이 조금 달라요. 그 감을 놓치는 게 싫어 의식적으로 번갈아가며 하는 편이에요. 드라마는 호흡이 긴 연기를, 영화는 함축적인 연기를 해야 하죠. 환경도 완전히 달라요. 지방에서 촬영한다고 치면, 드라마는 출연료 안에 방값, 밥값이 다 포함돼 있어 각자 알아서 해결하죠. 반면에 영화는 다 같이 움직입니다. 우르르 몰려다니는 재미가 있죠.
그러고 보면 행복한 배우네요. 하고 싶은 것을 선택할 수 있는 배우니까요.
소원 풀었죠.(웃음) 저도 무명 시절이 길었어요. 언젠가 어느 유명 배우가 밴에서 컵라면을 먹고 있는 걸 우연히 봤어요. 얼마나 바쁘기에 차에서 컵라면을 먹을까, 오히려 부러웠어요. 바쁜 게 부럽더라고요. 근데 내가 그렇게 됐잖아요. 그럼 군말 없이 일해야죠. 밤새워 일하는 게 소원인데, 그걸 이뤘잖아요. 열심히 해야죠. 그래서 전 진짜 행복합니다.
집에서는 어떤 남편인가요?
저희 부부는 '분야'가 정확히 나뉘어 있어요. 아내는 아이 3명을 전담해 케어하죠. 기름값이 저보다 더 많이 나올 정도니 대충 알 만하죠? 반면에 저는 그런 가족을 위해 열심히 일합니다.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아요. 일단 저희 집에는 TV가 없어요. 아내도 주변 사람들을 통해 제 작품 근황을 들을 정도로 제 일에 관심이 없어요.(웃음) 잘하겠거니 믿어주는 거죠. 대신 주말엔 아이들과 여행을 가거나 공연을 봐요. 가정적이라고요? 평소에 가정적이지 않으니 그렇게 하는 거예요.
TV가 없는 건 아이들 교육 때문인가요?
가족 모두를 위해서죠. 좋은 점은 가족 간에 대화를 많이 하게 돼요. 나쁜 점은 그 과정에서 아이들끼리 말다툼이 잦다는 거예요.(웃음) 그럼에도 이야기하고 사는 게 낫지 않나요? 촬영이 일찍 끝나거나 일이 없으면 집사람과 종종 맥주를 마시고, 아이들은 방에서 소곤소곤 책을 읽죠. TV가 없으니까 가능한 풍경이에요.
그의 꿈은 담백하다. 건강하게 오래 사는 것. 세 아이가 멋있게 자랐으면 하는 바람도 있다. 첫째 준이에게 종종 이런 말을 한다. "아빠는 네가 국·영·수를 좀 못해도 남자답고 멋있으면 좋겠어. 어디 가서 이름 석 자 말하는 게 부끄럽지 않은 사람 말이야."
"누군가 그런 질문을 한 적이 있어요. 과거로 돌아가면 언제로 돌아가고 싶냐고요. 입을 찢어버린다고 했어요.(웃음) 전 내일도 싫고 어제도 싫고, 지금이 제일 좋거든요."
올해 나이 52세. 연기 경력 25년. 세 아이의 아빠이자 대한민국 대표 배우 성동일의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