촬영장에서 벌어지는 폭력은 예술인가?
프랑스 친구들과 파티를 하다가 갑자기 분위기가 심각해졌다. 누가 음악을 바꾼 게 문제였다. “대체 무슨 일이야?” 어리둥절한 내게 친구가 설명했다. “나는 이 음악을 듣고 싶지 않아. 베르트랑 캉타라는 뮤지션인데, 그는 2003년에 여자친구를 때려 죽였어. 우발적인 행동이라고 했지만 열아홉 번이나 타격을 한 건 살인의 고의가 없다고 보기 힘들지.” 음악을 튼 친구는 아쉬운 표정으로 변론했다.
“그래도 음악은 좋단 말이야. 프랑스에는 이런 록 뮤직이 없어.” 그 순간 나는 예술가의 범죄에 들이대는 ‘그래도 작품은 좋다’라는 면죄부가 얼마나 부질없는지 깨달았다. 프랑스인이 아닌 나는 베르트랑 캉타를 모르고도 잘 살았고, 록이라면 영국이나 미국 뮤지션들로도 충분하고, 죽은 여자의 억울함을 생각해서라도 그런 음악을 소비하고 싶지 않다.
얼마 후 베르트랑 캉타의 음악을 거부한 친구와 한국 영화에 대해 얘기했다. 그는 많은 유럽인이 그렇듯 김기덕 감독 때문에 한국 영화를 알았다. 나는 그 감독이 영화 촬영 현장에서 여배우에게 사전 협의 없이 베드신을 강요하고 폭행한 혐의로 기소됐다고 전했다. 그는 의외의 반응을 보였다. “그건 예술이잖아.” 나는 혼란스러웠다. 살인은 안 되고 폭력과 성적 강요는 되는 건가? 물론 범죄의 성립 여부나 경중의 차이가 있겠지만 모두 윤리적으로는 그릇된 일이다. 혹시 예술가의 윤리적 의무는 재능과 장르에 따라 달라지나? 침실에서 행하는 폭력은 개인의 죄고, 촬영장에서 벌어지는 폭력은 예술인가? 영화를 위해서라면 살인도 용서가 될까? 아니면, 남자들에게도 벌어질 수 있는 폭력이라야 죄로 인정되는 걸까? 이런 거 너무 조잡하니까 우리 그냥 ‘죄는 죄’라고 하면 안 될까?
내가 그리 애착을 갖지 않는 분야와 예술가에 대한 이런 논의는, 영화 산업과 윤리에 관한 나의 오랜 고민 하나를 해결해주었다. 나는 최근까지도 로만 폴란스키나 우디 앨런의 영화에 어떤 입장을 취할지 난감했다. 로만 폴란스키 감독은 40년 전 미성년자에게 약을 먹이고 강간한 사건 때문에 여태 미국 땅을 못 밟고 있지만 유럽에서는 환영받는다. 그가 연출한 <악마의 씨>(1968)와 <차이나타운>(1974)은 다시 봐도 걸작이고, <피아니스트>(2002)는 좀 지루했지만 잘 만든 영화라는 데 동의한다. 우디 앨런은 과거 일곱 살짜리 양녀 딜런 패로를 추행한 혐의로 기소된 바 있다. 시나리오 작가로 자란 딜런은 2004년 우디 앨런이 골든글로브 평생공로상을 받은 데 반발해 미디어에 증언했다. 그는 “할리우드가 계속해서 앨런을 감싼다는 사실이 나의 고통을 가중시킨다”고 했다. 우디 앨런의 영화는 훌륭하지만 그게 없다고 인류가 멸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는 더 이상 그들을 존경하지 않는다.
범죄자의 생산물을 소비하는 건 자칫 악에게 먹이를 주는 일이 될 수 있다. 특히 성범죄에는 명백한 피해자가 있다. 딜런의 말마따나 가해자들의 커리어를 지탱하는 소비자가 됨으로써 우리는 피해자의 고통을 가중시키는 일에 동참하게 된다. 그럼에도 ‘금기에 도전하는 것이 예술의 의무’라는 신화 때문에 사람들은 유독 예술계의 비윤리적인 행태에 관대하다. 그런 행태가 요즘 할리우드를 뒤흔드는 하비 웨인스타인 같은 괴물을 키운 건 아닐까?
