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없이 이야기하다 보니 로망에 대한 말만 했네요. 그동안 여러 가지 로망을 갖고 살았나 봐요.”
이제 막 KBS2 드라마 <황금빛 내 인생>을 끝낸 배우 신혜선의 이야기다. 초등학교에 갓 입학한 8살 때부터 TV에 나오는 연예인이 되는 로망을 가졌고, 얼마 후 배우의 길을 걷기로 결심했다. 이후 셀 수 없이 많은 오디션을 치르고 단역과 조연을 거쳐 한 드라마의 여주인공 자리를 꿰찼다.
신혜선은 <황금빛 내 인생>에서 ‘서지수(서은수 분)’의 쌍둥이 언니이자 ‘서태수(천호진 분)’의 큰딸 ‘서지안’으로 분했다. 해성그룹 정직원을 꿈꾸던 계약직 사원에서 해성그룹 딸이라는 인생 역전의 기회가 주어지지만 그마저도 엄마의 거짓으로 밝혀지며 나락으로 떨어지는 인물이다.
“지안이는 감정선이 예민했어요. 많은 사건을 겪으며 울었고 자존감을 잃고 절망해요. 한때 자살을 생각하기도 했죠. 늘 지안이가 힘들다고 생각했어요. 그렇게 지안이로 8개월을 살다 보니 드라마가 끝난 게 실감나지 않아요. 허무하고 공허해요.”
<황금빛 내 인생>은 웬만하면 시청률이 보장된다는 주말 저녁 드라마로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다. 그런데 그 시청률이 상상을 초월했다. 최고 시청률 45.1%(닐슨코리아 기준)로 지난해 가장 높은 시청률을 기록한 것은 물론, 2년 만에 시청률 40%가 넘은 대박 작품이 된 것. 플랫폼이 다양해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기 어려운 요즘 시대에 시청률이 40%가 넘었다는 것은 TV를 틀어놓은 모든 가정에서 <황금빛 내 인생>을 보고 있었다고 해도 무방하다.
“시청률에 연연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저도 사람인지라 신경 쓰게 되더라고요. 시청률을 계속 확인했어요. 30%가 넘었을 때 “우와” 했는데, 40%가 넘었을 때는 웃음을 감추지 못할 정도로 좋았죠. 한편으론 많은 분이 관심을 가져주시니 부담이 생기더라고요. 지안이라는 캐릭터가 하는 행동 하나하나가 평가의 대상이 되니까요. 지안이가 어떤 행동을 했을 때 돌아올 반응을 아니까 걱정도 됐어요.”
신혜선은 인터뷰를 시작하면서 조심스럽게 부탁의 말을 건넸다. 자신의 이야기 중 거만하거나 무례해 보일 수 있는 표현이 있다면 말해달라는 것. 자신의 표현이 의도와 다르게 전달될까 봐 걱정했다. 악성 댓글을 본 모양이었다.
“아무래도 제 얘기를 하는 거니까 보게 돼요. 기분 좋은 댓글도 많아요. 연기를 칭찬해주시면 좋더라고요. ‘악플’은 정말 많아서…. 연기하면서 캐릭터가 욕먹을 것 같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어요. 그렇다고 그 부분을 예민하게 받아들이면 캐릭터가 가진 특성이 사라질 수 있으니까 마인드 컨트롤을 해요. 캐릭터를 놓치면 드라마 전체가 흔들릴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더 집중하려고 노력했어요. 타이틀 롤을 처음 맡아서 잘하고 싶어 부담감도 컸고요. 사실 저는 카메라 울렁증이 있어요. 많은 사람이 제게 집중하면 울렁증이 생기더라고요. 이번엔 분량이 워낙 많아 촬영을 많이 하다 보니 얼떨결에 의연해졌어요.”
서지안에 오롯이 집중해 일 년 가까운 시간을 살아온 신혜선은 극에서 매 장면 눈물을 흘리며 시청자를 울렸다. 그도 그럴 것이 지안의 인생이 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계약직 사원에서 재벌가 3세가 되는가 하면 사랑하면 안 되는 남자와 사랑에 빠졌고 삶이 버거워 자살을 기도하기도 했다. 그뿐만 아니라 버팀목이었던 아버지는 ‘상상암(극 중 설정으로, 암에 걸렸다고 착각해 암 환자 증세를 보이는 것)’에 걸려 가족을 떠나더니 진짜로 암이란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났다. 감정 소모가 상당했을 터다.
“많이 울어서 힘들었어요. 사람이 눈물을 흘린다는 것 자체가 진이 빠지잖아요. 한 번 울면 얼굴도 붓고 온몸에 힘이 빠져요. 게다가 제가 눈물이 많은 편이 아니에요. 초반에 지안이가 우는 장면이 있으면 긴장됐어요. ‘내가 울 수 있을까? 우는 연기는 어떻게 해야 되지?’라고 생각하면서 부담을 느꼈죠.”
믿기지 않는 이야기였다. 52회가 방송되는 동안 신혜선이 눈물을 흘리지 않은 회차를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주룩주룩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고 ‘신혜선이 바로 눈물의 여왕이구나’ 하고 여겼기에 더 놀라운 이야기였다.
