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O, 게임중독에 질병 코드 ‘6C51’ 의결
‘6C51’ 코드가 부여된 게임중독은 정신적·행동적 신경발달 장애 영역에 하위 항목으로 포함됐다. 게임 통제 능력을 잃고 다른 일상생활보다 게임을 중요하게 여기며 이러한 부정적인 결과에도 불구하고 게임을 지속하는 게 12개월 이상 지속되면 게임중독으로 판단할 수 있다.
1990년 ICD-10이 나온 지 30년 만에 개정된 ICD-11은 원칙적으로 194개 WHO 회원국에서 2022년부터 적용된다. 게임중독뿐 아니라 음란물에 과도하게 집착하는 섹스중독, 물건을 버리지 못하는 강박 증상, 수감 상태에서 일어나는 변화 등도 새롭게 질병 코드가 부여됐다.
게임 전문 매체와 연합뉴스, 외신 등에 따르면, 앞서 총회가 열리기 하루 전인 5월 27일 유럽, 영국, 미국,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한국, 남아공, 브라질 등 전 세계 게임산업협회·단체 9곳은 공동 성명을 내고 WHO 회원국에 “국제질병분류 11차 개정안에 ‘게임이용장애’를 포함하는 결정을 재고해달라”고 촉구했다.
이들은 “전 세계 게임산업협회와 단체들은 WHO가 학계의 동의 없이 결론에 도달한 것을 우려하고 있다”며 “이번 조치는 막대한 영향력을 지녀 의도치 않은 결과를 부를 수 있고, 실질적으로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위해를 가져올 수 있다”고 우려했다. 이어 “전 세계 게임업계는 각종 정보 및 도구를 제공함으로써 건전한 게임 이용을 장려한다”며 “안전하고 합리적인 게임 이용은 우리 삶에 좋은 영향을 미치는 다른 가치들과 동일하다. 절제와 올바른 균형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152조 규모 글로벌 게임산업계 직격탄
한국콘텐츠진흥원에 따르면, 지난해 글로벌 게임산업의 규모는 152조원이 넘는다. 국내만 놓고 보면 이미 지난 2015년 10조원 규모를 돌파했고, 지속적인 성장으로 2017년에는 13조 1,400억원을 넘어섰다. 한마디로 돈이 되는 산업인 게임이 ‘질병’이라는 직격탄을 맞으면서 직·간접적으로 게임산업 전체가 위축될 수밖에 없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당장 국내 게임계가 반발하고 나섰다. 한국게임학회, 한국게임산업협회 등 협회·단체 56개와 경희대·중앙대 등 대학 관련 학과 33개는 5월 29일 국회의원회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WHO의 게임이용장애 질병 코드 도입 반대를 위한 공동대책위원회(이하 ‘공대위’)를 출범했다.
공대위는 WHO의 게임이용장애 질병 코드 도입으로 인해 게임문화와 게임산업이 심각한 위기에 직면했다며 기자회견장에 ‘게임문화 게임산업 근조’ 현수막을 걸고, ‘게임’ 영정 사진을 들고 나왔다. 검은색 양복을 차려입고 읽은 애도사에서 공대위는 “게임은 소중한 문화이며 4차산업혁명을 여는 창임에도 현대판 마녀사냥의 희생양이 되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어 “정부가 사회적인 합의 없이 한국표준질병분류(KCD) 개정·도입을 강행할 시 법적 대응을 검토하겠다”며 “앞으로 보건복지부 장관 항의 방문과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위원장·국회의장 면담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아울러 “게임중독 질병 코드에 맞설 파워 블로거(게임스파르타) 300인을 조직하고 온·오프라인 범국민 게임 촛불운동을 벌일 것”이라고 덧붙였다. 공대위는 이와 함께 게임중독 질병 코드 관련 국내외 공동 연구를 추진하고 청와대 국민청원 제기도 검토하기로 했다.
한국게임개발자협회, 한국인디게임협회, 넥슨 노동조합, 스마일게이트 노동조합, 스마트폰게임개발자그룹 등 5개 게임업계 종사자 단체도 6월 10일 보건복지부와 의학계의 게임중독 질병 코드 국내 도입에 반대한다는 내용의 성명을 냈다.
