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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레전드 계은숙

베란다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차들이 쌩쌩 달린다. 나만 그 자리에 있는 기분이다. 세상과 맞설 자신이 없어 숨어 지낸 지난 10여 년. 한류의 원조, 엔카의 여왕, 레전드 계은숙. 그녀가 세상 밖으로 나왔다.

On July 08,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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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인생은 구슬프다. '굴곡지다'라는 표현으로는 부족하다. 애잔하고 쓸쓸하다. 18살에 '노래하며 춤추며'로 데뷔해 신인상을 거머쥐고 톱 가수가 된 소녀. 승승장구하던 시절, 한 남자를 만나면서 그녀의 인생은 뜻하지 않게 흘러갔다. 사랑하던 사람에게 상처받고 도망치듯 일본으로 떠난 것이다. 그때 나이 고작 23살. 낯선 땅에서 신인상을 받았고, 고이즈미 일본 전 총리가 팬클럽 회원일 정도로 정상에 우뚝 섰지만 그녀는 외로웠다. 태어나면서부터 외로움이 곁에 있었던 사람처럼 지독하게 외로웠다. 그럴수록 노래하고, 또 노래했다.

무대를 내려오면 사무치게 외로웠다. 화려했지만 조금씩 병들어갔다. 그녀는 어둡고 긴 터널 속으로 하염없이 빠져들어갔다. 스스로를 사랑하는 법을 몰랐다. 세상 밖으로 나온 지금, 그녀는 변함이 없다. 일본으로 떠나던 그때처럼 순수하고 맑은 눈을 가졌다. "이제는 모든 게 괜찮아졌어요. 자신감도 생겼고요." 하지만 기자의 눈에는 여전히 세상을 두려워하는 것처럼 보였다. 한 시대를 풍미한 톱스타, 당대 이슈 메이커, 타고나길 연예인. 그녀와 마주 앉았다.


37년 만에 모국에서 정규 앨범을 냈어요. 의미가 남다르죠?
제 인생은 '희로애락' 그 자체였어요. 좋은 일, 나쁜 일, 말 못 할 사연들… 너무 많았죠. 한때는 그 과거들이 저를 가두고 힘들게 했지만 이제는 다 가슴에 묻었어요. 저희 어머니 소원이 제가 한국에서 다시 팬들에게 사랑받는 모습을 보는 거였어요. 어머니의 유언이 제게 용기를 줬죠.


한국에 들어온 후 지난 10여 년, 어떻게 지냈나요?
어릴 적 향수에 젖은 시간들이었어요. 일반인으로 평범하게 살았죠. 물론 편안해지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요. 과거에 대한 후회, 원망 등등 생각이라는 게 저를 가만히 두지 않았거든요.


가장 힘들었던 일은 뭔가요?
슬픈 이야기인데, 제가 구치소에 있을 때 어머니를 하늘나라에 보내드렸어요. 운명도 숙명도 지랄맞게 극성스러웠죠. 엄마를 아프게 만들고 제 가슴은 찢어졌어요. 어머니는 떠나시기 직전까지도 제 걱정을 하셨어요. "자식도 없고 남편도 없고, 홀로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갈 거니?" "넌 뭐 할 거니?" "뭘 하고 싶니?" 어머니는 그게 가장 큰 걱정이셨어요. 그땐 어린아이처럼 작아지더라고요. "엄마가 오래 살면 난 뭐든 할 수 있어" 라고 말했어요. 저는 어머니가 돌아갈 때까지 자식 노릇을 못 했어요. 그 생각을 하면 기가 막힙니다. 어머니가 평생 지켜준 딸은 어머니를 지켜내지 못한 거죠. 제 일생에서 가장 가슴 아픈 일이에요. 저는 불효자식입니다.


