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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식의 러시아 문학 기행 ⑬

도스토옙스키, 재혼을 위해 이리 뛰고 저리 뛰다

On May 28,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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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트페테르부르크 도스토옙스키 박물관 인근의 도스토옙스키 동상.

상트페테르부르크 도스토옙스키 박물관 인근의 도스토옙스키 동상.

방랑자 마르타 브라운에게도 청혼

마르타 브라운은 1864년 말 언론인 고르스키의 소개로 도스토옙스키의 새로운 잡지 <세기>의 영어 번역자로 취직했다. 도스토옙스키와 마르타 브라운의 관계는 그녀가 병이 나서 도스토옙스키가 문병을 가면서부터 시작됐다. 도스토옙스키는 그녀에게도 청혼했던 것이 확실하다고 E. H. 카는 말하고 있는데, 도스토옙스키에 대한 그녀의 감정은 주로 감사의 마음이었다고 분석한다. 두 사람은 이후 편지를 주고받았다. 도스토옙스키가 쓴 편지는 남아 있지 않고 마르타 브라운이 1865년 1월 하순 도스토옙스키에게 보낸 편지는 다음과 같이 전해진다.

"내가 육체적으로 당신을 만족시켰는지, 우리들의 우정을 지속시킬 만큼 정신적인 조화가 우리들 사이에 이뤄졌는지, 그것은 어찌 되었든 비록 짧은 순간 짧은 시간이었지만 나를 당신의 우정과 사랑에 가치 있는 여자로 생각해준 데 대해서 나는 항상 감사할 것을 의심치 않습니다. 흔쾌하게 당신과 하나가 되려고 마음먹은 적이 있었음은 확실합니다. 나의 이기적인 정열에 대해 용서를 빕니다. 그러나 러시아로 돌아온 뒤의 비참했던 2년간, 그렇게나 슬프고 혐오스럽고 절망밖에 없었던 내 마음속에서 그렇게나 초연하고 관용스럽고 상식과 훌륭함을 지닌 사람을 만났다는 것은 기쁘고 행복한 일이었습니다. 내게 대한 당신의 감정이 길거나 짧은 기간으로 계속되든 어쨌든 간에 그것은 지금의 내게 있어서는 전혀 관심 밖의 일입니다. 그렇지만 진실로 내게 어떠한 물질적 이익보다도 훨씬 높게 생각되는 것은, 당신이 나라는 인간의 타락한 일면을 멀리하지 않았고 나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도 훨씬 높은 평가를 당신이 내게 내려준 것입니다." (『도스토옙스키 평전』, E. H. 카, 김병익·권영빈 옮김, 열린책들, 2011)

마르타 브라운은 자기에게 문병을 오고 돈까지 준 도스토옙스키를 고맙게 생각했다. 그녀는 퇴원 후 정부(情夫)였던 고르스키를 떠나 한동안 도스토옙스키와 동거하다가 헤어진 것으로 추측된다. 그 이후의 기록은 남아 있는 것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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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_26세 청년 시절의 도스토옙스키 초상화(1847). 우_19세기 센나야 광장의 모습(그림).

그가 재혼에 매달린 이유

첫 부인 마리야가 죽고 난 후 안나 고르빈-크루코프스카야와 마르타 브라운을 상대로 한 재혼 시도에서 잇달아 고배를 맛본 후 도스토옙스키는 재혼 대상으로 유럽에 있는 수슬로바를 다시 떠올렸다. 도스토옙스키가 이처럼 재혼에 매달린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첫 부인 마리야와 유일한 의지처였던 형 미하일을 잇달아 잃은 후 상실감과 외로움이 너무 컸기 때문일 것이다. 시베리아 옴스크에서 혹독한 유형 생활을 마친 후 세미팔라친스크 군 복무 시절 느꼈던 여성에 대한 사랑의 뜨거운 갈망이 다시 세차게 솟아올랐던 것 같다. 형 미하일은 마리야가 죽고 석 달 후인 1864년 7월, 며칠 시름시름 앓다가 갑자기 죽었다. 전년도에 강제 폐간된 <시대>를 <세기>로 이름을 바꿔 복간한 뒤 몇 달 지나지 않아서였다 (*도스토옙스키는 시베리아에서 돌아온 다음 해인 1860년 가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형 미하일과 함께 <시대>라는 문학 잡지를 창간했다. 미하일이 편집자였고 도스토옙스키는 주요 기고자였다. 창간호는 1861년 1월에 나왔다. 잡지는 순조롭게 발행되다가 1863년 4월호에 실린 폴란드인의 무장 봉기 실패와 관련한 비평가 스트라호프의 글이 반애국적이라는 당국의 비판을 받으면서 1863년 5월 강제 폐간되었다).