이들은 “게임 행위와 중독 간 인과 요인에 대한 의약학 연구와 사회과학 연구가 매우 부족하다”며 “학계 내의 합의조차 부족한 중독정신의학계의 일방적인 주장에 동의할 수 없다. 의료 현장의 혼란과 불필요한 사회적 비용 낭비가 우려된다”고 주장했다. 이어 “게임은 건전한 놀이이자 영화나 TV, 인터넷, 쇼핑 같은 취미 중 하나”라며 “개인의 건전한 놀이나 취미 활동이 과하다고 질병으로 취급하면 제2, 제3의 게임중독 질병 코드가 개인의 취미 생활을 제약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이들 단체는 “전체 국민 중 67%가 이용하는 게임은 사회 공익적인 측면이 있다”며 “게임업계가 스스로 건전하고 합리적인 게임 내 소비문화를 정착시킬 수 있도록 종사자들도 게임 제작 현장에서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의료계, 게임계 우려 불구 ‘찬성’ 입장
반면, 의료계는 게임중독에 질병 코드를 도입하는 것에 찬성한다는 입장이다. 보건의학 단체들은 지난 6월 10일 WHO가 ‘게임이용장애(Gaming disorder)’를 새로운 국제질병분류체계에 포함한 것을 지지한다는 뜻을 밝혔다.
대한소아청소년과학회, 대한신경정신의학회, 대한예방의학회, 대한정신건강의학과의사회, 한국역학회 등 보건의학 5개 학회로 구성된 이들은 게임이용장애의 질병 분류에 대해 “그동안 축적된 게임의 중독적 사용에 따른 기능 손상에 대한 건강 서비스 요구를 반영한 적절한 결정”이라며 “WHO 총회에서 국제질병분류체계 11판(ICD-11)이 만장일치로 승인된 것을 지지한다”고 성명을 냈다.
이어 “게임업계와 일부 정부 부처 등이 본질과 무관하게 ‘게임과 게임산업 전반의 가치에 대한 찬반’이라는 과장된 흑백논리에 근거한 소모적 공방을 주도하고 있다”며 “무모한 비방은 즉각 중단돼야 한다”고 촉구했다.
게임이용장애는 도박장애, 알코올사용장애와 같이 뇌 도파민 회로의 기능 이상을 동반하며 심각한 일상생활 기능의 장애를 초래하는 실제 존재하는 질병이라는 게 5개 학회의 공통된 지적이다. 특히, 두뇌 발달 과정에 있는 소아·청소년기는 이러한 중독 문제로 인해 언어 발달, 학업, 놀이, 교우관계에서 균형 잡힌 성장과 발달이 저해되는 폐해가 크다고 우려했다.
또 게임이용장애를 질병으로 분류했다고 해서 게임 이용자를 모두 환자로 보는 것은 아니라고 선을 그었다. 이들은 “게임이용장애는 복합적 요인에 의해 발생하는 정신행동장애 상태를 지칭한다”며 “대다수의 건강한 게임 사용자를 잠재적 환자로 낙인찍는 것은 아니다”라고 설명했다.
이어 “최근 WHO 결정에 대한 비판은 왜곡된 사실관계와 극단적 과장”이라며 “이미 게임이용장애에 관한 50여 개의 장기 추적 연구와 1,000편 이상의 뇌 기능 연구 등 확고한 과학적 근거가 나와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왜곡된 주장으로) 의학적 도움을 필수로 하는 다수의 게임이용장애 당사자와 가족이 치료의 기회를 놓치고 증상이 더욱 악화하지 않을까 심히 우려스럽다”고 덧붙였다.
일반 국민을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에서도 찬성하는 비율이 반대하는 비율에 비해 높게 나타났다. 바른미래당의 싱크탱크 바른미래연구원이 지난 5월 31일∼6월 1일 전국 19세 이상 성인 남녀 1,013명을 대상으로 게임중독 질병 분류에 대한 여론을 조사한 결과, 응답자의 53.6%가 찬성하고 40.6%가 반대한 것으로 나타났다.
정부, 이견 드러낸 부처에 ‘신중’ 주문
정부와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은 이와 관련한 법·제도 정비 논의에 착수했다. 정부는 이 권고의 효력이 발생하는 2022년부터 게임중독에 대한 정책을 펴게 된다.
WHO의 결정에 대해 게임 이용의 부작용을 최소화하려는 교육부, 보건복지부, 여성가족부는 환영했으나, 국내 게임산업을 진흥시키려는 문화체육관광부,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난색을 보인다. 민주당은 부처 간 갈등의 조짐을 우려하면서도 일단 국회 상임위별로 의견을 모을 계획이다. 아직 WHO 권고사항이 발효되기까지 충분한 시간(3년)이 남은 만큼 섣불리 방향을 정하기보다 추후 이견 조율을 위한 기초 작업에 공을 들여야 한다는 판단 때문일 것이다.
앞서 이낙연 국무총리는 게임중독에 질병 코드가 부여된 당일, 총리실 간부회의에서 “국내에서는 기대와 우려가 동시에 나온다”며 “충분한 논의를 통해 건전한 게임 이용 문화를 정착시키면서 게임산업을 발전시키는 지혜로운 해결 방안을 찾을 것”이라고 말했다. 통상 공개하지 않는 간부회의 발언을 공개한 것은 부처 간 이견으로 인한 혼란을 최소화하려는 의도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