립스틱 바른 남자, 마스카라 하는 남자
립스틱을 바르거나 양 볼에 블러셔를 바르고 아이섀도까지 풀 메이크업을 한 남자 아이돌의 모습이 더 이상 낯설지 않다. 젠더리스 트렌드는 아마도 최근 몇 년간 페미니스트, 성소수자, 성차별 등과 같은 키워드가 이슈화되면서 성에 대한 고정관념은 줄어들고 성을 구별 짓지 않는 남녀평등, 성 중립적인 의식이 자리 잡으면서 시작됐을 것이다. 이에 따라 자연스럽게 트렌드에 민감한 뷰티업계에서는 성을 구별 짓지 않는 남녀 공용의 제품을 선보이고 있고 이와 같이 성별 경계가 없는 남녀 공용의 뷰티 브랜드와 제품을 우리는 '젠더리스 뷰티'라고 부른다.
미국 방송 CNN에서는 "한국 남성, 세계 뷰티 시장 이끌고 있다"와 같은 타이틀의 뉴스를 소개 했을 정도. 그 외에도 '남성 1인당 화장품 구매액 한국 1위' '글로벌 남성 뷰티 시장, 한국이 가장 커' '전 세계에서 '한국 남자'가 화장품에 제일 돈 많이 쓴다'와 같은 뉴스 기사들은 한국에 화장하는 남자가 많아짐은 물론, 남성의 뷰티 제품에 대한 관심과 소비가 눈에 띄게 성장했다는 것을 증명한다. 특히, 유럽이나 미국 시장에 비해 한국 시장에서 남성의 1인당 평균 뷰티 관련 제품 소비량이 무려 10배나 차이 난다고 하니 국내외에 젠더리스 뷰티 브랜드가 탄생하는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시장조사 기관 민텔(Mintel)이 지난해 글로벌 트렌드로 '성 중립적인 뷰티'를 예측한 것도 인상적이다. "소비자들은 성별에 대한 전통적인 고정관념과 기대에서 멀어지고 있으며 브랜드는 신제품 개발 및 마케팅 캠페인 전면에 성 중립적인(젠더리스) 메시지를 전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이렇듯 성별을 철저하게 구분하던 뷰티 시장은 빠른 속도로 변화해 더 이상 립스틱이 여자만의 전유물이 아닌 시대가 됐다. 성별 구분 없이 남녀가 함께 사용할 수 있는 에센스, 미스트, 파운데이션, 블러셔, 립스틱, 향수 등이 대거 출시되고, 특정 성별을 위한 브랜드가 아닌 남녀 모두를 위한 젠더리스 브랜드가 탄생하고, 색조 전문 브랜드의 뮤즈로 남자 아이돌 스타가 모델로 활약하는 등 '젠더리스 뷰티'의 바람이 활기차게 불고 있다.
남과 여, 우리 모두를 위한 젠더리스 뷰티
젠더리스 뷰티를 떠올렸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아무래도 우리에게 가장 친숙한 호주의 '이솝'이란 브랜드가 아닐까. 제품 패키지는 물론 매장의 디스플레이, 제품의 향 모두 여성 또는 남성을 위한 것이 아닌, 우리 모두를 위한 향과 제품임을 단박에 느낄 수 있으니 말이다. "우리는 패키징이 아닌, 제품을 통해 고객에게 즐거움을 제공한다. 최고 품질의 스킨, 헤어 그리고 보디 제품을 만드는 것만이 변함없는 이솝의 목표다." 이솝의 창립자 데니스 파피티스의 말이다. 이솝이 가장 중요시하는 건 젠더리스 뷰티, '모두를 위한 제품'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모든 인간을 위한 브랜드(The Brand For All Human)'라는 슬로건 아래 젠더리스 뷰티 시장에 발을 들인 '논 젠더 스페시픽(Non Gender Specific™)'이란 해외 브랜드도 주목할 만하다. 내용물이 훤히 보이는 투명 보틀에 브랜드명, 제품명, 주요 성분과 같은 기본적인 정보만을 담은 디자인은 심플하다 못해 심심하기까지 하다. 에브리띵 세럼, 에브리띵 클렌저와 같이 선보이는 제품명에서도 여자를 위한, 또는 남자를 위한과 같은 성별을 전혀 알 수 없다. 이뿐만 아니다. 브랜드의 공식 SNS 계정을 봐도 남성이나 여성 모델은 찾아볼 수 없어 오직 '모두가 사용할 수 있는 제품력'으로만 승부를 보겠다는 의지가 엿보인다.
