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부인 사별 후 몇 차례 재혼 시도
도스토옙스키는 첫 부인 마리야와 결혼하기 전에는 여성을 사귄 적이 별로 없는 것 같다. 정치범으로 체포되어 시베리아로 유형을 떠날 때인 28세까지 이성과 교제의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24~25세쯤, 작가 파나예프의 부인 아브도치야 파나예바를 연모했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을 뿐이다.
도스토옙스키는 24세 때인 1845년 『가난한 사람들』로 작가로서 첫 성공을 거둔 후 선배 작가 파나예프의 집을 처음 방문했다. 이날 아브도치야 파나예바를 보고 돌아온 후, "나는 그의 아내에게 매료된 것 같다. 그녀는 지적이고 훌륭하며, 게다가 사랑스럽고 말할 수 없이 우아한 자태를 지니고 있다"는 기록을 남겼다. 아브도치야 파나예바도 도스토옙스키의 그런 감정을 알아차렸다. 후일 그녀는 자신의 회상기에서 도스토옙스키에 대한 인상을 이렇게 적었다. 별로 호의적이지는 않다.
도스토옙스키를 처음 본 순간부터 그가 몹시도 신경과민적이고 민감한 청년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 바짝 마른 데다 키는 작고, 옅은 머리빛에 병자 같은 안색을 하고 있었다. 크지 않은 회색 눈동자는 어쩐지 불안하게 이쪽저쪽으로 움직이고, 창백한 입술은 신경질적으로 바르르 떨렸다. 젊음과 신경 증세 때문에 그는 자신을 제어할 줄 몰랐고 자신의 자존심 또는 작가적 재능에 대한 고상한 의견을 지나치게 분명히 피력했다. (『도스토옙스키1』, 모츨스키, 김현택 옮김, 책세상, 2001)
도스토옙스키가 파나예바에게 관심을 가졌던 기간은 길지 않았다. 마리야가 죽고 안나와 재혼하기 전에 도스토옙스키는 최소 세 명의 여성과 재혼을 시도했다. 지난 호부터 이야기하고 있는 미모의 여대생 폴리나 수슬로바도 그중 하나다. 수슬로바에게도 마리야가 죽은 이듬해인 1865년 여름, 독일까지 달려가 청혼을 했으나 거부당했다. 그 사이에 두 사람이 더 등장하는데 안나 고르빈크루콥스카야와 마르타 브라운이라는 여성이다. 그의 문학잡지 <세기>(*형 미하일과 함께 만든 <시대>지 폐간 후 복간하면서 바꾼 제호)에 원고를 보냈던 사람들이다. 도스토옙스키는 이 두 여성과 교제했고 청혼도 했으나 성사되지 않았다.
이 가운데 마리야가 살아 있을 때인 1863년 몰래 유럽 여행을 함께했던 폴리나 수슬로바는 도스토옙스키에게 두고두고 깊은 애증의 대상이다. 그녀는 도스토옙스키의 작품에 여러모로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도스토옙스키 소설 속 수슬로바의 분신들
도스토옙스키는 1866년에 쓴 소설 『도박꾼』에서 폴리나를 여주인공으로 등장시킨다. 여주인공 이름은 폴리나 알렉산드로브나. 허구적인 소설이지만 소설 속 폴리나의 성격은 바로 폴리나 수슬로바다.
『도박꾼』의 주인공이자 도박꾼 알렉세이 이바노비치가 사랑하는 대상인 폴리나는 속을 알 수 없는 도도하고 변덕스러운 미녀다. 그녀는 자기를 좋아하는 주인공 알렉세이에게 돈을 주면서 룰렛 도박을 해 될 수 있는 대로 많이 따서 자기에게 달라고 시킨다. 소설 속의 폴리나는 알렉세이를 사랑하면서도 경멸한다. 알렉세이 또한 폴리나를 사랑하지만 동시에 증오한다. 서로가 비슷하다. 그렇다면 그런 게 무슨 사랑이란 말인가. 1963년 유럽 여행 중 도스토옙스키와 폴리나 두 사람이 가졌던 감정이 그런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추측을 해본다. 파리에서 도스토옙스키를 기다리던 사이에 다른 남자와 놀아났던 폴리나와 떠난 여행이었으니까. 이해하는 척했던 도스토옙스키도 속으로는 오만 가지 생각이 다 들었을 것이다.
