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 대한 막연한 동경을 품었던 사고뭉치 대전 토박이가 홀로 서울에 상경, '맨땅에 헤딩' 수준이었던 사춘기 소년이 지금은 배우 안성기를 롤 모델로 매일같이 연습하는 꿈 많은 배우가 됐다.
해야 할 일도, 하고 싶은 일도 많은 '청춘' 도지한은 최근 KBS1 드라마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종영 후 휴식을 취하고 있다. 대대손손 뼈대 굵은 종갓집 가문의 종손이자 경찰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한 엘리트 경찰 역할인데, 자신과 가족을 버리고 떠나버린 엄마에 대한 상처가 있는 캐릭터다. 경찰 동료 '무궁화'(임수향 분)와의 알콩달콩 로맨스로 여심은 물론 남심까지 자극했던 도지한을 만났다.
어느덧 데뷔 8년 차예요. <공주가 돌아왔다>를 시작으로 <돈의 화신> <화랑> 등 굵직한 드라마에 연달아 출연했어요. 그런데 처음엔 부모님의 반대가 심했다면서요?
16살 때 처음 아버지에게 배우가 되고 싶다고 말했어요. 워낙 어디로 튈지 모르는 사고뭉치였던 터라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말라면서 "공부나 하라"고 하셨죠. 밖에 못 나가게 가둬두다시피 하시다가 나중엔 저를 고모가 있는 중국으로 유학을 보내버리셨어요. 배우가 되는 게 정말 쓸데없는 일이라고 생각하셨나 봐요. 공부요? '당연히' 안 했어요. 중국에서 만난 외국인 친구들과 놀러 다니기 바빴죠.(웃음) 공부하라고 보낸 중국에서 놀기만 하니까 다시 한국으로 불러들이셨는데 자연스레 학교에선 유급이 됐고, 결국 검정고시로 고등학교를 졸업했어요. 아버지가 "대학은 가야 한다"며 재수 학원에 등록해주셨는데 또 말을 안 들으니까 그때서야 두 손 두 발 드시더군요. '너 하고 싶은 거 해봐라'라는 심정이셨을 거예요. 그렇게 서울에 올라오게 됐고, 연기 앞에선 진지해지는 저를 보고 인정해주기 시작하신 것 같아요.
그 정도로 배우가 되고 싶었던 걸 보면 어렸을 때부터 잠재된 무언가가 있었나 봐요.
처음엔 반항심에 더 그랬던 것 같아요. 하고 싶은 건 해야 하는 성격인데 자꾸 하지 말라고 하니까 더 하고 싶은 그런 심리요. 서울에 올라오던 날 아버지가 해주신 말씀이 있어요. "지금부턴 네 몫이다. 후회 없이 해보라"고 하셨죠. 그때가 19살이었으니까, 벌써 8년째 후회 없이 하고 있네요.(웃음)
왜 그렇게 배우가 하고 싶었을까요?
어렸을 때부터 혼자 영화를 보러 다녔어요. 스크린 안에서 배우들이 울고, 웃고, 싸우고, 사랑하는 모습들이 제 안의 무언가를 꿈틀거리게 했죠. '다른 건 못 해도 이건 꼭 해야겠다' 싶었어요. 유명 배우가 되지는 못하더라도 내가 한번은 해보고 죽어야 여한이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었죠.
결국 조연에서 주연으로, 지금은 앞으로가 기대되는 배우가 됐어요. 아버지도 지금은 좋아하실 것 같아요.
누구보다 좋아하세요. 제가 나오는 드라마는 다 찾아 보실 정도예요. 가족이 좋아하는 모습을 보면 그 어느 때보다 뿌듯하고 자랑스러워요. '매일 사고만 치고 다니던 철부지 사춘기 아들이 이렇게 컸어요!' 하는 마음이랄까요? 아버지도 친구분들에게 자랑하고 다니시는 것 같아요.(웃음)
아무리 좋아하는 일이라 해도 힘든 순간이 있었을 거예요. 후회도 했을 테고요.
다행히 아직까지 후회를 해본 적은 없어요. '부족하다'는 생각 때문에 하루 24시간이 모자라거든요. 대본도 봐야 하고, 연습도 해야 하고, 운동도 해야 하고요. 이것저것 하다 보면 후회할 시간이 없어요. 무엇보다 일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진 않아요. 저를 스트레스 받게 하는 건 저 자신이거든요.
스스로 스트레스를 준다는 말이군요?