“우는 연기 때문에 걱정했는데 신기하게도 아빠 ‘태수’와 엄마 ‘미정(김혜옥 분)’의 눈을 보고 있으면 자연스럽게 눈물이 나왔어요. 눈물 연기를 끝까지 버티며 할 수 있었던 건 다 선생님들 덕이에요. 이런 게 선생님들이 이끌어주시는 힘 아닐까요? 그래도 눈물 연기가 어려웠던 건 사실이에요. 화를 내거나 소리를 지르는 건 감정을 잡고 하면 되는데, 눈물은 몸에서 무언가 생성돼 올라와야 하잖아요. 그런데 아무리 노력해도 눈물이 한 방울도 안 나올 때가 있어요. 눈을 부릅뜨고 시리게 해도 안 되더라고요. 그래서 한번 감정을 잡으면 그 감정을 유지하려고 노력했어요. 그 장면에 집중하고 또 집중했죠. 감독님과 스태프들도 제가 감정에 집중할 수 있게 도와주셨어요. 되도록 큰 소리가 안 나게 이야기도 속닥거리면서 해주셨어요. 많은 분이 배려해주셔서 더 열심히 할 수 있었죠. 배우로서 공부를 많이 할 수 있는 현장이었어요.”
“연애 경험이 있는 사람은 대본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폭이 다른 것 같아요.
‘연기를 위해서’라는 변명으로 연애를 하고 싶은데 기회가 없네요.”
신혜선은 드라마에 대해 이야기하는 내내 자신과 함께 연기한 천호진, 김혜옥, 나영희(‘노명희’ 역), 전노민(‘최재성’ 역)에 대한 애정을 표현했다. “태수 아빠” “명희 엄마” 등으로 부르며 그녀가 지안이를 연기할 수 있게 도와준 것에 대한 감사함을 드러냈다.
“천호진 선생님은 다가가기 쉬운 스타일이 아니에요. 후배가 다가가면 부담스러워하시거든요. 투박하게 말씀하시는 편인데 후배가 기분 나쁠 말은 절대 하시지 않아요. 속정이 느껴지죠. 그래서인지 저도 속정이 많이 들었어요. 저희 아빠랑 닮으셨거든요. 저희 아빠도 저한테 살가운 편이 아니라 천호진 선생님이 더 아빠처럼 느껴졌어요. 나영희, 김혜옥 선생님도 정말 좋아요. 제가 ‘명희 엄마’ ‘미정 엄마’가 좋은 건지 선생님들이 좋은 건지 모르겠어요.(웃음) 전노민 선생님은 저를 많이 도와주셨어요. 맛있는 것도 사주시고 조언도 많이 해주셨죠.”
극 중 연인으로 호흡을 맞춘 박시후(‘최도경’ 역)는 어땠을까? 함께 등장하는 신이 많았기에 두 사람의 호흡이 드라마의 흥망성쇠를 결정하는 키였다. 재벌가에서 잃어버렸던 딸 행세를 하면서 오빠로 여겼던 남자와 사랑에 빠지는 과정을 자연스럽게 그려내야 했기 때문이다.
“우리 드라마가 52부작이었으니까 시간이 흐를수록 호흡이 잘 맞았어요. 시후 오빠가 제가 흔들릴 때마다 절 잡아줬죠. 연기 하다가 어느 순간 멍해질 때가 있거든요. 집중력이 떨어져 흐트러질 때가 있는데, 오빠는 흔들리는 모습이 없어 제가 다시 집중할 수 있었죠.”
극에서 서지안과 최도경의 사랑은 줄다리기 같았다. 서로 사랑하지만 주변 상황 때문에 서로를 밀어냈다, 당겼다를 반복했다. 신혜선은 계속해서 최도경을 밀어내며 애틋한 마음을 품고 있는 지안이 어땠을까?
“지안과 도경의 상황이 이해됐지만 연기하는 것은 어려웠어요. 사랑이 불타올라 연인이 되는 게 아니고 계속 만나다가 밀어내는 것을 반복했으니까요. 그 ‘밀당’의 흐름을 따라가는 게 어려웠어요. 시후 오빠한테 ‘언제 연애해요? 연애하고 싶어요. 데이트하고 싶어요’라고 말하고 그랬죠. 저는 지안이랑 달라요.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니죠. 지안이처럼 누군가를 밀어낸 적은 거의 없어요. 가는 사람은 잡지 않고, 오는 사람은 막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은 것이 제 로망이거든요.(웃음) 이성 때문에 마음이 아픈 것은 일주일 안에 끝내려고 해요. 쿨하게 연애하고 싶다는 로망도 있어요.”
‘쿨내 나는’ 연애를 꿈꾸는 그녀에게 로망에 따라 쿨한 남자를 좋아하느냐고 묻자 “아니요”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20대 초반엔 티격태격하면서 연애할 수 있는 무뚝뚝한 남자를 좋아했지만 요즘엔 다정다감한 스타일의 남성에게 끌린단다.