소설 『도박꾼』에서 알렉세이는 폴리나의 지시를 그대로 따르면서도 그녀의 가슴에 날카로운 칼을 서서히 꽂아 넣고 싶다는 이중적인 감정을 보인다.
(폴리나로부터) 룰렛 도박장으로 가라는 지시를 받고 나니 나는 마치 머리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이상한 일이다. 나는 무엇인가를 골똘히 생각하려고 했지만, 어느 틈엔가 폴리나에 대한 내 감정의 느낌들을 분석하느라 정신이 없었던 것이다. 비록 여행 중에는 정신 나간 사람처럼 우수에 잠기고, 가스에 중독된 사람처럼 몸부림치고, 또 꿈에서마저 쉴 새 없이 그녀를 보긴 했지만, 그래도 이곳을 떠나 있던 두 주일 동안 나는 오늘 하루보다, 그러니까 이곳에 돌아온 후의 하루 동안보다 더 마음 편하게 지냈던 것이 사실이다. (…) 이제 나는 다시 한 번 스스로에게 물어보았다. 내가 그녀를 사랑하고 있는 것일까? 그러나 역시 대답을 하지 못했다. 아니 차라리 그녀를 미워한다고 대답하는 편이 낫겠다. 그렇다. 난 그녀가 혐오스러웠다. 그녀를 목 졸라 죽이기 위해 반생(半生)을 바칠 생각을 한 적도 있었다! 그녀와 얘기를 끝낼 때만 되면 언제나 그랬다. 맹세컨대, 만일 그녀 가슴에 날카로운 칼을 서서히 꽂아 넣을 수만 있다면 나는 아마도 기쁜 마음으로 그 칼을 손에 움켜쥘 것이다. 그런데 웬일인지, 성스러운 모든 것을 걸고 맹세하건대, 만일 그녀가 슐란겐베르크의 유명한 봉우리에서 정말로 내게 '밑으로 떨어져요'라고 말했다면 나는 당장에 몸을 던졌을 것이다. 나는 그걸 알고 있었다. 어떤 식이라도 상관없지만 그 문제는 꼭 해결되어야만 했다. 그녀도 이 모든 사정을 놀라우리만큼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확신하건대, 결코 내가 그녀를 차지할 수 없다는 사실과 내 공상들을 절대 실현시킬 수 없다는 사실을 내 자신이 아주 확실하고 분명하게 깨닫고 있다는 생각, 바로 그 생각이 그녀에게 대단한 쾌감을 가져다주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신중하고 영리한 그녀가 그렇게 솔직하고 허물없이 나를 대할 수 있겠는가? 지금까지 그녀는 자신이 마치 고대의 여왕이라도 되는 것처럼 나를 보아온 것 같다. 여왕은 자신의 노예를 사람으로 보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보는 앞에서 옷을 벗어젖혔다. 그렇다. 그녀는 몇 번씩이나 나를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았던 것이다. (『노름꾼』, 도스토옙스키, 이재필 옮김, 열린책들, 2014)
『도박꾼』을 쓴 2년 후인 1868년 도스토옙스키가 두 번째 부인 안나 그리고리예브나와 유럽 체류 중에 쓴 『백치』에서는 뛰어난 미모에 종잡을 수 없이 변덕스러운 성격의 나스타시야 필리포브나가 여주인공으로 등장하는데, 나스타시야의 모델 또한 수슬로바라는 데는 도스토옙스키 분석가들 사이에 별 이의가 없다.
저런 미모는 힘이야
백치에서는 나스타시야의 미모에 대한 묘사가 거듭 나온다.