낯을 심하게 가리는 성격 때문에 주변 사람들로부터 오해를 많이 받았어요. 촬영 현장에서도 막내니까 선배들에게 먼저 다가가야 하는데 전 그게 왜 그렇게 힘들었는지 모르겠어요. 쭈뼛거리다가 인사할 타이밍을 놓치기도 했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가만히 있는 경우가 많았죠. 당연히 "쟤는 누구니?" "쟤는 왜 인사도 안 하고 저러고 있니?" 하는 말이 들렸고,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스트레스가 쌓였죠. 스스로 '넌 대체 뭔데 선배들한테 인사도 안 하고 그러냐'라고 다그쳤어요.
연기하기엔 불편한 성격일 수 있었을 텐데….
사실 딱 연기만 하기엔 전혀 불편함이 없어요. 대본에 있는 대로만 연기하면 되니까요. 연기가 아닌 부분에선 힘들었죠. 처음 만나는 선배들에게 뭐라고 인사해야 하는지도 모르겠고, 혹시나 친해지기 위해 한 제 행동이 무례하게 보이면 어떡하나 싶은 걱정도 있었고요. 결국 그런 걱정이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건데 말예요. 어릴 땐 그걸 몰랐어요.
지금은 많이 달라졌죠?
사실 사람에 따라 다르긴 해요. 저와 코드가 맞는 사람들과는 금세 친해지는데 그렇지 않으면 시간이 지나도 친해지지 못하죠. 그래도 예전보단 나아요. 인사 하나만큼은 기가 막히게 하죠.(웃음) 지난 9년이라는 시간이 저를 그렇게 만든 것 같아요. 사람을 대하는 방법을 배웠고 싹싹하게 먼저 다가갈 줄도 알게 됐죠. 이제는 또래 배우보다 선배나 선생님들이 더 편할 정도라니까요.
어쩐지 오늘도 활기차게 인사하며 들어오더라고요. 성격이 변한 결정적인 계기가 있었을 것 같아요.
언제부터 성격이 달라졌는지 명확하게 기억나진 않아요. 다만 사람들에게 오해를 받는 게 죽기보다 싫어서 고민했던 건 확실해요. 실제 나는 개념 없는 사람이 아닌데, 낯을 가린다는 이유만으로 무개념 신인 배우가 되는 게 싫더라고요. 의도하지 않았는데 오해가 불거질 수 있다는 걸 알게 됐을 때부터 오해를 살 일을 만들지 말자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스트레스를 푸는 노하우가 있다면요?
딱히 없어요. 아무도 없는 집에 혼자 누워 노래 듣는 게 유일한 스트레스 해소법이죠. 친구들과 만나 술 마시고, 놀러 다니는 것도 좋지만 그러면서 오는 스트레스가 또 있더라고요. 때론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어떻게 보면 굉장히 단순한 성격이죠.(웃음)
성격에 가장 영향을 미친 건 뭘까요?
아무래도 가정환경이겠죠? 친가를 통틀어 가장 큰 맏손자예요. 덕분에 어려서부터 할머니와 고모, 삼촌들의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랐죠. 한편으론 책임감을 많이 배웠어요. '내가 잘해야 동생들이 잘된다' 이런 거요. 가장 크게 배운 건 자립심이에요. 모든 일을 스스로 해결하는 법을 터득했죠. 스트레스를 받아도 혼자 풀었고, 어떤 문제에 부딪혀도 혼자서 이겨내곤 했으니까요. 결과적으론 그런 성격이 연기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 같아요.
가족에겐 어떤 아들, 어떤 오빠인가요?
책임감 강한 아들이 아닐까요? 배우 하겠다고 혼자 상경해 지금까지 잘하고 있는 걸 보시면서 '우리 아들 대단하다'라고 생각하실 것 같아요. 아무것도 모르던 어린 도지한이 아니니까요. 어머니가 수입을 관리해주시는데, 아마 돈을 벌어다 드리는 부분에서도 뿌듯해하시지 않을까요?(웃음) 여동생과는 어렸을 땐 하루가 멀다 하고 싸웠어요. 리모컨 하나로 싸우고, 서로 보고 싶은 프로그램을 보겠다고 TV를 가로막는 게 일이었죠. 지금은 더할 나위 없이 사이좋은 남매예요. 최근 동생이 서울로 취직해서 지금은 같이 살고 있는데 오랜만에 동생과 함께 지내려니 어색하면서도 재미있어요.
친구들 사이에선 어떤 친구인가요? 학창 시절의 일부를 중국에서 보냈기 때문에 한국 친구들과의 추억이 별로 없을 것 같은데.
