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5대 국제 콩쿠르(쇼팽 콩쿠르, 퀸엘리자베스 콩쿠르, 차이콥스키 콩쿠르, 비에니아프스키 콩쿠르, 파가니니 콩쿠르)는 규정이 확 바뀌었습니다. 예전엔 출전자들이 서양 작품만 연주하면 됐지만 지금은 반드시 자기 나라 작품 하나를 연주해야 합니다. 오히려 주최 측이 이런 항목을 새로 넣었어요. 그만큼 그들이 먼저 새로운 음악 세계에 주목하고 있는 겁니다. 결국 대한민국 사람만이 표현할 수 있는 고유한 음악이 세계에서도 통한다는 것을 증명해주는 셈입니다.”
지난 5월 초 전화기 너머로 들리는 작곡가 이영조의 목소리엔 확신이 가득했다. 그가 작곡하고 편곡한 18곡으로 꾸민 음반 <더 코리안 아트 송(The Korean Art Song)>이 6월께 독일에서 발매된다. 유럽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활동하는 소프라노 이유라가 한국어로 노래한 이 앨범에는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인 것이라는 이영조의 ‘아름다운 고집’이 녹아 있다.
그를 사로잡은 것은 우리 전래 민요다. 18곡 중 민요를 새롭게 재해석한 노래가 7곡 들어 있다. 이영조의 손을 거치면서 입에서 입으로 내려오던 ‘새야 새야’ ‘새 쫓기 노래’ ‘한오백년’ ‘옹헤야’ ‘문경새재 아리랑’ ‘경상도 아리랑’ ‘정선 엮음 아리랑’이 세련되게 재탄생했다. 한국 민요 요소를 고급 예술 가곡으로 승화시키기 위해 얼마나 치열하게 고민했는지 고스란히 보여준다. 구닥다리 음악이라고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민요에 이런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넣을 수 있다는 게 그저 놀랍기만 하다.
이영조는 ‘바위고개’ ‘어머니의 마음’ ‘꽃구름 속에’ ‘코스모스를 노래함’ 등의 유명 가곡을 남긴 이흥렬 선생의 차남이다. 그는 아버지가 작곡한 노래가 지금도 널리 불려지는 이유를 전래 민요에서 찾았다.
“선친이 만든 노래 중에 ‘엄마가 섬 그늘에 굴 따러 가면~ 아기가 혼자 남아 집을 보다가 ~”라는 노랫말의 ‘섬집 아기’라는 동요가 있어요. 사람들이 이 노래를 좋아하는 이유가 ‘솔도레미레도레~’라는 음계의 친숙성 때문인데, 그 안에 아리랑의 ‘솔라도레미~’가 숨어 있더라고요. 이처럼 시대를 타지 않고 오랫동안 불리는 노래엔 우리의 민요 정서가 흐르고 있어요.”
이영조의 작품은 독일적인 논리 위에 현대적 한국 정서를 입힌 것이 특징이다. 1960년대에 작곡한 ‘엄마야 누나야(김소월 시)’ ‘비단안개(김소월 시)’ ‘다듬이(이은상 시)’, 1990년대에 만든 ‘청산리 벽계수야(황진이 시)’ ‘어져 내일이여(황진이 시)’ 뿐만 아니라 2000년대 들어 선보인 ‘별빛(강나영 시)’ ‘달밤(김남조 시)’ ‘춘향 옥중가(서정주 시)’에서도 한국의 아름다움이 발견된다.
“이탈리아 칸초네, 독일 리트, 프랑스 샹송은 확연히 달라요. 같은 누들이라도 국수, 짜장면, 스파게티 등이 서로 다른 것처럼요. 외국 친구들에게 ‘이게 바로 우리나라 가곡이야’ 하고 들려주면 대부분 ‘이탈리아 가곡 같은데, 정말 너희 나라 가곡 맞아?’ 하며 갸우뚱해요. 저도 외국에서 14년을 살았는데 이런 반응을 볼 때마다 정말 속상했어요.”
이영조는 서양 음악을 전공한 사람이다. 하지만 그는 서양 음악사의 강요로부터 그리고 동양 음악사로부터 자유로워지기를 바랐다. 그런 희망 사항은 본격적으로 작곡 활동을 하면서 한국 예술가곡이 서양 가곡과 어떻게 다르게 자리매김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진지한 고민으로 이어진 것. 21세기 최첨단 시대에 무슨 한국적인 걸 찾느라고 야단법석이냐는 볼멘소리에 이영조는 단호하게 말했다.
“21세기엔 더 한국적인 것이 필요해요. 왜냐하면 서양 사람들과 음악적으로 대등하게 만나려면 서로 교환되는 우리만의 필살기가 있어야 하거든요. 솔직히 그동안 너무 받아들이기만 했잖아요. 부끄럽지만 이제는 외국 사람들이 더 우리 음악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번에 노래를 한 이유라 소프라노 역시 저와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더라고요. 독일 말을 하면서 독일 음식을 먹고 독일 옷을 입고 독일 오페라를 부르며 독일의 정서를 표현해왔는데 마흔 중반에 들어서니 ‘그럼 나는 어디 있는 건가’ 하는 자괴감이 들면서 우리 것을 찾게 됐다고 말했습니다.”
앞으로 낡은 것으로만 여겨온 우리 전래 민요가 더 정겹게 느껴진다면 이영조 작곡가에게 일정 부분 빚지고 있는 셈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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