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이 있고 농익은 연기력으로 필모그래피에 또 하나의 대표작 <열혈사제>를 새겨 넣은 김남길은 기분이 좋아 보였다. 나른한 표정 사이로 기분 좋은 흥이 느껴졌다. 그는 재치 있는 입담을 지녔고 꾸밈없이 솔직해 취재기자에게는 좋은 인터뷰이다. 평범한 질문에도 예상할 수 없는 답변이 툭툭 튀어나오기 때문이다. 필터를 거치지 않은 날것 그대로의 대답에 인터뷰 중 몇 차례나 웃음이 터졌다.
“인터뷰하러 오기 전에는 질문에만 답하겠다고 결심했는데 쉽지 않아요. 기분이 좋아서 자꾸 말을 하게 돼요.”
그는 자신의 솔직함을 주변에서 자제시킨다고 설명했는데, 그런 모습이 <열혈사제>의 ‘김해일’과 닮았다고 덧붙였다. 가톨릭 사제인 김해일은 알코올의존증 초기, 니코틴 금단현상으로 인한 짜증 남발, 거친 독설과 비꼼, 분노조절장애가 특징인 캐릭터. 김남길은 불합리한 것을 불합리하다고 이야기하는 것이나, 정의롭지 못한 행동을 지켜보지 못하는 것, 작은 일에 욱하는 자신의 모습이 김해일과 닮았다고 설명했다.
“타인을 배려하지 않는 행동을 보면 참지 못해요. 운전할 때 깜빡이등을 켜지 않고 끼어들거나 주차 라인을 밟고 주차하는 것 같은 행동요. 또 엘리베이터에서 사람들이 내리기 전에 타는 것도 그렇고요. 그럴 때면 “아직 안 내렸잖아”라고 큰 소리로 말하는데 이런 점이 김해일과 비슷해요.”
이러니 “김남길은 장르가 김남길”이라는 말이 나올 만하다. 그의 ‘찰떡’ 연기 때문인지 이 드라마는 지상파 드라마로는 드물게 22%(닐슨코리아 기준) 시청률로 종영하며 화제를 모았다. 이를 두고 <선덕여왕>(2009), <나쁜 남자>(2010) 이후 10년 만에 “김남길의 시대를 열었다”는 평까지 나왔다.
“뜨거운 인기를 체감하느냐고요? 롱 코트를 입지 않으면 알아보지 못하시던데요.(웃음) 데뷔 초에는 ‘인정받아야 돼. 흥행해야 돼’라는 강박관념이 있었는데 이젠 내려놨어요. <나쁜 남자>가 끝나고 군대에 가면서 제 의지와 상관없이 대중에게 잊혔는데, 내려놓지 않으면 못 견디겠더군요. 그때부터 작은 것에 일희일비하지 않게 됐어요.”
그 이후 배우로서 지향점이 바뀌었다. 인정받기보다는 부끄럽지 않은 작품에서 연기를 잘하고 싶다.
“이제는 시청자에게 보여줬을 때 ‘쪽팔리지 말자’는 생각을 해요. 저의 필모그래피를 보여줬을 때 ‘좋은 작품을 했다’는 말을 듣고 싶고요. 그러다 보면 시청률이나 관객 수가 따라오겠죠? 이렇게 말해놓고 사실 집에서 포털사이트에 시청률이나 관객 수를 검색하면서 걱정해요.(웃음)”
김남길은 <열혈사제>의 흥행 요인으로 배우들의 팀워크를 꼽았다. 극에서 ‘김해일’은 10년 전까지만 해도 국정원 대테러 특수팀 요원이었는데, 그 이력을 살려 자신을 성직자의 길로 이끌어준 이영준(정동환 분) 신부의 죽음을 파헤친다. 형사 ‘구대영(김성균 분)’, 검사 ‘박경선 (이하늬 분)’, 형사 ‘서승아(금새록 분)’ 등과 ‘구담 어벤져스’를 결성해 악의 카르텔을 하나씩 무너뜨린다.
“우리 드라마에서는 모든 캐릭터가 살아 움직였어요. 가끔 캐릭터들이 주인공을 돋보이게 하는 장치가 될 때가 있는데, 이 드라마에서는 그런 게 없었죠. 또 모든 배우가 인기에 들뜨지 않았어요. 사실 작품이 인기를 얻으면 배우가 돋보이고 싶은 욕심이 생기기 마련이거든요. 그런데 어느 누구도 그러지 않았고 상대 캐릭터가 부각돼야 할 땐 그럴 수 있도록 배려했어요.”
요즘, 기분 좋아요
이 드라마는 현실을 직접 반영하기도 했다. 클럽 버닝썬 사건으로 사회가 들썩일 때 이를 패러디한 에피소드를 연출한 것. 버닝썬은 클럽 ‘라이징문’으로 탈바꿈했고 마약으로 논란이 된 재벌 2세들이 체포되는 권선징악적 전개로 시청자에게 통쾌함을 선사했다.