“지금은 40살이 되기 전에 정말 나를 사랑해주는 남편을 만나는 로망을 갖고 있어요. 얼마 전 SBS <동상이몽>에 출연하신 최수종·하희라 선배님을 봤는데 정말 좋아 보이더라고요. 예전엔 닭살 커플을 싫어했어요. 서로 투닥거리는 커플이 쿨해 보였거든요. 그땐 쿨한 연애를 꿈꿨지만 이제는 직진하는 사랑을 해보고 싶어요. 서로만 바라보는 그런 사랑요.”
‘직진녀’가 되고 싶은 신혜선은 요즘 연애하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현실 말고 드라마에나 있을 법한 사랑을 해보고 싶다. 다만 출연작이 성공을 거뒀을 때 쉬지 않고 작품 활동을 이어가야 한다는 주변의 조언에 따라 1~2년 동안은 일에 몰두할 계획이라 연애하는 것이 쉽지 않을 것 같단다.
“3~4년 전에 연애를 했어요. 일이 우선순위이긴 하지만 연애는 하고 싶어요. 어쨌든 대부분의 드라마에 멜로가 나오잖아요. 제가 한 연애가 드라마 속 멜로와 같진 않겠지만 연애 경험은 연기에 도움이 돼요. 연애 경험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의 표현이 다르고, 대본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폭이 다른 것 같아요. ‘연기를 위해서’라는 변명으로 연애를 하고 싶은데 기회가 없네요.”
더 좋은 연기를 위해 연애를 하고 싶다는 신혜선에겐 오로지 연기밖에 없다. 끈기 있는 스타일이 아니라 무언가를 오랜 시간 해본 적이 없는데 연기만은 오랫동안 마음에 품고 있단다. 연기와 함께 애니메이션도 좋아한다.
“무슨 일을 하면 확 끓었다 확 식는 편이에요. 한 가지 일에 흥미를 느껴도 며칠이 지나면 까먹어버리죠.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좋아하는 건 연기하고 애니메이션뿐이에요. 3D보다는 2D 애니메이션을 좋아해요. <원피스>와 스튜디오 지브리의 애니메이션을 좋아하는데, 요즘 바빠서 거의 못 보다 보니 ‘덕심’이 사라질까 봐 걱정돼요. 한때 <원피스> 캐릭터가 나오는 꿈을 꾸고 그랬거든요. 예전엔 주변에서 애니메이션에 대해 내가 처음 듣는 이야기를 하면 자존심 상하고 그랬어요.(웃음)”
그러면서 자신의 휴대폰 케이스에 붙은 <원피스> 스티커를 내보이기도 했다. 신혜선은 한때 <원피스>에서 당차고 활발한 여자 캐릭터인 ‘나미’가 되고 싶은 로망이 있었다고 덧붙였다. 어렸을 땐 집 밖에 나가지도 않고 애니메이션을 봐서 부모님이 걱정했을 정도로 애니메이션에 푹 빠져 살았다. 그녀에게 애니메이션의 감성이 연기에 도움을 줬느냐고 묻자 잠시 고민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보니 영향을 받은 것 같아요. 애니메이션에는 다양한 감정이 표현되거든요. 캐릭터들이 연기할 수 있는 범위가 굉장히 넓어요. 사람이 따라갈 수 없는 영역이에요. 웃는데 눈물을 펑펑 흘리고, 눈동자 속에 빗금을 쳐 절망스러운 감정을 드러내니까요. 사람이 할 수 없는 것들이 쉽게 되니까 한편으론 부러워요.”
오랜 경주 끝에 잠시 한숨을 돌릴 틈을 얻었지만 신혜선은 쉬지 않고 차기작을 결정했다. SBS 2부작 드라마 <사의 찬미>에서 한국 최초의 소프라노 ‘윤심덕’ 역을 맡았다. 그녀와 비극적인 사랑을 하는 극작가 ‘김우진’은 배우 이종석이 맡았다.
“정말 신기한 게 제가 로망이 많다고 했잖아요. <사의 찬미>에 대한 로망도 있었거든요. 어느 날 라디오를 듣는데 ‘오늘의 역사’를 소개하는 코너에서 진행자가 ‘오늘은 윤심덕과 김우진이 바다에 몸을 던진 날입니다’라면서 러브 스토리를 들려줬어요. 당시 감수성이 풍부할 때라 언젠가 꼭 하고 싶은 역할이라고 생각했는데 5년이 지나고 실제로 하게 됐어요. 대본을 보자마자 해야겠다고 생각했죠. 로망으로 남겨둘 걸 그랬나라는 생각도 들지만 하기로 했으니 열심히 해야죠. 악역에 대한 로망도 있어요. 영화 <베테랑>에서 유아인 씨가 맡은 역할 같은 거요. 돈을 뿌리고 그런 것도 해보고 싶어요.”
신혜선은 어깨를 들썩이며 발랄하게 자신의 로망에 대해 말했다. 이야기를 듣다 보니 허무맹랑한 꿈이라 여겼던 ‘로망’이 오히려 자신을 성장시키는 건강한 자극제처럼 느껴졌다. 신혜선의 로망이 반짝반짝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