한국으로 돌아온 후에도 1~2년 동안은 외국인 친구들과 연락하고 지냈어요. 지금은 다들 자기의 삶이 있으니까 예전처럼 친하게 지내지는 못하고 있지만 그때 추억은 지금까지 기억에 또렷하게 남아 있죠. 중·고등학교 친구들은 모두 대전에서 지내고 있고요. 워낙 오래된 친구들이라 연락을 자주 하지 못해도 마음으로 응원해주는 사이죠. 직장인 친구들과 저는 일상 자체가 다르기 때문에 서로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는데 그런 갭을 줄여나가려고 저와 친구들 모두 같이 노력하죠.
아무리 친한 친구라도 분야가 다르면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생기기 마련이죠.
제가 일을 시작했을 때 친구들은 대학생이었어요. 처음엔 "연예인 누구 봤어?"가 대화의 주된 내용이었는데, 서른을 앞둔 요즘엔 경제적인 부분에 관심을 보이더라고요. 아무래도 또래 친구들에 비해 제가 많이 버니까 친구들은 그런 제가 부럽기도 하고 질투나기도 하나 봐요. 그런 부분에 대해선 저도 조심하려고 하죠.
친하게 지내는 연예인 친구는 없나요?
드라마 <화랑>을 통해 만났던 박서준, 박형식 등 또래 배우들과는 종종 연락하고 지내는 편이에요. 모두들 바쁘다 보니 직접 만나는 데는 한계가 있더라고요. 모든 걸 허심탄회하게 털어놓을 정도로 친한 연예인 친구는 '유키스'의 기섭이 한 명뿐이에요. 6년 전에 <레알스쿨>이라는 프로그램에서 만났는데 동갑인 데다 코드가 잘 맞아서 친해졌죠. 낯을 많이 가리는 저와 달리 그 친구는 처음 만난 사람들과도 금방 잘 어울리는 성격이에요. 제게 없는 부분을 가진 친구라 더 끌렸던 것 같아요.
우_네이비 스트라이프 배색 울 니트 아르마니 익스체인지, 버건디 믹스테이프 슈트 곽현주 컬렉션.
쭈뼛거리기 일쑤였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가만히 있는 경우가 많았죠.
그래서 생기는 오해가 가장 큰 스트레스였어요.
배우 도지한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요? 그동안 주인공을 많이 맡았던 것에 비해 인지도는 높지 않은 편이에요. 배우로서 가장 아쉬운 부분일 것 같아요.
솔직히 말하면 아쉽죠. 곧 데뷔 10주년인데 일궈놓은 게 없다는 생각도 들고요. 하지만 조바심 내지 않으려고 해요. 지금까지 출연한 모든 작품이 소중하거든요. 이번 작품 역시 긴 호흡인데도 지치지 않고 잘 끝냈구나 싶은 마음에 스스로 대견해요. 첫 촬영부터 지금까지 모든 순간이 다 기억나요. 그만큼 인기보다 작품과 연기에 충실하고 싶은 마음이에요. 그리고 열심히 하다 보면 언젠간 저도 유명 스타가 돼 있지 않겠어요?
도지한이 가진 한 방은 뭘까요?
잘생김?(웃음) 농담이에요. 사실 저도 제가 가진 결정적 한 방이 뭔지 궁금해요. 데뷔 초에는 그저 연기만 잘하면 되는 줄 알았는데, 지금은 연기 외에 많은 부분이 필요하다는 걸 깨달았죠. 다른 배우에게는 없는, 저만 할 수 있는 한 방을 찾아가고 있어요. 그래서 연기를 할 때만큼은 주저하지 않으려고 해요. 이런 역할, 저런 역할 다 해봐야 진짜 내가 잘할 수 있는 걸 찾을 수 있을 테니까요.
지한 씨가 생각하는 성공의 기준은 뭔가요?
좋아하는 일을 계속할 수 있고, 그러면서 돈을 벌 수 있고, 굶지 않고 살 수 있다면 성공한 삶이 아닐까요? 좋아하지도 않는 일을 하면서 인상 쓰고 사는 친구들이 종종 있거든요. 그들에 비하면 하고 싶은 걸 하면서 돈을 벌고 있는 저는 행복하고 성공한 삶이죠. 여기에 연기력을 인정받는 배우가 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 같아요. 안성기 선배님처럼 연기력과 인간성을 골고루 인정받는 배우가 되고 싶어요.
얼굴도, 생각도, 마음도 예쁘다. 도지한 꽃이 활짝 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