“극에서 김해일이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이라도 용서해야 한다’ ‘성인에게도 과거는 있고 죄인에게도 미래는 있다’라고 말해요. 정의를 깨달은 후 선한 영향력을 지닌 사람이 된다는 것과 ‘용서’라는 메시지가 녹아 있어서 좋았어요. 특정 종교를 믿는 것은 아니지만 진심으로 용서를 구하는데 용서하지 않는 것도 갑질이라고 생각하거든요.”
또 퍽퍽한 현실을 유머러스하게 풀어내기도 했는데, 극에서 ‘구대영’ 역의 김성균이 ‘박경선’ 역의 이하늬가 출연한 <극한직업> 속 대사를 패러디하자 김남길이 “내 앞에서 그 이야기 하지 마. 난 기묘한 잠입이 좋다”라고 말하는 것이 그 예다. 김남길이 출연한 <기묘한 가족>이 좋은 성적을 내지 못했는데 같은 시기에 개봉한 <극한직업>이 1600만 관객을 돌파하며 흥행한 것을 코믹하게 풀어낸 대사다.
“작가님은 칠순이 넘은 분이 봐도 편안하고 재미있는 드라마를 만들고 싶으셨대요. 신부의 죽음이라는 묵직한 이야기를 유쾌하고 가볍게 풀겠다고 하셨죠.”
김남길은 코믹 연기력을 100% 발휘했다. 어둡고 쓸쓸한 이미지는 물론이고 코믹, 액션까지 소화하는 몇 안 되는 배우인 그는 데뷔 초에는 홍콩 배우 양조위나 대만 배우 장첸과 같은 이미지를 추구했는데, 30대 중반부터는 홍콩 배우 주성치를 표방했단다. 또 영화 <재밌는 영화>와 <다찌마와 리>의 임원희를 눈여겨보고, 주성치와 임원희의 코믹한 호흡을 자신의 것으로 가져왔단다.
“저도 코미디 연기를 좀 한다고 생각했는데 성균이를 이길 순 없더군요. 성균이가 애드리브에도 능하고 코믹 연기를 잘해서 초반에는 경쟁심이 발동했죠. 그러면서 성균이와 친해졌어요. 성균이와 식성이나 추구하는 삶이 비슷했거든요. 촬영이 새벽에 끝나면 숙소를 잡아 둘이 함께 잤고 매일 무엇을 먹을지 고민했죠. 마지막 촬영일이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을 땐 성균이와 ‘오늘의 메뉴’를 정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이 제일 슬펐어요.”
배우의 방향성 알려준 전도연·김혜수
좋은 사람들과 좋은 작품에 출연해 좋았다는 그는 ‘스토리보다 위대한 캐릭터는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주목받지 못해도 책임감을 갖고 작품에 임한단다. 그런 마음 때문에 <열혈사제> 촬영 중 부상을 입기도 했다. 더 좋은 액션신을 만들려고 액션 배우와 합을 맞추다 넘어져 양쪽 손목에 무리가 온 것. 당시 상황에 대해 설명하면서 그는 느와르 장르에 도전하고 싶다는 소망을 내비쳤다.
“과거엔 투박한 느낌의 액션 연기를 했는데 이번에는 무용하는 것처럼 보이도록 했어요. 가톨릭 사제라 과한 액션이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거든요. 거추장스러운 것을 빼고 임팩트 있게 보여주려고 했죠. 다행히 이번 드라마의 무술감독이 <무뢰한>에서 함께했던 김선웅 무술감독이라, 제가 잘하는 것과 못하는 것을 명확하게 아셨어요. 이번에 새로운 느낌의 액션 연기를 하면서 또 한 번 재미를 느꼈죠. 언젠가 화려한 액션을 하고 싶어요.”
지금껏 수많은 액션 연기를 보여줬음에도 또 액션 연기가 하고 싶다는 그의 필모그래피엔 로맨틱 코미디 장르가 전무하다.
“로맨틱 코미디 장르는 상대 배우와 연기적 호흡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저는 연기할 때 상대 배우가 누구냐에 따라 좌지우지되는 편이에요. 오랫동안 친하게 지낸 배우가 아니라면 로맨틱 코미디 장르를 소화하지 못할 것 같아요.”
그 대표적인 예가 전도연이다. 그와는 영화 <무뢰한>에서 호흡을 맞췄는데, 당시 김남길은 연기가 적성에 맞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며 배우라는 직업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었다. 그때 이를 눈치챈 전도연이 그에게 조언을 해줬다.
“어느 날 (전)도연이 누나가 ‘지금까지 왜 눈에 힘을 주며 연기했느냐. 얼굴이 아니라 가슴으로 하는 연기로 나아가면 좋겠다’고 말했어요. 그런 이야기가 슬럼프를 극복하게 도왔죠. 그때부터 연기에 재미를 느꼈어요.”