미국의 브랜드 '릴랜드 프랜시스(Leland Francis)'도 마찬가지. '유니섹스이며 모든 피부 타입에 적합한 브랜드로 가장 훌륭한 재료를 사용해 보다 젊은 당신을 위한 제품을 선보이는 브랜드'라고 자신들을 소개한다. 그들이 선보이는 제품 역시 남녀 함께 사용할 수 있는 클렌징 젤, 페이셜&보디 비누, 립&아이 크림, 페이스 오일로 구성돼 있다.
국내에서도 젠더리스 뷰티의 흐름을 읽을 수 있다. 공간 디자이너 양태오가 선보인 전통 한의학에 기초한 천연 성분을 기반으로 중성적인 패키지의 '이스 라이브러리'가 바로 그것. 중성적인 마스크의 남녀 모델이 동일한 제품을 사용하는 이스 라이브러리의 메인 영상을 보면 '남녀 모두를 위한 뷰티 브랜드'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스 라이브러리는 말한다. "건강함을 되찾아 아름다움을 깨우는 것은 여자를 위한 것도, 남자를 위한 것도 아닌 우리 모두가 바라는 일"이라고 말이다.
스킨케어는 물론 색조, 보디 제품까지 다양한 젠더리스 뷰티 시장
젠더리스 뷰티 브랜드와 아이템은 스킨케어에 국한되지 않는다. 남자와 여자의 손에 들린 마스카라와 'Share The Beauty'라는 문구가 적힌 뷰티 광고 컷이 인상적인데, 이는 글로벌 브랜드 '지방시 뷰티'의 마스카라 광고다. 그 밖에도 미국의 '밀크 메이크업(Milk makeup)' 'Makeup has no gender'라는 모토를 지닌 영국의 '제카(Jecca)', 'Makeup for him, her, them, everyone'이란 모토의 미국 브랜드 '플루이드(Fluide)' '톰포드' '딥티크' '르라보' 등이 젠더리스 뷰티 트렌드에 발맞춰 모두를 위한 뷰티 아이템을 선보이고 있다.
국내에는 남녀가 동일한 제품, 동일한 컬러를 바르고 등장해 성별 구별 없이 적용되는 메이크업 룩을 제안하는 브랜드 '라카(LaKa)'가 눈에 띈다. 남녀 모델이 메이크업 트렌드를 함께 제안하며 실용적인 패키지로 모두를 위한 스타일과 트렌드를 소개하는 것이 이 브랜드의 모토. 이 밖에도 남자 아이돌을 뷰티 모델로 내세워 성별 경계 없는 파운데이션, 립스틱, 아이섀도를 선보이는 '릴리바이레드' '세븐피엠'도 있다.
'에스쁘아'도 다양한 피부 톤, 스타일, 성별의 모델을 앞세워 '있는 그대로의 나'를 메시지로 내세우며 젠더리스 뷰티 트렌드에 발맞춰 나가는 중이다. 이처럼 국내외 뷰티 시장의 흐름을 살펴보면 특정 성별을 위한 뷰티 브랜드와 제품은 더 이상 진보적이지 않다. 남녀 성별 구분 없이 모두의 건강한 피부를 위한 제품력과 진정성으로 승부를 보는 브랜드와 제품이 더 많아지기를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