상심이 크셨겠어요.
홀어머니 밑에서 가난했지만 사랑을 받으며 평범하게 자랐어요. 어머니가 엄청 고생을 하셨어요. 어머니는 제가 가수가 되는 걸 반대하셨어요. 팔자가 나빠진다는 거였죠. 그 시절엔 다 그랬으니까요. 결국 엄마가 원하지 않는 길을 걸었어요. 그래서 보란 듯이 성공하고 싶었죠. 그런 엄마가 돌아가시니 아무것도 하기 싫었어요. 가수 계은숙을 떠나서 한 인간으로서도 일어서기가 너무 힘들었죠. 나 자신을 버리고 살았어요. 허공을 떠돌며 방황했죠. '엄마 따라서 죽어야지' 여러 번 생각했어요.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던 시간이었네요.
지금 생각해보면 나 자신에게 미안했던 시간이죠. 저는 18살에 데뷔했고 줄곧 무대 위에서 노래만 불렀어요. 그래도 팬들의 사랑과 관심이 컸기에 그럭저럭 버틸 수 있었죠. 한데 모두 다 떠났을 때 비로소 제가 스스로 사랑하는 법을 몰랐던 걸 알았고, 그 과정이 무척 힘들었어요. 지금은 괜찮아졌어요. 강해졌어요. 어머니가 떠나고 깊은 터널 속으로 빠져들어갔지만, 그 지독한 과정을 거치면서 저를 되돌아보게 됐어요. 저는 여전히 덜 성숙한 사람이었더라고요. 어른도 아이도 아닌, 일본으로 떠나던 그때 그 나이에 멈춰버린…. 사색에 잠길 시간이 없었어요. 어느 날 정신이 번쩍 드는 거예요. 지난 10여 년 제 인생에서 처음으로 가수가 아닌 일반인으로 살면서 많은 걸 깨달았어요. 그래서 새 정규 앨범 타이틀도 부활을 뜻하는 '리:버스(Re:Birth)'라고 지었어요.


57세의 나이에 '재기'는 분명 큰 용기가 필요했을 것 같아요.
일본에서 오랫동안 노력하고 고생했던 시간을 남들이 쉽게 얘기할 때는 슬프기도 했지요. 제 속마음을 말하지 못하고 참고 누르는 시간이 많았어요. 노래로 풀어야겠다고 생각했죠.


인생 이야기가 담긴 앨범이라고 들었어요. 기억에 남는 가사가 있나요?
'아파요'라는 곡에 "빗소리에 눈물 감추니, 시린 눈에 멈춘 기억이"라는 가사가 있어요. 제가 예전에 울다 지쳐 기절한 적이 있는데 뭐랄까, 영혼이 빠져나가서 죽는 느낌이랄까요. 너무 우니까 눈이 시리더라고요. 그 가사가 기억에 남아요. 저는 아픔이 많은 사람이에요. 흔한 말로 팔자가 세다고 하죠. 제 별명이 '멍청천사'예요. 강하고 단단하게 살아야 하는데 태생이 그렇지 못해 타의에 의해 상처받는 일이 많았어요.


그럼에도 '엔카의 여왕'이라는 수식어는 여전히 유효합니다.
글쎄요. 운 좋게 일본에서도 많은 사랑을 받았어요. 사실 저는 밑바닥부터 고생을 해서 '여왕'이라는 수식어가 와 닿지는 않아요. 일본은 제게 제2의 고향이에요. 30년 가깝게 활동했으니 청춘의 고향이기도 하죠. 그래서 일본에서도 재기하고 싶어요. 여전히 팬들이 존재하고, 앨범이 판매되고 있거든요. 그동안 일본 매체에서 인터뷰 요청이 많았지만 한 번도 응하지 않았어요. 도마 위의 생선이 되는 게 싫었으니까요. 최근 맘먹고 일본의 한 방송사와 인터뷰를 했어요. 그만큼 제가 심적으로 안정됐다는 의미겠죠. 시청률이 36%가 나왔다고 해요. 감사했어요. 무엇보다 팬들이 그리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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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은숙은 지난 1977년 '럭키' 광고모델로 연예계에 발을 들였고, 1979년 '노래하며 춤추며'를 발표하며 신인상을 받았다. 1982년 일본으로 간 뒤 작곡가 하마 게이스케에게 발탁돼 1985년 '오사카의 황혼'으로 현지 데뷔했다. 특유의 허스키한 목소리와 빼어난 외모로 큰 인기를 누렸다. 40여 차례 상을 받았으며, 특히 일본 가수들의 꿈인 NHK TV <홍백가합전>에 1989년부터 1994년까지 7번이나 출연했다. 그녀는 명실상부 한국과 일본에서 톱 가수가 된 최초의 대한민국 가수였다.


한국에서 이미 톱 가수였는데 일본으로 훌쩍 떠난 이유가 있나요?

사랑하는 남자가 있었어요. 한데 그 집에서 "홀어머니에 딴따라와는 결혼시킬 수 없다"고 했고 "내 아들과 헤어져달라"며 '위자료' 같은 걸 주더라고요. 드라마에 나올 법한 일이죠. 그 자리에서 돈을 던지고 나왔어요. 그때가 23살이었어요. 그 일을 계기로 일본으로 간 거예요. 매스컴은 온통 제 얘기로 도배돼 있었어요. 수많은 루머가 있었죠. '그래, 어디 한번 해보자'라는 오기가 생겼어요.