KBS2 드라마 <상어>와 영화 <해적>을 함께한 손예진과 <나쁜 남자>에 출연한 한가인이나 오연수도 그에게 좋은 영향을 끼쳤다. 그중에서도 영화 <모던보이>(2008)에 함께 출연한 김혜수에게서 큰 영향을 받았다.
“많은 선배가 후배들한테 이유를 설명하는데, (김)혜수 선배는 은연중에 깨닫게 만들어요. 제가 잘못된 길로 가면 어깨를 톡톡 쳐서 바른길로 가게 만들어주시죠. 또 벗어나면 다시 어깨를 톡톡 치고요. 그렇게 배우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깨닫게 해주셨어요.”
이런 경험 때문인지 김남길은 자신의 상대역이 좋은 사람이길 바란다. 연기를 잘하면 좋겠지만 그보다는 좋은 사람이라는 게 우선이다.
“좋은 사람인데 연기도 잘하면 좋죠. 하지만 무엇보다 결이 잘 맞는 사람이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요. 서로 배려하고 양보하면 좋잖아요. 연기는 부족하더라도 배우끼리 호흡을 잘 맞추면 돼요.”
어느 날 갑자기 변덕을 부리고 SNS 계정을 오픈할 수도 있지만 아직까진 얼굴을 보고 수다를 떨고 추억을 공유하는 게 좋아요.
일기 쓰는 남자
그는 이제 <열혈사제> 관련 스케줄을 마치고 잠시 휴식을 취할 예정이다. 쉴 땐 아무것도 하지 않고 채웠던 것을 완벽하게 비운다고. 그래야 다음 작품을 위해 다시 채울 수 있단다.
“예전엔 항상 연기에 대한 고민을 했어요. 인정받는 좋은 배우가 되고 싶었으니까 오디션이라는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방법을 고민했죠. 그런데 이젠 나라는 사람에 대해 고민해요. 경쟁력도 중요하지만 나의 정체성이 더 중요하다고 여기죠.”
이런 이유 때문일까? 그는 배우 김남길과 자연인 김남길을 구분하려고 한다. 자연인 김남길의 사적인 부분은 드러내지 않는다는 것. 그래서 SNS도 하지 않는다.
“제가 일기를 쓰는데 어느 날 문득 누가 일기를 볼 것을 계산하며 쓰고 있더군요. 시적인 표현을 쓰고 어려운 단어를 골라 쓰면서요. SNS도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SNS에서는 모두 행복하고 마음이 꽉 찬 사람들만 있던데, ‘실제로도 그럴까?’라는 생각을 해요. 어느 날 갑자기 변덕을 부리고 SNS 계정을 오픈할 수도 있지만 아직까진 얼굴을 보고 수다를 떨고, 추억을 공유하는 게 더 좋아요.”
팬들과 소통하는 의미로 할 수 있지 않느냐고 묻자, 연기로 소통하고 싶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예전에 선배들의 조언을 듣고 팬들과 이메일을 주고받았어요. 손가락에 쥐가 날 때까지 몇 백 통의 답 메일을 썼죠. 그러다가 모든 사람에게 친절할 수는 없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끝까지 일관성 있게 행동하지 못한다면 하지 않는 게 낫다고 생각해요.”
이야기는 스마트폰을 보느라고 고개를 들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것으로 이어졌다. 현장에서도 쉬는 시간이면 너 나 할 것 없이 스마트폰을 보고 있고, 버스나 지하철에서도 모든 사람이 스마트폰만 보고 있는 세상이 각박하게 느껴진단다.
“예전에는 버스를 타면 ‘짐 들어드릴까요?’라는 물음이 있었는데 요즘엔 스마트폰을 보느라 고개를 들지 않고 서로에게 관심이 없어요. 그런 문제의식에서 문화예술 NGO ‘길스토리’를 시작하게 됐어요. ‘작지만 위대한 움직임’이 슬로건인데, 여유가 없어도 잠깐만 주변을 돌아보자는 캠페인을 해요. 길스토리를 하면서 저 역시 자신을 정비하게 됐어요. 과거를 되짚어보고 잘못된 것은 반복하지 않으려고 하죠.”
마지막으로 그에게 인생을 살면서 가장 잘한 결정 3가지를 물었다. 그에게 “배우를 한 것. 작품마다 그 작품을 선택했다는 것. ‘길스토리’를 시작했다는 것”이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자연인 김남길은 착하지도 않고 이기적이기도 해요. 남에게 상처를 주고 반대로 상처를 받기도 하죠. 하지만 저는 사람이 변할 수 있다는 걸 믿어요. 그래서 좋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고요. 사람은 완벽한 완성체가 아니기 때문에 변화하는 재미가 있는 것 같아요.”
김남길은 많은 사람이 자신을 “신부님”이라고 부르는 탓에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이란다. 그의 고민이 어떤 위대한 움직임이 될지, 그와의 다음 만남이 기다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