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동쪽 끝 흑해와 아시아의 서쪽 끝 카스피해 사이에 있는 세 나라 아제르바이잔, 조지아, 아르메니아를 가리켜서 ‘코카서스 3국’이라고 부른다. 코카서스산맥을 공유하면서 서로 이웃하고 있지만 역사와 문화에는 차이가 많다. 마치 서양 사람들의 눈으로 바라보는 ‘동북아 3국’이라는 틀 속의 우리나라와 중국, 일본의 형국과 비슷하다. 유럽에서 가장 높은 코카서스산맥을 한 지붕으로 살아가는 세 가족이지만 각국의 문화와 역사, 종교가 차이가 많고 특히 볼거리에서도 그 맛과 색이 다르다.
러시아 문호들이 반한 코카서스
셀 수 없는 외침으로 바람 잘 날 없던 코카서스 지역이 러시아 땅으로 편입된 시기는 예카테리나 여제 때였다. 미국이 서부를 개척하듯 러시아는 남부를 개척하기 위해 험난한 코카서스산맥을 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새로운 땅 코카서스에는 아름다운 자연경관과 용감한 전사들, 소박하면서도 인정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그들의 열정적인 춤과 아름다운 노래, 거기에 맛있는 음식까지 무엇 하나 매력적이지 않은 것이 없었다.
19세기 러시아 작가들에게 코카서스는 미지의 세계이자 새로운 천국이었고, 반체제 문인들에게는 유배지가 되기도 했다. 이런저런 사유로 코카서스와 인연을 맺은 러시아의 작가들이 손가락으로는 다 꼽지 못할 정도로 많다.
그중에서도 1822년에 ‘카프카스의 포로들’이란 시를 쓴 푸시킨, 1872년 동명의 단편소설을 쓴 톨스토이가 가장 눈에 띈다. 러시아 현대 영화의 명장 보도로프는 1996년 이를 각색해 동명의 영화를 찍기도 했다. 푸시킨은 그리 길지 않은 생을 사는 동안에도 여러 차례 코카서스를 방문해 흔적을 남겼다. 1829년에 방문했을 때는 ‘그루지야 언덕에서’라는 시를 쓰기도 했다. ‘그루지야’는 조지아의 예전 이름이다.
톨스토이 역시 작가 지망 시절 티플리스(오늘날 트빌리시)를 여행한 적이 있으며 4년 동안 군인으로 근무한 경험이 있다. 이를 바탕으로 『코카서스 이야기들』이란 작품을 남겼다. ‘러시아의 혼’이라고 불리는 작가 레르몬토프는 코카서스에서 두 차례에 걸친 유배 생활을 한 경험으로 코카서스를 외부에 알린 최초의 작가다. 그가 남긴 작품으로는 『우리 시대의 영웅』 『수사(修士)』 『즈바리 성당이 있는 언덕 위에서 바라본 므츠헤타』 등이 있다. 소련의 프롤레타리아 작가이자 레닌의 혁명 동지인 막심 고리키는 티플리스 철도 기지창에서 페인트공으로 일한 적이 있다. 그는 1892년 집시 이야기를 다룬 자신의 처녀작 『마카르 추드라』를 발표했다. 이때 그는 ‘알렉산드르 페츠코프’라는 본명 대신 ‘막심 고리키’라는 필명을 처음 사용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2년간의 코카서스 체류 기간에 웅장한 코카서스산맥과 그 자락에서 살아가는 낭만적인 코카서스인들을 보고 글을 쓰기로 마음먹었다고 고백했다.
가난한 화가의 짝사랑 이야기 ‘백만 송이 장미’
1862년 코카서스 산자락의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피로스마니는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수도 트빌리시로 무작정 상경했다. 어느 부잣집에서 허드렛일을 도우며 입에 풀칠을 하던 그는 12살이 되던 해에 가출을 감행한다. 굶기를 밥 먹듯이 하며 동가식서가숙하던 그에게는 그림을 그리는 남다른 재주가 있었다. 극장의 간판을 그려 호구지책으로 삼고, 쓰다가 남은 페인트로 그림을 그렸다.