도스토옙스키는 <세기>를 어떻게든 혼자 꾸려가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형편은 점점 더 어려워졌다. <세기>는 결국 1865년 4월, 1년여 만에 문을 닫고 말았다. 그런데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형 대신 갚아야 할 빚이 2만5천 루블이나 되었다. 채권자들은 도스토옙스키를 채무자 감옥에 집어넣겠다고 위협했다. 당장 3천 루블가량이 필요했다. 쪼들리던 도스토옙스키는 그때까지 나온 자신의 모든 작품의 판권을 3천 루블에 사줄 잡지사나 출판사를 찾았으나 선뜻 받아들이는 곳이 없었다. 그러던 차에 스첼로프스키라는 악명 높은 출판 투기꾼이 그에게 다가왔다. 스첼로프스키는 도스토옙스키의 기존의 모든 작품은 물론, 이듬해인 1866년 11월 1일까지 전집에 들어갈 새로운 장편소설을 한 편 더 쓴다는 전제로 도스토옙스키와 3천 루블에 출판권 계약을 했다. 그런데 여기에는 또 다른 추가적인 조건이 있었다. 정해진 기일 내에 새 소설을 쓰지 못할 경우 위약금을 물어야 하며, 한 달 후인 그해 12월 1일까지도 완성하지 못하면 이미 나온 작품들과 앞으로 나올 도스토옙스키의 모든 작품에 대해서도 스첼로프스키가 독점 출판권을 갖는다는 것이었다. 자칫 약속을 이행하지 못하면 평생 노예 계약이 될 내용이었다. 그러나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니었던 도스토옙스키는 이 같은 위험한 계약서에 1865년 7월 2일 덜렁 서명을 하고 말았다. 막대한 빚, 형의 유족과 의붓아들에 대한 생계 책임 등 복잡한 주변 환경으로부터 일시라도 벗어나고 싶었던 도스토옙스키는 다시 유럽행을 계획한다. 단순한 현실 도피만은 아니었다. 미우면서도 그리운 폴리나 수슬로바를 다시 만나 청혼을 해보리라는 야무진 꿈도 가슴에 품고 있었다. 여행의 또 다른 이유를 댄다면 유럽의 날씨가 간질 발작 치료에 도움이 된다는 것과 한판 도박으로 형세를 만회할 수 있는 일확천금을 움켜쥘 수 있었으면 하는 희망도 곁들여 있었다. 도스토옙스키는 오랫동안 도박 중독자였다. 도박에 대한 도스토옙스키의 생각은 과연 어떤 것이었을까? 수슬로바와 유럽 여행 중이던 1863년 9월 8일, 도박장에서 돈을 다 잃고 그는 형 미하일에게 돈을 좀 부쳐달라고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썼다. 자신이 도박을 하는 이유는 '가족 모두를 돕기 위해서'라고 강변하는 내용이다.

"애인과 함께 여행을 한다고 마지막 한 푼까지 다 쓸 줄은 몰랐다라고 말했지요. 그런데 형, 나는 비스바덴에서 시스템을 연구해서 그것을 시험해 봤는데, 금세 1만 프랑을 벌은 거예요. 아침이 되어 조금 흥분한 김에 시스템을 벗어났더니, 순식간에 잃어버렸지요. 저녁에 나는 다시 시스템으로 돌아가서, 그것을 엄수한 덕분에, 점점 승리하기 시작했고, 금세 3천 프랑을 손에 넣었어요. 자 어떤가요? 이런 경험 뒤에, 맘먹고 시스템에 덤벼들면 분명 기회를 잡을 것이라고 믿는 것이 자연스럽지 않겠어요? 믿을 수밖에 없지 않을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돈이 필요해요. 무슨 일이 있어도 필요해요. 나를 위해서도 형을 위해서도 제 처를 위해서도 소설을 위해서도. 여기 사람들은 어렵지 않게 룰렛으로 1만 플로린이나 따고 있어요. 나는 형과 모두를 도우려고, 형과 함께 뭐든 마무리하고 싶어서 그런 마음으로 여기에 온 것입니다. 괜찮아요. 제 시스템에는 자신이 있습니다." (『도스토옙스키의 생활』, 고바야시 히데오, 이은선 번역)

도스토옙스키는 스첼로프스키로부터 받은 3천 루블로 급한 빚 등을 갚고 수중에 남은 175루블을 달랑 들고 유럽으로 출발했다. 이 여행에서 기적의 빛을 만나기를 기대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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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와 벌』에 나오는 센나야 광장의 현재 모습.

