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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보시비르스크의 도스토옙스키 동상

On May 28,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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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보시비르스크의 도스토옙스키 도로. 오른쪽에 도스토옙스키 얼굴상이 서 있다.

노보시비르스크의 도스토옙스키 도로. 오른쪽에 도스토옙스키 얼굴상이 서 있다.

도스토옙스키 얼굴상

시베리아 옴스크의 도스토옙스키 박물관을 방문하고 노보시비르스크로 돌아온 다음 날이며 이 취재 여행의 마지막 날인 2017년 10월 7일. 나는 동포 김준길 교수 내외와 도스토옙스키 동상을 찾아 나섰다. 이 도시의 어딘가에 도스토옙스키 동상이 있다는 얘기를 누군가로부터 들었기 때문이다. 김 교수 내외도 도스토옙스키나 푸시킨 동상이 있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본 적은 없다고 했다. 우리가 동상을 발견한 곳은 노보시비르스크의 중심 도로라고 할 수 있는 크라스니 프로스펙트와 도스토옙스키 도로의 교차 지점이었다. 그런데 동상은 우리가 러시아에서 흔히 보아온 커다란 전신상(全身像)이 아니고 굵지 않은 사각기둥 위에 머리만 올려놓은 두상(頭像), 즉 얼굴상이었다. 사람들 눈에 잘 띌 만한 크기가 아니었기 때문에 이곳 사람들도 잘 알지 못하고 지나쳤을 것 같았다.

그런데 왜 이곳에 도스토옙스키 거리가 있을까? 도스토옙스키는 노보시비르스크와는 아무 인연도 없지만, 도스토옙스키가 유형살이를 한 옴스크가 러시아 기준으로는 비교적 가까운 거리라고 할 수 있는 600km 서쪽에 있고, 그가 강제 군 복무를 하고 첫 결혼 생활을 한 세미팔라친스크는 노보시비르스크에서 남쪽으로 약 500km가량 떨어진 곳에 있으며, 그가 첫 결혼식을 올린 쿠즈네츠크가 노보시비르스크에서 동남쪽으로 370km 거리에 있다는 것이 인연이라면 인연이랄 수 있다(*세미팔라친스크는 소련 해체 후 카자흐스탄 땅이 되었으며 현재의 이름은 세메이다. 옴스크와 쿠즈네츠크는 러시아 땅이며 쿠즈네츠크의 현재 이름은 노보쿠즈네츠크다). 그러나 그러한 이유보다는 문학의 거장들에 대한 러시아인들의 사랑과 자랑의 표시가 아닐까 한다.
 

고골 흉상.

고골 흉상.

고골 흉상.

노보시비르스크 시립 푸시킨 사범학교의 푸시킨 흉상.

노보시비르스크 시립 푸시킨 사범학교의 푸시킨 흉상.

노보시비르스크 시립 푸시킨 사범학교의 푸시킨 흉상.

고골과 푸시킨 흉상

왜냐하면 도스토옙스키 도로에서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는 노보시비르스크와 도스토옙스키만큼의 인연도 없는 작가 고골의 이름을 딴 고골 도로가 있으며 그의 흉상도 있었다. 또 다른 곳에는 톨스토이 도로도 있는데 그곳에 톨스토이 동상은 없다고 김 교수는 말해주었다. 고골 도로는 도스토옙스키 도로에서 멀지 않았다. 크라스니 프로스펙트를 따라 조금 가다 보니 고골 도로와 만나는 교차 지점에 고골의 흉상이 서 있었다. 규모는 먼저 본 도스토옙스키 얼굴상보다는 조금 컸다. 고골 도로는 도스토옙스키 도로보다 폭이 훨씬 넓었다. 고골 흉상까지 카메라에 담은 후 이번에는 푸시킨 동상을 찾아가기로 했다. 김 교수 부인 나탈리아가 어딘가에 전화하여 위치를 알아내 차를 몰았다.