그러던 어느 날, 그의 그림을 알아본 프랑스 여행객이 파리에 소개하면서 널리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다. ‘원시주의’라고 불리기도 하는 그의 그림은 훗날 피카소의 그림에 영향을 미쳤으며 정식으로 배우지 않은 화풍 때문에 오히려 많은 사람의 반향을 일으켰다. 그때부터 그의 생활은 윤택해져 집도 사고 재산도 제법 모았다.
그러나 운명은 그를 쉽게 살도록 놔두지 않았다. 1905년 어느 날 프랑스 여배우 마르가리타 데 세브르가 객원 배우 자격으로 트빌리시를 방문한다. 베르에스키 정원에서 공연을 하던 그녀를 본 피로스마니는 첫눈에 반한다. 그는 집을 팔고 그림을 팔아 백만 송이의 장미를 사서 그녀에게 사랑을 고백한다. 당시 장미 백만 송이의 값은 모스크바의 원룸을 열두 채나 살 수 있는 돈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다른 남자와 함께 트빌리시를 떠났다. 혼자 남겨진 그는 1918년 죽을 때까지 수없이 그녀의 초상화를 그리며 그리워했다고 한다.
이 이야기를 전해 들은 러시아 시인 안드레이 보즈넨스키가 작사를 하고, 라트비아의 작곡가 라이몬즈 파울스가 작곡한 ‘마리나가 딸에게 준 삶’이란 곡의 음을 차용해 ‘백만 송이 장미’라는 러시아의 국민가요가 탄생한다. 트빌리시에 있는 마르가리타나 모스크바에 있는 피로스마니 카페는 그들의 이야기를 모티브로 해 유명해진 곳들이다. 조지아의 지폐 1라리에는 피로스마니의 초상화가 있고 그의 이름을 딴 유명한 포도주도 있다. 생전의 피로스마니는 불행했지만 죽은 후 더 유명해졌으며 조지아를 먹여 살리는 브랜드가 되었다.
볼수록 매력 있는 나라, 조지아
조지아는 코카서스 3국 여행의 핵심이 되는 나라다. 오래 숙성된 포도주처럼 단맛과 쓴맛을 함께 간직하고 있다. 조지아 사람들은 그들의 역사가 8,000년 전 시작됐다고 자랑한다. 스탈린의 고향으로도 유명한 고리의 우플리스치헤 지역에는 최초의 원시인이 살았던 흔적이 있다. 원주민들은 이곳에 수도원을 세우고 그들의 신앙을 지켜왔다. 수도원 주변에는 포도를 심어 일용할 먹거리를 마련했다. 조지아 여행은 이런 역사 아래 세워진 수도원과 주변 마을을 중심으로 둘러보는 것이며, 그 배경이 되는 코카서스산맥의 웅장하고 현란한 경관을 덤으로 볼 수 있다.
첫 번째 기독교의 나라, 아르메니아
아르메니아는 AD 301년 기독교를 국교로 채택한 나라다. 로마제국이 313년에 국교로 정했으니 이보다 12년이나 앞선다. 인구 300만 명의 95%가 기독교 신자다. 아르메니아 교회는 기독교의 3대 축인 개신교, 로마 가톨릭, 그리스 정교 중 어디에도 속하지 않으며 ‘아르메니아 사도회’라는 그들만의 교회다. 그래서 아르메니아를 여행할 때는 성지 순례와 같은 신성한 마음가짐으로 해야 한다. 조지아를 떠나 아르메니아 국경을 통과한 뒤 만나는 관광지는 모두 수도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늘과 땅을 잇는 독특한 십자가 하치카르, 자연 채광으로 교회 내부를 밝히는 예르크, 예수를 찌른 창, 노아의 방주, 13년간 지하 감옥에 갇혀 있던 성 그레고리, 이렇듯 아르메니아에는 수도원의 역사가 끊임없이 이어진다.
<우먼센스>에서는 9월 6일부터 15일까지 10일 동안 코카서스 3국 여행을 바이칼BK투어(주)(02-1661-3585)와 함께 진행한다.
자세한 내용은 <우먼센스>2018.05 310쪽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