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니’는 ‘평경장(김윤식 분)’을 만난다. 타짜의 세계에 눈을 뜬다(<타짜>). ‘준하’는 ‘주희(손예진 분)’를 만난다. 첫사랑에 빠진다(<클래식>). ‘초원’은 코치 ‘정욱(이기영 분)’을 만난다. 마라톤 풀코스에 도전한다(<말아톤>). ‘장훈’은 ‘상구(이병헌 분)’를 만난다. 염원하던 사회정의 구현을 이룬다(<내부자들>). 조승우가 연기한 인물들은 줄곧 누군가에 의해 미지의 세계를 알게 되고 극적인 심경 변화를 겪는 역할이었다. 순수하거나 풋풋하거나 서툴던 인물이 새로운 인물을 만나 어떠한 사건에 휘말리며 변하는 미묘한 감정을 조승우는 어떤 배우보다 탁월하게 연기해냈다.
이는 최근 종영한 JTBC 드라마 <라이프>에서도 다름없었다. 조승우가 연기한 화정그룹 CEO ‘구승효’는 상국대학병원 총괄사장이 된 후 의료기관을 돈으로만 생각하던 세속적인 인물에서 진심으로 사람을 위하는 의료인으로 거듭났다. 마지막 회에서 그가 선보인 연설은 시청자들에게 묵직한 감동을 줬다. <명당>에서의 조승우는 달랐다. 그가 연기한 ‘박재상’은 대립하는 두 세력 사이에서 중심축 역할을 한다.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도, 극적인 변화를 겪지도 않는다.
<명당>의 중심축, 박재상
“박재상이라는 캐릭터에 대해 지금까지 제가 해왔던 역할과 다르다고 생각하는 분이 많은 것 같아요. 충분히 공감합니다. 제가 지금껏 해온 캐릭터들이 성격적으로 변화하는 역할들이었고, 상대적으로 이번 작품에서는 너무 뒷전에 있다는 느낌이 들기도 했어요. 그러나 이러한 역할도 저에게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리고 박재상이란 캐릭터는 작품 속 모든 캐릭터와 연결돼 있어요. 의미 있는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명당>은 풍수지리를 이용해 나라를 지배하려는 장동 김 씨 가문과 몰락한 왕족 ‘흥선(지성 분)’의 대립을 다룬다. 조승우는 극 중 땅의 기운을 점쳐 인간의 운명을 바꿀 수 있는 천재 지관(풍수설에 따라 집터나 묏자리 따위의 좋고 나쁨을 가려내는 사람) 박재상을 연기했다. 그는 김 씨 가문에 의해 가족을 잃은 아픔을 지닌 인물이다.
역사적 사실에 감독의 상상력을 더해 흥행에 성공했던 영화 <사도> <관상> <광해, 왕이 된 남자> 등과 같이 <명당>도 흥성대원군이 지관의 조언을 받아 2명의 왕이 나오는 묏자리로 남연군의 묘를 이장했다는 실제 역사 기록을 바탕으로 ‘명당’이라는 설정을 더해 극에 재미를 부여한다. <명당>의 관전 포인트는 땅의 기운으로 욕망을 채우려는 인물들 간의 암투, 날 선 논쟁을 통한 묵직한 감정선이다. 휘몰아치는 듯한 인물들의 대립 속에서 중심을 잡아주는 인물이 바로 조승우가 연기한 박재상이다.
“사건의 후반으로 갈수록 김 씨 가문의 세도정치 이념과 흥선의 변질된 이념이 대척점을 이루며 피 말리는 전쟁을 벌여요. 그 안에서 박재상은 이를 막고 싶지만 물리적인 힘이 부족하죠. 그때 그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방향성을 완벽하게 깨닫습니다. 영화 속에서 사건이 끝난 후 ‘김병기(김성균 분)’가 박재상에게 찾아오잖아요. ‘저것들 다 누를 수 있는 더 좋은 땅을 찾아달라고’. 사실 영화에 편집된 뒷이야기가 있는데 박재상은 김병기에게 시체가 사라지는 천하의 흉당을 명당이라고 알려줘 개인적인 복수를 해요. 그다음엔 흥선이 찾아와요. ‘자네의 능력을 인정하니 사사로운 옛 감정은 잊고 우리 이 나라를 다시 만들어보세’라고 제안하죠. 그런데 박재상은 거절해요. ‘난 미래가 정해져 있는 사람과는 일하고 싶지 않다’며. 왕족에게 그런 말을 했다고 죽임을 당할 수도 있겠지만 흥선은 흔쾌히 박재상을 보내줍니다. 그런 것처럼 박재상은 이 영화에 분명히 필요한 존재예요. 대립하는 두 세력과 다른 올바른 정신을 가진 사람이 극에 반드시 필요했다고 생각해요.”
