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당신의 아버지가 세계적으로 유명한 삽화가이고, 남편 역시 동시대의 가장 핫한 제품 디자이너라면 당신은 어떤 삶을 살 것인가? 그들의 명성에 눌려 자신의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누군가의 딸이자 아내로만 살게 될까? 1968년,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난 디자이너, 잉가 상페가 바로 그런 사람이다. 그녀의 아버지는 <꼬마 니콜라> <얼굴 빨개지는 아이>로 유명한 장–자크 상페이며, 남편은 스타 디자이너 듀오인 부홀렉 형제 중 한 명인 로낭 부홀렉이다. 어머니 또한 덴마크의 화가이자 일러스트레이터인 메테 이베르스 상페로, 가족 구성원 모두 이름값깨나 하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잉가 상페는 그들의 명성과는 상관없이 자신만의 스타일이 담긴 디자인 세계를 탄탄하게 구축해가는 중이며, 리네 로제(Ligne Roset), 헤이(Hay), 알레시(Alessi), 카펠리니(Cappellini), 에드라(Edra) 등 다양한 글로벌 브랜드와 협업을 진행하고 있다. 일과 육아를 원활하게 하기 위해 파리 10구의 집 바로 위층에 마련한 자신만의 디자인 스튜디오에서 말이다.
볼륨 있고 포근한 디자인
잉가 상페의 성장 배경을 보면 당연히 어릴 때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을 것 같지만, 실은 그렇지 않았다고 한다. 오히려 아름다운 디자인의 제품을 볼 때 가슴이 뛰고, 10대 시절에 가장 즐겨 찾던 곳이 벼룩시장이었던 잉가 상페는 그런 취향을 살려 국립산업디자인대학(ENSCI)에서 산업디자인을 전공했다. 그 후 세계적인 디자이너인 마크 뉴슨의 파리 스튜디오와 인테리어 디자이너로 유명한 앙드레 퓌망의 사무실에서 일했고, 서른두 살이던 2000년부터 개인 스튜디오를 운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디자인업계에 그녀의 이름이 알려진 계기는 2002년, 이탈리아 브랜드 카펠리니와 함께한 컬래버레이션이었다. 높이 2m의 이 대형 조명 오브제는 자연스럽게 주름이 잡힌 패브릭으로 만들었는데 그 규모가 압도적이면서도 아름다워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이다. 그 후로 잉가 상페는 다양한 제품을 만들기 시작했는데, 유독 그 자체로 볼륨이 있거나 폭신한 쿠션을 갖추고 있는 디자인이 많았다. 리네 로제의 ‘뤼셰(Ruche)’ 컬렉션이 대표적인 작품이다. 이 제품은 소파와 암체어, 침대 등이 있는데, 퀼팅 패브릭이 전면에 덧대어진 독특한 디자인이다. 패브릭 안에 엄청난 양의 공기가 들어 있어 그 자체로 매우 푹신푹신하기 때문에 블랭킷이 따로 필요 없다. 같은 브랜드의 ‘모엘(Moel)’ 소파 역시 퀼팅 패브릭으로 덮여 있는데, 부채가 펼쳐진 듯한 형태가 몸 전체를 편안하게 감싸준다. 소파 전체를 고탄성 폴리우레탄 폼으로 만드는 전통적인 소파 제작 방식으로 만든 제품으로, 최상의 안락함을 자랑한다. 스타일리시하면서도 전위적인 디자인을 선보이기로 유명한 브랜드 에드라의 ‘샹티이(Chantilly)’ 소파는 한 송이 장미꽃처럼 우아하고 여성스러운 디자인인데 어떤 위치에 앉더라도 편하게 쉴 수 있는, 360도로 모두 이용 가능한 제품이다. 프랑스 브랜드 무스타슈(Moustache)의 ‘증기’라는 뜻을 가진 ‘바푀르(Vapeur)’ 램프는 물에 강하고 잘 찢어지지 않는 기능성 종이인 타이벡 소재로 만들었는데, 많은 주름으로 볼륨감을 강조해 마치 하얀 구름 같은 느낌이 난다.
소박하고 매력 넘치는 소품들
잉가 상페가 디자인하는 소품은 첫눈에는 평범해 보여도 볼수록 남다르고 사용할수록 그 속에 담긴 위트가 느껴진다. 스웨덴 브랜드 왜스트베르그(Wästberg)와 함께한 조명도 그렇다. 반투명한 화이트 글라스 소재가 은은한 불빛을 내는 테이블 램프 ‘W163 랑피르(Lampyre)’, 펜던트, 테이블 램프, 플로어 스탠드 등 여러 용도의 조명을 갖춘 ‘W103 상페’ 컬렉션도 마찬가지다. 특히 플로어 스탠드인 W103F는 받침을 위로 끌어 올려 테이블로도 사용할 수 있어 편리하다. ‘섬’이라는 뜻의 ‘일(Ile)’ 컬렉션은 벽에 걸거나, 클립처럼 어딘가에 끼우거나, 테이블 위에 놓거나, 어떤 공간에서도 다용도로 사용할 수 있는 조명이다. 단순하고 반복적인 패턴이 편안함을 더하는 노르웨이 브랜드 로로스 트위드(RØros Tweed)의 블랭킷, 벽지나 작품처럼 벽 한 면에 걸어서 스타일링할 수 있는 이탈리아 브랜드 골란(Gorlan)의 ‘메테오(Meteo)’ 러그, 긴 목이 우아하게 느껴지는 알레시의 ‘콜로-알토(Collo-alto)’ 커틀러리, 액자처럼 걸어서 사용하는 헤이의 ‘루반(Ruban)’ 거울 등 매력적인 소품이 많다. 2017년에 열린 국제가전박람회(IFA)에서 선보인 삼성전자의 라이프스타일 TV 부스에서는 마치 액자를 고르듯 컬러풀한 색채와 패턴의 프레임을 볼 수 있었는데, 이것 또한 잉가 상페의 작품이었다.
힘의 원천인 가족
많은 사람이 그녀가 남편과 함께 찰스&레이 임스 부부처럼 공동 프로젝트를 진행하지 않는 것에 의아해한다. 하지만 잉가 상페는 “남편은 나의 가장 큰 조력자이며 가장 좋아하는 디자이너다”라고 하면서도 일에서만큼은 서로의 다름을 존중해 각자의 스튜디오를 운영하며 독립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녀는 언제나 “나의 디자인의 원천은 가족”이라며 일과 가정을 균형 있게 유지하고 싶다고 말한다. “나는 지나치게 많이 일하고 싶지 않다. 1년에 대여섯 개의 제품을 디자인하고 매일 오후에는 아이들을 학교에서 데려오는 일상을 유지하고 싶을 뿐이다. 지금까지 한 번도 일이 개인 생활을 침범한 적은 없다.” 그래서 그녀는 오늘도 딸을 학교에 보내고 세계적인 브랜드의 프로젝트가 기다리는 스튜디오로 출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