그때 일본에 가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한 남자의 아내로, 엄마로 지금보단 평온한 삶을 살았겠죠. 이렇게 사람들의 말에 치여 도망 다니는 삶은 살지 않았을 거예요.


일본 생활이 무척 힘들었다고 들었어요.

일본에서 저는 무명 가수니까요. 돈이 없어 식당에서 아르바이트하며 간신히 먹고살았어요. 행여 식당에 한국 사람이 나타나면 도망치기 바빴지요. 다다미방에서 궁상맞게 살며, 싸구려 청바지를 닳고 닳도록 입었죠. 한국에서 사랑하는 남자에게 상처받고 일본으로 도망 온 건데, 한국에서는 온갖 소문이 난무했어요. 그걸 보고 있자니 비참하고 마음이 아팠죠. 저는 한번 긁히면 긁힌 대로 살아야 하는 운명이었어요. 스폰을 받아서 하루아침에 일본에서 성공했다고 말하지만, 천만에요. 섬나라 일본에서 무인도 같은 삶을 살았어요. 저는 사람들의 말 때문에 천당과 지옥을 수백 번 왔다 갔다 하는 인생이었어요. 지금도 저는 그때 그 다다미방의 기억 때문에 다다미 냄새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어요.


결국 일본에서도 신인상을 거머쥐었어요. 그때의 기분은 어땠나요?

'이제부터 시작이다….' 일본으로 건너간 지 2년째 되던 해였을 거예요. 좋은 작곡가를 만나 가능했던 일이죠. 신인상을 받았지만 경제적인 여건이 좋아진 건 아니었어요. '조센징'이라 손가락질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앞만 보고 달릴 수 있는 계기가 됐죠.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전 총리가 팬클럽 회원이라는 사실도 유명하죠. 당시 인기가 어느 정도였나요?
일에 빠져 살아서 인기를 느낄 여유가 없었어요. 어느 날 길거리를 걸었더니 사람들이 다 알아보더라고요. 지금 생각해보면 일에만 빠져 산다는 것 자체가 교만인 것 같아요. 세상을 보는 눈, 사색 등에는 관심이 없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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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폰을 받아서 하루아침에 일본에서 성공했다고 말하지만, 천만에요. 섬나라 일본에서 무인도 같은 삶을 살았어요.
다다미방에서 궁상맞게 살며, 싸구려 청바지를 닳고 닳도록 입으며 노래를 불렀어요.
그때의 기억 때문에 지금도 다다미 냄새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어요.

성공했지만 아픔도 있었을 것 같아요. 당시만 해도 한국인에 대한 시선이 곱지 않았잖아요.
사랑해주는 팬도 많았지만 한쪽에선 "기모노를 입어라" "귀화해라" 하는 요구도 있었죠. 하지만 전 그것만은 명확하게 선을 그었어요. "내게 한복도, 기모노도 입으라고 하지 말라"고요. 큰 무대에서 기모노를 한 번 입긴 했죠. 조건은 한복도 입는 거였어요. 그래서 두 가지를 다 입었죠. 생각해보면 일본에서 활동하는 내내 일본인도 한국인도 아닌 채, 어디에도 소속되지 못한 채 지냈어요. 일본에서의 활동은 힘들었지만 팬들과 지낸 시간만큼은 잊을 수 없어요. '나를 낳아준 엄마가 있지만 또 한 번 나를 낳아준 분들이 팬이구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제 일본 팬 중에는 유달리 저희 어머니와 친했던 팬들도 있고, 저 대신 저희 어머니를 찾아가 위로해준 분들도 계셨어요. 따뜻했던 팬들이 그리워요.


이혼의 아픔도 겪었죠.

고등학교 때부터 알고 지낸 친한 오빠였고, 그만큼 편했어요. 많은 위로가 됐던 사람이에요. 1992년 부부의 연을 맺었고 평범하게 살았어요. 6년 정도 살다 보니 불화가 생겼어요. 사업도 잘 안 되고, 어떤 일을 계기로 내 편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고, 아이도 없었으니 관계가 휘청거렸죠. 어렵게 결정한 이혼이었어요. 한국에 계신 어머니에겐 이혼했다는 말을 못 하고 있는데 한국 매체에서 전화가 온 거예요. 한 달만 보도를 참아주면 안 되냐고 사정했어요. 저도 마음을 추스르지 못한 상태라 어머니에게 말씀드릴 엄두가 나지 않았거든요. 그런데 며칠 뒤 한국 언론에 대서특필이 된 거예요. 어머니는 보도를 통해 제 이혼 사실을 알게 됐어요. 이혼에 대한 후회는 없어요. 인연이 아니었다고 생각해요. 단지 아이를 낳지 않은 건 후회가 돼요.