박재상은 분명 조승우가 이전에 연기했던 인물들과는 다른 성격의 캐릭터다. 전작에서 보여줬던 그의 모습을 기대하고 오는 관객이라면 맥이 빠지는 기분이 들 수도 있겠다고 하니 그는 그저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원래 선한 인물이 제일 재미없잖아요. 요즘은 자극적인 캐릭터가 등장하는 작품이 워낙 많잖아요. 그런 캐릭터들이 보는 이로 하여금 더 집중할 수 있게 만들기는 하죠. 그래서 그런 게 아닌가 싶어요. 박재상은 그런 임팩트보다는 여운을 남기는 캐릭터죠.”
배우의 숙명
<퍼펙트 게임>에 이어 조승우와 두 번째 호흡을 맞춘 박희곤 감독은 “영화를 꿰뚫고 가는 연기력은 물론 상대 배우를 아울러가는 힘이 대단한 배우”라고 그의 연기에 대한 신뢰를 표현했다. 조승우는 중립적인 박재상을 연기하기 위해 어떤 부분에 초점을 맞췄는지에 대해 “그런 질문 많이 받아요. 그런데 할 말이 없어요. 제 원래 원칙이 상대 배우와 앙상블을 맞추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거예요.”라며 “그래서 그냥 대본 열심히 보고 현장에서 상대 배우에게 집중했죠. 상대 배우들이 워낙 좋아서 좋은 연기가 나왔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답했다.
조승우는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으로 지성이 연기한 흥선과의 첫 만남을 꼽았다.
“흥선과 처음 만났을 때 무슨 터를 알고 싶어서 왔냐고 물으며 박재상이 칼을 뽑아서 그의 두발 사이로 찔러요. 저에게는 그 장면이 가장 임팩트가 있었어요. 앞으로 벌어질 <명당>의 2막을 알리는 상징적인 장면이죠. 그 전까지 군더더기 없이 굉장히 빠른 속도로 내용이 전개돼요. 저는 초반에서 그 장면까지가 가장 좋았어요.”
어떤 배우든 조승우와 연기하면 ‘케미가 좋다’는 평을 듣는다. <명당>에서도 최근 여러 작품에 함께 출연한 유재명과의 합에 대한 좋은 평이 이어지고 있다.
“저는 잘 맞는 배우와 연기할 때면 그 순간 딴생각이 안 들어요. 대사나 순서 같은 기술적인 부분은 다 잊어버리고, 자신마저 잊어버린 채 역할에만 몰두하게 돼요.”
<클래식>과 <말아톤>을 통해 순수한 인물을 연기하고, <타짜>에서는 치기 어린 청춘의 모습, 그리고 최근 드라마를 통해 보여준 선과 악이 공존하는 역할까지, 조승우의 연기 스펙트럼은 어떤 배우보다 넓다. 능수능란한 이 배우에게 과연 어려운 역할이 있는지 궁금했다.
“어려운 질문이네요. 연기는 하면 할수록 점점 더 어려운 것 같아요. <명당>에서 제 연기를 보고 드라마 <마의> 때 제 모습이 생각났다는 말을 들었는데, 뜨끔했어요. 마찬가지로 <라이프>에 출연 중일 때 <비밀의 숲>과 비슷한 거 아니냐는 말을 들었을 때도 뜨끔했죠. 보통 배우들의 성향은 항상 새로운 것을 추구하고, 같은 곳에 머무는 것보다 늘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고자 해요. 배우의 숙제이자 숙명이겠죠.”