"이분이 나스타시야 필리포브나인가요?" 그(미쉬낀 공작)는 사진을 호기심에 차서 유심히 바라보며 말했다. "놀랄 만한 미인이군요!" 그는 격앙된 목소리로 덧붙였다. 사진 속에는 정말로 보기 드문 미인의 모습이 들어 있었다. 그녀는 극히 소박하고 우아한 패션의 실크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짙은 아맛빛으로 보이는 머리는 집 안에 있을 때처럼 수수하게 빗겨져 있고, 두 눈은 깊고 까맸으며, 이마는 사색에 잠겨 있는 듯했다. 열정적인 얼굴 표정은 오만해 보이기까지 했다. 얼굴은 여윈 편이었으며 창백한 기가 있었다. (『백치』, 53쪽, 김근식 옮김, 열린책들, 2016)
"이 여자가 마음에 듭니까, (미쉬낀) 공작?" 그(가브릴라, 예판친 장군의 비서)는 불쑥 이런 질문을 하며 공작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이 말 속에는 심상치 않은 의도가 숨어 있는 것 같았다.
"기가 막힌 미모군요!" 공작이 대답했다. "이 여자의 운명이 평탄하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드는 군요. 얼굴은 명랑한데, 매우 고생을 했던 것 같지 않아요? 두 눈이 그렇게 말해주고 있어요. 여기 눈 아래의 뺨에 있는 광대뼈만 보아도 그래요. 자존심이 강해 보이는 얼굴이에요. 아주 자존심이 강해 보여요. 선한 여자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어요. 선하기만 하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그렇다면 모든 게 잘될 텐데요!" (『백치』, 61~62쪽)
보기 드문 미모와 다른 무엇으로 인해 그녀의 얼굴은 한층 더 강한 힘으로 그를 놀라게 했다. 그 얼굴에는 거만한 기품과 거의 증오에 가까운 경멸의 빛이 서려 있는 동시에, 남을 쉽게 믿을 듯한, 놀랄 정도의 순박한 무언가가 배어 있었다. 이 대조적인 모습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연민의 정까지 불러일으키게 했다. 그 현란한 아름다움은 참을 수 없을 정도였다. 창백한 얼굴, 푹 파인 듯한 두 뺨, 불타는 눈동자에서 우러나오는 아름다움은 특별한 아름다움이었다. 공작은 1분 동안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보다가 갑자기 정신이 드는 듯 주위를 둘러보고는 사진을 황급히 입술에 대고 키스했다. ( 『백치』, 128쪽)
"저런 미모는 힘이야!" 아젤라이다(예판친 장군의 딸)가 열띤 소리로 말했다. "저런 미모라면 이 세상을 전복시킬 수 있어!" (『백치』, 130쪽)
동양식으로 말하면 경국지색(傾國之色 : 군주가 혹하여 나라가 기울어져도 모를 정도의 미인이라는 뜻)이란 얘기다. 소설 속의 나스타시야는 인물은 빼어나지만 '지독하게 신경질을 잘 내고, 의심을 잘하는 데다 자존심이 강한' 여자다. 그 무엇에도 구애받지 않고, 그 무엇도 존중하지 않는 성미다. 불같은 성격의 소유자로 나온다.
"그저 계집한테는 그냥 채찍밖에 없어요. 안 그러면 그런 인간은 다스릴 방법이 없다고요!"
그(예브게니의 친구인 장교)는 거의 큰 소리로 말했다(그는 전부터 예브게니의 심복이었던 것 같았다).
나스타시야는 일순간 그에게로 몸을 돌렸다. 그녀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그녀는 두 발자국 가량 떨어져 있는, 전혀 생면부지의 젊은이에게 달려갔다. 그는 손에 가늘게 땋은 채찍을 쥐고 있었다. 나스타시야는 그의 손에서 그 채찍을 낚아채어 그녀를 모욕한 자의 얼굴을 힘껏 내리쳤다. 이 모든 것이 한순간에 벌어졌다. (『백치』, 540~541쪽)
성격이야 어떻든 미모의 여성에게 뭇 남성이 추파를 던지는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마찬가지다. 소설 속의 남성 군상은 모두 돈을 미끼로 그녀를 유혹한다. 나스타시야에게 오랫동안 열렬하게 구애를 해온 청년 갑부 로고진은 마침내 나스타시야에게 결혼 조건으로 거액인 10만 루블을 제시한다. 처음에는 1만8천 루블로 흥정을 시작했다. 그 뒤 4만 루블로 올렸다가 최종 10만 루블까지 간 것이다.