『죄와 벌』에 나오는 센나야 광장의 현재 모습.

다시 수슬로바를 만나다

도스토옙스키는 2년 전 1863년 10월 베를린에서 수슬로바와 헤어진 후 그녀를 본 일이 없다. 그러나 편지 왕래는 있었다. 양쪽 모두 여행을 하면서 정나미는 떨어졌어도 미련은 있었던 것 같다. 도스토옙스키는 1865년 8월 10일 비스바덴에 도착했다. 수슬로바가 파리에서 곧 그곳으로 왔다. 며칠 함께 있었다. 도스토옙스키는 8월 15일 도박장에서 갖고 있던 돈을 몽땅 룰렛에 날려버렸다. 날려버린 돈 속에는 수슬로바의 것도 들어 있었던 것 같다. 오도 가도 못하게 된 도스토옙스키는 알고 있던 게르첸(러시아의 사상가 겸 작가, 1812~1870)과 투르게네프(작가, 1818~1883) 등에게 돈을 빌려달라는 부탁 편지를 보낸다. 게르첸은 거절하는 답장을 보냈고, 바덴(*1945년까지 존재했던 독일 제국의 한 주(州))에 있던 투르게네프는 부탁한 1백 탈러(*Thaler : 1872년까지 프로이센 등 유럽에서 널리 통용되던 옛 독일 화폐)의 절반인 50탈러를 송금해주었다. 도스토옙스키는 이 돈을 수슬로바에게 여비로 주었다. 그녀는 8월 20일쯤 파리로 떠났다. 도스토옙스키는 이때 유럽에서는 정작 수슬로바에게 청혼하지 못 했던 것 같다. 수슬로바의 돈까지 도박으로 몽땅 날렸으니 정작 결혼 이야기는 꺼낼 기회가 없었을 것이다.

수슬로바가 떠나고도 도스토옙스키는 한 달 이상 비스바덴에 홀로 남아 궁핍한 생활을 계속했다. 다음은 그 당시 도스토옙스키가 수슬로바에게 보낸 편지의 일부다.

"당신이 떠나기 무섭게, 그다음 날 이른 아침부터 호텔 측은 나에게 식사와 차, 커피를 가져다주지 말라는 지시를 내렸다오. 내가 해명을 하러 갔더니 투실투실 살찐 독일인 지배인이 글쎄, 나는 식사를 제공 받을 자격이 없으니, 차만을 제공하겠다고 하는 거 아니겠소? 그래서 어제부터 나는 식사는 꿈도 못 꾸고 차만 홀짝이고 있다오. 그들이 가져다주는 차 역시 지긋지긋하다오. 옷가지나 신발도 빨아주지 않는다오. 종을 울려봐도 누구 하나 거들떠보지 않고. 급사들 전부가 독일인 특유의 몹시 고약한 멸시로 나를 대하고 있고, 독일인들에게 돈이 없어서 계산서를 지불하지 못하는 것보다 더 큰 죄는 없다오." (『도스토옙스키2』, 콘스탄틴 모츨스키,
김현택 옮김, 2001, 책세상)

도스토옙스키는 "움직이면 식욕을 자극하기 때문에 하루 종일 앉아서 책만 본다"고 수슬로바에게 보낸 편지에 썼다. 도스토옙스키는 수슬로바에게도 돈을 좀 보내달라고 했지만 그녀는 아무런 답장도 보내지 않았다. 그녀는 그 무렵 파리에서 다른 남자와 신나게 연애 중이었다. 후에 그녀의 일기에서 밝혀진 것이다.

『죄와 벌』을 쓰기 시작하다

『죄와 벌』에 나오는 K-다리 표지

『죄와 벌』에 나오는 K-다리 표지

『죄와 벌』에 나오는 K-다리 표지

돈이 없어 꼼짝달싹할 수 없었던 도스토옙스키는 잡지사, 친구 등 돈을 빌릴 만한 모든 곳에 편지를 보냈다. 모스크바에서 발행되는 <러시아 통보>의 편집자 카트코프에게는 소설을 제공할 테니 3백 루블을 선불로 보내달라고 부탁했다. 이때 제공하겠다고 했던 소설이 훗날의 『죄와 벌』이다.

『죄와 벌』은 이처럼 도스토옙스키가 비스바덴에서 최고로 궁핍한 상태에 있을 때 쓰이기 시작했다. 홀로 외롭고 배고픈 상태에서 구상되었다. 당시 몇 푼의 돈을 빌리기 위해 전당포에 드나들면서 전당포 주인에게 수모도 많이 당했던 것 같다.