추석을 겨냥해 <명당> <협상> <안시성> 세 편의 한국 영화가 동시에 개봉한다. 우연히도 세 영화의 주인공 조승우, 손예진, 조인성은 모두 2003년 <클래식>에 함께 출연했던 사이다.
“그때 저는 완전 신인이었고, 앞으로 내가 계속 연기 활동을 할 수 있을까? 누가 나를 써줄까? 그런 불안감이 있던 시기였어요. 그런데 그때 작품을 함께했던 세 사람이 15년이 지나 같은 시기에 개봉하는 영화에 출연하니 감회가 새롭더라고요. 저만 빼고 손예진 씨와 조인성 씨는 그때 모습 그대로이기도 하고.(웃음) 박수쳐주고 싶어요. ‘우리가 정말 딴청 부리지 않고 열심히 잘해왔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언젠가 다시 셋이 모여서 경쟁작이 아니라 같은 작품에서 또 만났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어요.”
자신만 빼고 손예진과 조인성은 그대로인 것 같다는 소리에 셋 다 그때 그대로인 것 같다고 말했더니 조승우는 “저는 때가 많이 묻었어요”라고 말했다. 그가 말하는 ‘때’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궁금했다.
“일단 예전만큼 순수하지 못한 것 같아요. 나이가 들어서 오는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있는 것 같아요. 연기할 때도 예전에는 순수하게 느끼면서 넘어갈 수 있던 부분들이 이제 오글거림으로 다가오는 순간이 있어요. 사실 굉장히 순수한 장면인데. 제가 하는 일이 인물의 삶을 만들어내는 일인데 그런 걸 생각하면 ‘나도 별수 없구나’란 생각이 들죠. 예전에는 작은 것으로도 설레곤 했는데 이제는 같은 것에도 무감각해질 때도 있고, 예전에는 보이지 않던, 신경 쓰지 않아도 됐던 일들이 요즘은 눈에 보이기도 하고 그것에 대해 흥분하는 자신을 발견하기도 해요. 그럴 땐 세상이 나를 변하게 한 건지, 내가 스스로 변한 건지 고민을 하기도 하죠.”
그래서인지 최근 몇 년 동안 멜로 연기를 하는 조승우를 볼 수 없었다. <클래식>에서 그가 연기했던 순수한 사랑에 빠진 준하를 떠올리면 지금의 변화가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그는 실제로 당시 자신을 회상하며 “때 묻지 않고 순수했었다”고 말했다. 당시 준하를 연기하면서 낯간지럽다거나 오글거린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고 정말 순수하게 연기했다고.
“지금은 관객들의 사랑 연기에 대한 기준이 높아진 것 같아요. 언제부터 오글거린다는 표현을 사용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떠한 기준점을 넘어가는 순간 ‘저건 너무 오글거려. 너무 신파야’라고 평가하죠. 그런데 배우 입장에서는 그런 걸 가리면서 연기할 수 없잖아요. 그 어떠한 묘한 기준점 안에 스스로를 가둬버린 것 같아요.”
관객들이 연기에 너무 예리한 잣대를 들이대는 것이 불만이냐고 물으니 조승우는 “아뇨. 저도 같은 선상에 있어요. 그래서 느낄 수 있는 것들이죠”라고 답했다.
예전에는 이해되지 않았던 어떤 것들이 이해되는 순간이 오더라고요.
만약 10년 뒤에 이 작품을 다시 한다면 이런 고귀한 감정을 느낄 수 있으니 의미 있는 거겠죠.
내게 뮤지컬은 ‘보물찾기’ 같은 것
데뷔 초부터 영화는 물론 뮤지컬 부문에서도 두각을 나타낸 조승우는 2004년 그에게 제10회 한국뮤지컬대상 남우주연상을 안겨준 <지킬앤하이드>로 11월 다시 무대에 오른다. 그는 2004년부터 지금까지 지킬과 하이드 역으로 수십 번도 넘게 무대에 올랐다. 스스로 이제 때가 묻었다고 말하는 그에게 데뷔 초부터 한 가지 역할을 반복해서 연기하는 뮤지컬이 어떤 의미인지 궁금했다.