2007년에는 불미스러운 일에 연루됐어요.

그동안의 노력이 하루아침에 '마약'이라는 단어와 함께 퇴색됐죠. 헬리콥터를 탄 일본 언론들이 저희 집 베란다를 촬영하며 라이브로 방송했어요. 제 삶이 없었던 시간이었죠.


무엇이 그토록 힘들었나요?
20년 동안 함께 일했던 매니저에게 배신을 당하고 홀로 남아 뒷감당을 해야 했어요. 얼마 안 되는 집도 빼앗겨 길거리로 나와야 되는 상황이었죠. 너무 힘들었어요. 타인도 못 믿고 급기야 스스로도 못 믿는 상황이 됐어요. 게다가 큰돈을 빚져야 하는 상황이 오니 머릿속에 여유가 없고, 저를 놔버리게 된 거죠. 전 18살 때부터 연예인으로 살았어요. 누군가의 삶을 커닝할 수 있는 삶이 아니었죠. 늘 무대 위에만 있어서 인생에 내공이 없었어요. 스스로 소외된 삶이라는 생각을 했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참 어린 나이였어요.
마이크를 놓고 무대에서 내려오면 모든 게 두려웠어요. 친구를 만나는 것도 무섭고, 누군가와 대화하는 것도 무서웠어요. 저는 인생의 내공을 눈으로만 얻었지 누군가와 대화로 얻은 게 없었어요. 그만큼 두꺼운 벽 안에서 홀로 쓸쓸하게 지냈어요.


그렇게 일본에서 추방됐을 때의 심정은 어땠나요?

집에서 한 발짝도 나가지 못했어요. 아무 곳도 가지 않고 아무도 만나지 않았죠. 누굴 만날 자신이 없었으니까요. 그래서 매일 사우나로 도망갔어요. 거기선 언론이나 주변 사람들로부터 해방될 수 있으니까요. 어머니를 보는 게 면목 없었어요. 참고 참다가 교회에 가서 울기도 많이 울었어요.


팬들이 실망한 가장 큰 계기는 두 번째 마약에 연루됐을 때였을 거예요.
나약해질 대로 나약해져 있었어요. 모든 게 혼란스럽고 머릿속을 흔들어댔지요. 깊은 동굴에 들어간 시기였어요.


요즘 취미는 뭔가요?

밥 먹고 청소하고 옷 정리도 하고…, 별것 없지만 저에게는 특별해요. 처음 일본에 갔을 때가 생각나는 일상이죠.


계은숙에게 음악이란?
인생이고 청춘이고 운명이고 숙명이죠. 지긋지긋하지 않느냐고 하시는 분도 있지만 힘들 때 간혹 웃고 노래하는 제 모습을 보기도 하는 걸 보면 음악이 있어 참 다행입니다.


40여 년 연예계 인생, 되돌아보니 어떤가요?

만만치 않은 삶이었어요. 노래하는 삶을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있어요. 그것을 운명으로 받아들이지 못했다면 지금까지도 힘들었을 거예요. 엄마가 간혹 그런 말씀을 하셨어요. "아빠가 있었다면 우리 딸이 이렇게 힘든 인생을 살았을까" 하고요. 상처와 아픔이 많은 과거였지만 내 몸에 배어 있는 게 노래밖에 없더라고요. 먹고살기 위해 컴백했느냐는 얘기를 들을까 봐 속상하고 송구하기도 하지만 허심탄회하게 제 삶을 드러내며 돌아왔습니다.


여자로서 60년 가까운 인생을 되돌아봤을 땐 어떤가요?
음…, 가여운 삶이죠. 여자로서는 그래요. 제 또래 사람들을 보면 누군가의 아내로, 엄마로 열심히 살잖아요. 노래할 때는 행복하지만 여자로서의 삶은 불행하다고 생각해요.


인터뷰를 하기 전 그녀의 전성기 시절 무대 위 영상을 찾아봤다. 그녀는 연예인일 수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났다. 다시 무대로 돌아온 것만 봐도 그렇다. 외로움도 어쩌면 숙명일지도 모른다. 레전드가 돌아왔으니, 이제 박수칠 일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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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INFO
에디터
하은정
사진
이대원
스타일리스트
신인애
헤어&메이크업
설현(더쎄컨)
2019년 07월호
2019년 07월호
에디터
하은정
사진
이대원
스타일리스트
신인애
헤어&메이크업
설현(더쎄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