소설 『죄와 벌』에서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가 전당포 주인 노파를 살해하게 한 것은 작가의 쓰라린 경험과 무관치 않다는 얘기도 있다. 도스토옙스키는 친구 밀류코프와 시베리아 시절 가깝게 지냈던 블랑겔 남작에게도 돈을 빌려달라는 편지를 썼다. 애걸했다고 하는 편이 낫겠다. <러시아 통보>의 카트코프가 의외로 돈을 보내겠다고 알려왔다. 몇 년 전 도스토옙스키가 카트코프에게 소설을 보내겠다고 약속하고는 보내지 못한 전력이 있기 때문에 큰 기대는 할 수 없었는데, 의외로 답변이 온 것이다. 그런데 <러시아 통보>의 선불 2백 루블은 도스토옙스키가 페테르부르크로 돌아온 후에야 송금되어 왔다.

이 같은 절망적 상황 속에서도 구원의 손길을 내미는 이가 있었다. 비스바덴에 와 있던 러시아 정교회 사제 I. A. 야니셰프였다. 그는 도스토옙스키가 위기에서 탈출할 수 있도록 얼마간의 돈을 주었다. 여기에다 휴가를 마치고 근무지 코펜하겐으로 돌아온 도스토옙스키의 옛 친구 블랑겔 남작도 도스토옙스키의 편지를 보고 돈을 보내주었다. 게다가 페테르부르크로 돌아가는 길에 코펜하겐에 꼭 들러서 가라고 제안했다. 그는 귀국길에 코펜하겐에 들러 블랑겔 남작의 집에서 열흘을 보내고 두 달 반 만인 10월 15일 페테르부르크로 돌아왔다. 뱃삯은 블랑겔 남작이 내주었다.

수슬로바에게도 청혼했으나…

수슬로바도 도스토옙스키와 비슷한 시기에 페테르부르크로 돌아왔다. 그녀의 일기에는 1865년 11월 2일 두 사람이 만났다고 기록되어 있다. E. H. 카는 이때 도스토옙스키가 수슬로바에게 청혼을 했다며 『도스토옙스키 평전』에 이렇게 썼다.

"도스토옙스키는 처음도 아니지만 그녀에게 구혼을 했다. (…) 수슬로바의 거절은 처음부터 분명한 것이었다. 그는 앞서 인용했던 말을 되풀이해서, '당신은 자신을 한 번 내게 바쳤다는 사실 때문에 나를 용서할 수 없을 것이다. 그 때문에 당신은 복수를 하려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들은 이 해석을 둘러싸고 잠시 동안 다투었다. 도리어 그녀는 '그것이 내게 무슨 문제가 되었어요?'라고 말하면서 '나는 그것을 인정하지도 거부하지도 않겠어요. 당신이야 머리가 잘 움직이는 사람이니까 그렇게 생각하도록 하세요'라고 대답했다. 극적인 이 재치 있는 문답에서 폴리나는 물러섰다. 겨울 동안 몇 차례의 만남이 있었다. 다음 해 3월 그녀는 페테르부르크를 떠나 시골로 내려갔다. 아마 이후 두 사람은 다시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그들은 계속해서 이따금 편지 왕래를 했고 도스토옙스키가 재혼하던 첫해에도 편지를 해서 당연하게도 안나 그리고리예브나의 질투를 사기도 했다. 이후 편지나 또는 다른 정보 자료도 끝나게 된다." (『도스토옙스키 평전』, E. H. 카)

유럽에서 돌아와 홀로 외롭게 페테르부르크의 또 다른 겨울을 맞으면서 도스토옙스키는 『죄와 벌』 집필에 몰두한다. (다음 호에 계속)

 

'『시베리아 문학기행』의 저자 이정식 작가와 함께하는 러시아 문학 기행'이 8월 24일부터 31일까지 7박8일의 일정으로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 일원에서 실시된다. 자세한 내용은 <우먼센스>2018.06 333쪽 참조. 문의 및 신청은 바이칼BK투어(주) 02-1661-3585.

러시아 문학 기행 강좌 '도스토옙스키, 시베리아에서의 10년'

강사 이정식
일시 및 장소 5월 29일(화) 오후 4시, 용산 서울문화사 별관 강당
문의 02-799-9127(<우먼센스> 편집팀)

CREDIT INFO
취재·사진
이정식(<우먼센스> 발행인)
2018년 06월호
2018년 06월호
취재·사진
이정식(<우먼센스> 발행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