“한 살 한 살 먹어가며 같은 대본을 다시 보면 안 보였던 게 보이고, 못 느꼈던 걸 느낄 수 있는 기회가 되는 것 같아요. 보물찾기 같은 거죠. 그런 부분 때문에 뮤지컬을 놓지 못하는 것 같아요. 뮤지컬을 워낙 어린 나이에 멋모르고 시작해서 그런지 그때는 못 느꼈던 걸 지금은 느낄 수 있으니까 ‘아, 더 찾을 게 있을지도 모르겠다’란 생각이 든 거죠.”
그런 조승우에게 27살에 무대에 올랐던 <맨 오브 라만차>의 세상을 너무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돈키호테가 충고하는 장면은 잊을 수 없는 장면이라고 한다.
“‘친구여, 나는 사는 동안 항상 내 인생을 직시해왔는데 인생은 이러하고, 내가 느낀 건 이러하다’라며 ‘당신이 너무 그렇게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았으면 좋겠다’라고 충고해주는 장면이 있는데 원작의 대사는 ‘친구여, 나는 50년을 사는 동안’이에요. 그런데 제가 그때 27살이어서 대사를 ‘친구여, 나는 사는 동안’으로 바꿨죠. 그런데 이 작품을 제가 27살에 하고, 30살에 하고, 35살에 또 했어요. 그때마다 느껴지는 감정이 다르더라고요. 앞으로 40살이 되어 이 작품을 한다면 또 느낌이 다르겠죠. 저도 살아가며 친구가 죽어가는 것을 보고, 전쟁의 굶주림을 보고, 많은 것을 보면서 인생의 연륜이 쌓여갔으니까요. 작품과 함께. 예전에는 이해되지 않았던 어떤 것들이 이해되는 순간이 오더라고요. 만약 10년 뒤에 이 작품을 다시 한다면 이런 고귀한 감정을 느낄 수 있으니 의미 있는 거겠죠.”
뮤지컬 배우로서도 입지가 확실한 만큼 조승우는 출중한 노래 실력을 갖추고 있다. 영화 <사도>를 위해서는 주제곡을 부르기도 했다.
“방준석 음악감독에게서 갑자기 연락이 왔어요. <사도>의 주제곡을 부를 사람이 마땅히 생각나지 않아서 연락해봤다고.(웃음) ‘왜 나지?’라고 생각하면서 다음 날 아침 바로 조조로 <사도>를 봤어요. 많이 울었어요. 송강호 선배가 뒤주에 갇힌 유아인 씨를 직접 쓰다듬지 못해 뒤주를 쓰다듬는 장면이 있어요. 그걸 보고 결정했어요. 주제곡을 불러야겠다고. 제가 가사를 바꾸기도 했어요. 마지막 가사가 원래는 ‘내 손 잡아주오’였는데 ‘내 얼굴 한번 만져주오’로. 뒤주를 쓰다듬었던 장면이 계속 머릿속에 남아서요.”
<명당>은 <관상> <궁합>과 함께 ‘역학 3부작’이라고 불린다. <명당>을 촬영하면서 <관상>의 주연이었던 송강호가 의식되진 않았느냐고 물으니 “어우, 저는 딱 <명당> 대본만 보고 했어요. 강호 형을 누가 따라 하겠어요. 오히려 부담스러워서 못 하죠. 강호 형 최곤데”라며 손사래를 쳤다.
연예계의 유명한 ‘집돌이’로 통하는 조승우는 요즘도 스케줄이 없을 때는 집에 주로 머문다고 했다. 강아지 산책을 시키는 게 하루 일과의 대부분이라고. 돈은 언제 쓰냐는 우스갯소리엔 “세금 내고 저축합니다”라는 대답이 돌아오기도 했다. 조승우는 일 년 사이 두 편의 드라마에 출연했고, <명당>을 촬영했으며, 지금은 뮤지컬 <지킬앤하이드>를 준비 중이다. 데뷔 이후 가장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는 셈이다. ‘집돌이’를 자처하며 비축해놓은 조승우의 에너지가 힘을 발휘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어쨌든 조승우는 <명당>을 통해 대중에게 지금과 다른 배우 조승우의 모습을 다시 보여줄 예정이다. 그렇게 조승우라는 장르는 더욱 탄탄해지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