푸시킨 동상은 고골 동상이 있는 도심으로부터 한참 떨어진 지역에 있었다. 차는 한 동네로 들어가 여기저기를 한참 돌다가 어느 학교 앞에 주차를 했다. 교문 안으로 들어서니 교정에는 노란 자작나무 단풍이 한창이었다. 오른쪽으로 멀찌감치 학교 건물 앞에 비교적 큰 황금색 흉상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곱슬머리 푸시킨의 흉상임을 금방 알 수 있었다. 햇살이 흉상을 밝게 비추고 있었다. 흉상은 원래 인근 공원에 있었으나 가끔 취객들로부터 훼손을 당하곤 해서 안전한 학교 교정으로 옮겨놓은 것이라고 했다. 동상이 있는 학교의 이름은 노보시비르스크 시립 푸시킨 사범학교였다. 고등학교 과정이라고 한다. 토요일이어서인지 학생들은 보이지 않았다. 당초 옴스크 도스토옙스키 박물관 취재 여행을 계획할 때만 해도 노보시비르스크는 단지 경유지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렇게 여행 마지막 날 이 도시의 도스토옙스키, 고골, 푸시킨의 동상을 몇 시간 만에 모두 볼 수 있었으니 내게는 여행의 또 다른 소득이었다.
 

노보시비르스크 국립 오페라-발레 극장 방문

나와 김 교수는 이날 저녁 6시, 과거 방송사 시절 인연이 있었던 노보시비르스크 국립 오페라-발레 극장을 방문했다. 타치아나 기네비치 부극장장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극장장은 부재중이었다. 노보시비르스크 국립 오페라-발레 극장은 내게 특별한 기억이 있는 곳이다. 나는 2007년과 2008년 두 차례 노보시비르스크 오페라발레단의 내한 공연 교섭차 노보시비르스크에 갔었다.

두 번째인 2008년 12월 방문 때 나와 동행했던 안지환 그랜드 오페라단 단장(신라대 교수)의 독창회가 이 극장 소연주장에서 열렸다. 그 무대에서 내가 찬조 출연을 해 아일랜드 민요 ‘대니 보이(Danny Boy)’와 이탈리아 칸초네 ‘물망초(Non ti scordar di me)’를 불렀다. 관객 중에는 이 극장의 오페라 가수들이 많았다. 김준길 교수는 나의 첫 노보시비르스크 방문 때부터 노보시비르스크 국립 오페라-발레 극장과의 관계를 주선하고 통역을 해주었다. 안지환 단장과 김준길 교수의 인연은 나보다 먼저다. 노보시비르스크 국립 공과대학에서 수학과 교수를 지낸 김 교수는 구소련 해체기 때 공대 교수를 그만두고 부랴트자치공화국의 외무차관과 장관을 지냈다. 이후 한국-러시아 문화 관련 비즈니스를 해왔고, 2015년에는 한국에 들어와 2017년 여름까지 2년간 김포대학교에서 국제교류처 처장 겸 교수로 일한 바 있다. 타치아나 부극장장은 우리에게 기왕에 왔으니 이날 처음 무대에 올리는 발레 <해적>을 보고 가라고 했다. 내가 한국행 비행기가 밤 10시 40분이어서 어려울 것 같다고 했더니 타치아나는 그러면 1막만이라도 보고 가라고 했다. 발레 <해적>은 춤과 음악이 화려했다. 끝까지 볼 수 없는 것이 아쉬웠다.

우리는 약 1시간쯤 1막을 보고 곧바로 택시를 타고 공항으로 향했다. 시베리아항공 카운터에서 체크인을 하고 공항 로비의 커피숍에서 샌드위치로 늦은 저녁을 김 교수와 함께했다. 여정을 마무리하는 날 저녁을 그처럼 가볍게 하는 것이 김 교수께는 미안한 노릇이었으나 그 시간에 노보시비르스크 공항 안에서 그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그리곤 김 교수와 작별하고 비행기에 올라 일요일인 10월 8일 새벽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한국인으로서 옴스크 도스토옙스키 박물관을 방문한 사람은 많지 않다. 러시아 문학을 전공한 분들이 몇 분 있다고 들었다. 그분들은 대개 모스크바에서 비행기를 타고 옴스크로 갔다가 다시 모스크바로 돌아가는 경로를 취한 것 같다. 모스크바가 거점이 될 경우는 그게 편할 테지만 나처럼 한국에서 가는 경우는 노보시비르스크를 경유하는 것이 비교적 빠른 길이다. 나로서는 유례없이 길었던 2017년의 추석 연휴와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노보시비르스크에 사는 김준길 교수의 안내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옴스크 방문이었다.

CREDIT INFO
취재·사진
이정식(<우먼센스> 발행인)
2018년 06월호
2018년 06월호
취재·사진
이정식(<우먼센스> 발행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