측은지심이 흑심(黑心)으로
나스타시야 필리포브나는 소지주의 딸로 7살 때 세습 영지에 난 화재로 어머니를 잃은데 이어 곧바로 아버지마저 병으로 여의면서 고아가 된다. 부모가 남겨놓은 재산도 없었고 돌보아줄 사람도 없었다. 그러던 차에 이웃에 살던 토츠키라는 대지주가 측은한 마음에 나스타시야를 데려와 자신의 집사에게 그의 자녀들과 함께 양육하도록 한다.
그런데 몇 년 후 나스타시야가 눈에 띄게 예쁘고 총명하게 성장한 것을 보고는 생각이 달라진다. 여자 가정교사를 붙여 교육을 시킨 다음 나스타시야를 멀리 떨어진 한적한 다른 영지로 옮겨놓고 일 년에 몇 개월씩 머물렀다. 나스타시야를 정부(情婦)로 만든 것이다.
그러던 중 토츠키가 부유한 상류층의 미인과 결혼한다는 소문이 나돈다. 나스타시야는 느닷없이 시골에서 홀로 페테르부르크로 토츠키를 찾아간다. 그녀는 자신이 그를 찾아온 것은 지금의 혼사를 훼방 놓기 위해서라고 선언한다. 나스타시야는 맨 처음 토츠키를 봤을 때부터 그에 대해 심한 경멸과 구역질 날 만큼의 혐오 이외에는 아무런 감정도 가슴속에 품어본 적이 없다고 밝힌다. 토츠키는 나스타시야의 예상치 않던 방문과 돌변한 모습에 소스라치게 놀란다.
약간 겁쟁이였던 토츠키는 나스타시야를 금전적으로 회유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보고 의중에만 있던 결혼을 포기한다. 그러고는 방향을 180도 바꿔 나스타시야를 페테르부르크로 이주시켜 아예 상류사회로 진입시킨다. 뭔가 이용 가치가 있을 것이란 생각에서였다. 토츠키는 자신이 나스타시야에게 청혼할 생각도 했으나 그녀가 청혼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고 단념한다.
그러고는 나스타시야를 예판친 장군의 비서인 젊은 가브릴라(가냐)와 결혼하도록 주선해 그녀와의 관계에서 벗어나고 싶어 한다. 그래서 나스타시야에게 가브릴라와 결혼할 경우 7만5천 루블을 주겠다고 제안한다. 이에 대해 나스타시야는 자신의 영명축일(러시아 정교회에서 세례명을 받은 날) 파티 때 그에 대한 답을 주겠다고 대답한다. 그동안 예판친 장군도 나스타시야에게 흑심을 품고 그녀에게 줄 값비싼 진주 목걸이를 부인 몰래 영명축일의 선물로 준비한다.
벽난로 불 속에 던져진 돈다발
마침내 그날이 왔다. 나스타시야가 영명축일에 로고진이 신문지에 싸서 들고 온 거금 10만 루블을 벽난로의 불 속에 던져넣는 장면은 『백치』의 하이라이트다.
손님들은 대부분 나스타시야에게 유혹의 눈길은 보내온 남자들이다. 돈이나 진주 목걸이 등을 그녀에게 미끼로 던졌던 사람들인 것이다. 나스타시야는 이들 앞에서 그 같은 기상천외한 일을 벌인다. 그러고는 구혼자 중 한 사람이며 토츠키가 결혼을 주선한 가브릴라에게 벽난로 속에 들어가 돈을 꺼내 가지라고 말한다.
"모두들 물러나세요! 가브릴라, 뭘 그렇게 서 있는 거예요? 창피해하지 말고, 기어 들어가요! 당신의 행복이 저기 있어요."
(…)
"이봐요, 돈이 다 타버려요. 모두 당신을 비웃을 거예요." 나스타시야가 그에게 소리쳤다. "나중에 억울해서 목매달아 죽겠죠. 난 농담하는 게 아니에요."
사위어가는 두 개의 장작개비 사이에서 피어올랐던 불꽃이 나스타시야가 던진 돈다발에 눌려 맨 처음에는 꺼져가는 듯했다. 그러나 아래쪽에 깔린 장작개비 한 귀퉁이에서 파란 불길이 조그맣게 불거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러다 마침내는 가늘고 긴 불길이 돈다발을 핥으며 찰싹 달라붙더니 종이 다발의 네 귀퉁이 위로 확 퍼져서 갑자기 벽난로 속을 환하게 밝혔다, 불길이 위쪽을 향해 넘실거렸다. 모두들 안타까워 어쩔 줄 모르는 신음을 내뱉었다. (『백치』, 271~272쪽)
불길을 바라보던 가브릴라는 끝내 자존심을 지키다가 기절하고 만다. 소설 속에서 가브릴라는 돈에 대해서는 지극히 치사하고 비굴한 인물로 그려져 있다. 그럼에도 그는 고문을 참아내듯 벽난로 속으로 기어 들어가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처럼 자존심을 지킨 데 대한 보상으로 나스타시야는 부젓가락으로 벽난로 속의 돈을 꺼내 그에게 준다. 돈은 신문지로 둘둘 싸인 채 던져져 다행히도 1천 루블 정도밖에는 타지 않았다.
나스타시야는 이날 돈을 들고 온 로고진의 청혼을 받아들이기로 하지만 약속을 지키지 않고 도망 다니다가 점잖은 미쉬낀 공작과 결혼하기로 한다. 미쉬낀 공작은 지나치게 순박하여 '백치'로 불렸지만, 실은 '유로지비(백치성자[白癡聖者] : 러시아인 가운데 있다는, 어리석은 것처럼 보이나 강자의 지혜를 꺾는 단순한 사람. 백치이면서 예언 능력을 지닌 것으로 믿어졌다)'로 여겨지기도 했다. 미쉬낀 공작은 불행한 운명의 나스타시야에게 연민과 사랑을 느끼며 정신적으로 불행한 그녀를 자신이 결혼을 통해 구해내야 한다고 생각해 그녀에게 청혼했고 나스타시야도 이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막상 미쉬낀 공작과의 결혼식 날, 나스타시야는 결혼식장인 교회당 앞에서 자신을 죽자 사자 쫓아다니며 결혼을 강요하던 10만 루블의 제공자 로고진을 발견하고는 별안간 태도를 바꿔 웨딩드레스를 입은 채로 그와 함께 달아난다(미쉬낀 공작이 말하는 사랑은 연민일 뿐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고 갑자기 깨달았다나…). 영화에서는 간혹 보는 장면이지만, 결혼식장에서 줄행랑을 친 신부 이야기가 한 세기 반 전 그 당시 러시아에서 더러 있었던 일인지, 아니면 도스토옙스키가 창작해낸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로고진을 따라 갔던 그녀는 결국 로고진의 집에서 그에 의해 살해당하고 만다. 잠든 사이에 칼에 찔려 조용히….
로고진은 그를 찾아온 미쉬낀 공작에게 자신이 나스타시야를 살해했음을 고백하며 "난 누구에게도 저 여자를 내주지 않기로 결심했네"라고 말한다. 로고진은 공작에게 살해 장면을 이렇게 설명한다.
"오늘 새벽 잠가놓은 서랍에서 칼을 꺼냈지. 사건이 새벽 3시에서 4시 사이에 벌어졌으니까. 칼은 책갈피 속에 끼워져 있었고…… 그런데 신기하게도 칼이 왼쪽 젖가슴 아래로 7센티미터…… 아니 9센티미터가량이나 들어갔는데도 피는 기껏 반 숟가락 정도만 옷으로 흘러내린 거야. 그 이상 흐르지 않았다고……." (『백치』, 936쪽)
작가가 앞서 『도박꾼』에서 폴리나에게 꽂아 넣고 싶어 했던 칼이 마침내 나스타시야에게 꽂힌 것같이 보인다. 폴리나와 나스타시야 둘 다 도스토옙스키가 만들어낸 수슬로바의 분신이다. 도스토옙스키가 애증의 대상이었던 수슬로바에게 가졌을 것 같은 감정의 일단이 소설을 통해 느껴진다.
소설 『백치』는 엽기적 사랑의 비참한 종말을 보여준다. 더구나 연적이었던 두 남자가 그 여성의 시체 곁에서 함께 밤을 지새우는 장면은 아무리 소설이라 할지라도 상상하기 어려운 대목이다. 살인자 로고진은 뇌염을 앓았다는 정상이 참작되어 15년의 시베리아 유형에 처해진다.
미모를 무기로 남자를 자기 손아귀에 넣어 쥐고 흔들려는 여주인공은 도스토옙스키 소설 속에 자주 등장한다. 1871년에 낸 『영원한 남편』에서도 주인공은 남성 편력이 심한 여주인공에 대해 이렇게 술회한다.
"그 여인에게는 무엇인가 아주 특별한 것, 남자를 끌어당겨 노예로 만들고 그 위에 군림하는 천부적인 재능이 있었던 것이 아닐까?"
순탄치 않았던 수슬로바의 인생
수슬로바는 당시로서는 비교적 오래(79세) 살았으나 인생은 순탄치 않았다. 마흔 살 때 16살이나 연하인 로자노프와 결혼했으나 젊은 유태인 청년 골도프시키와 사랑에 빠져 6년 만에 그를 걷어찼다. 그녀는 돌아오라는 로자노프의 말에 "당신 같은 처지에 놓인 사람이 수천 명이지만 당신처럼 짖어대지는 않아요. 사람은 개가 아니잖아요?"라고 대답했다고 콘스탄틴 모츨스키는 그의 책 『도스토옙스키』에 썼다. 이 책에는 로자노프의 수슬로바에 대한 기록도 함께 실려 있다. 그는 수슬로바의 이름도 제대로 부르기 싫어 시베리아와 중앙아시아에 주로 사는 설치류 동물인 마못의 암컷인 '수슬리하'라고 부르고 있다. 증오심의 반증이다.
내가 맨 먼저 수슬리하를 만난 것은 나의 학생 A. M. 세글로바의 집에서였다. …… 칼라와 소맷부리가 없는 검은 의상에(오빠의 장례식 때문에), 젊었을 적에 (눈부시게) 아름다웠을 듯한 그녀는 '러시아 정통주의자'였다. 능숙한 교태의 눈짓 한 번으로 그녀는 자신이 '나'를 사로잡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는 냉담하고 차분하게 말했다. 한마디로 말해서 완전히……'메디치가(家)의 캐더린'(*1519~1589, 이탈리아 메디치가 출신으로 프랑스의 왕비가 된 여인. 오랫동안 섭정을 했으며 정적들을 독살했다는 의혹을 받았다)이었다. 실제로 그녀는 메디치가의 캐더린을 닮았다. 그녀는 정말이지 대수롭지 않게 범죄를 저지를 수 있는 여자다. 또한 대수롭지 않게 사람을 죽일 수도 있었을 거다. 성 바르톨로메오의 밤에 집념에 불타올라 창문에서 위그노 교도들을 향해 신나게 총을 쏠 수 있는 사람이다. 대체로 말해, 수슬리하는 대단한 미모를 가졌다. 나는 사람들이 그녀에게 완전히 정복당하고 사로잡혀 있다는 것을 안다. 나는 그녀와 같은 러시아 여자를 본 적이 없다. 그녀는 정신적 기품에 있어서 완벽한 러시아인이다. 하지만 러시아인이라 한다면 그녀는 러시아 북부에 거주하는 구교도의 이단자, 아니 더 정확히 말해 '자기 몸을 채찍질하는 성모'쯤 될 것이다.
도스토옙스키 연구가인 모츨스키는 도스토옙스키를 일방적으로 편들지 않았다. 수슬로바와 도스토옙스키는 막상막하였다는 판정을 내린다.
수슬로바는 순진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는 싸움과 위험을 한껏 즐겼다. 그녀는 계산적이고 교활한 사랑싸움을 벌였다. 이 두 연인은 막상막하의 적수였다.
(다음 호에 계속)
<우먼센스>가 후원하고 바이칼BK투어(주)가 주관하는 '『시베리아 문학기행』의 저자 이정식 작가와 함께하는 러시아 문학 기행'이 8월 24일부터 31일까지 7박8일의 일정으로 실시된다. 자세한 내용은 우먼센스 2018.04 335쪽 참조. 문의 및 신청은 바이칼BK투어(주) 02-1661-3585.
▶ [투어]<시베리아 문학기행> 저자 이정식 작가와 함께하는 러시아 문학 기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