억울하지? 옛날엔 관행이었으니까
하비 웨인스타인은 1980년대 초반부터 지금까지 330여 편의 영화와 TV 시리즈를 제작하며 할리우드 최고의 파워맨으로 군림했다. 그간 <트루 로맨스>(1993), <펄프 픽션>(1994), <굿 윌 헌팅>(1997), <갱스 오브 뉴욕>(2002), <킬 빌>(2003), <화씨 9/11>(2004), <실버라이닝 플레이북>(2012) 등 수많은 걸작을 배출했다. 하지만 최근 그가 성폭행 후 돈으로 무마한 사례 8건이 한 미디어에 보도됐고, 그러자 수많은 여배우가 이 자기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고 증언했다. 그 결과 이 거물은 자신의 이름을 딴 웨인스타인 컴퍼니에서 해고되고, 오스카를 주관하는 미국 영화예술과학 아카데미에서 제명됐으며, 회사는 매각 위기에 처했다.
더욱 충격적인 건 피해 여성들의 면면이다. 안젤리나 졸리, 기네스 팰트로, 레아 세이두, 아시아 아르젠토도 신인 시절 그에게 성희롱을 당했다고 고백했다. 졸리는 오스카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대배우 존 보이트의 딸이고, 기네스 팰트로는 대부가 스티븐 스필버그이며, 레아 세이두는 프랑스 최대 영화사 ‘고몽’ 창립자의 증손녀이자 거대 미디어 그룹 ‘파테’ CEO의 손녀다. 아시아 아르젠토는 이탈리아 호러 영화의 거장 다리오 아르젠토 감독의 딸이다. 이 정도 여성들에게까지 집적거릴 정도면 눈에 뵈는 게 없었다는 뜻이고, 이 정도 여성들이니 그나마 웨인스타인에게 ‘No!’라고 말하고도 업계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을 거라고 생각하면 오싹하다. 평범한 여자들에게 그를 거부하는 건 커리어의 가시밭길로 걸어 들어가는 일이었을 것이다. 우리는 이미 ‘장자연 사건’을 통해 그들에게 닥칠 수 있는 최악의 결말을 보았다.
웨인스타인 사건과 피해자들의 용감한 증언은 영화계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행해지는 여성 학대를 돌아보는 계기가 됐다. 레아 세이두는 자신의 베드신을 끊임없이 돌려 보는 감독의 행태에 모욕감을 느꼈다고 했고, 가수 비요크는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 <어둠 속의 댄서>(2000)에 출연해 극찬을 받았지만 감독의 집적거림 때문에 영화계를 떠났다고 고백했다. 한국 영화계도 요즘 시끄럽다.
중견 배우 조덕제가 강간 장면 촬영 중 여배우의 신체를 만진 혐의로 기소돼 1심 무죄, 2심 유죄 판결을 받고 상고했으며, 에로 영화 감독 이수성은 배우 곽현화와 합의 없이 그녀의 노출신을 공개했다가 기소돼 1·2심 모두 무죄를 선고받았으나 곽현화가 상고한 상태다. 이 남자들의 억울함도 이해는 된다. 옛날엔 관행이었으니까, 연기에 몰입했으니까, 작품을 위해 그랬으니까, 배우는 작품의 도구일 뿐이니까…. 그런 사고방식이 받아들여지던 시대가 있었다. 하지만 세상은 변하고 있다. 예술계 인사들의 방종은 금기를 깨부수는 예술의 임무와는 무관하다. 타인의 의사에 반하는 폭력은 무엇으로도 옹호될 수 없다. 무엇보다, 여자들은 더 이상 예술을 미끼로 한 학대를 받아들일 생각이 없어 보인다.
영화감독 김기덕 미투 사건 관련 정정보도문
해당 정정보도는 영화 '뫼비우스' 에서 하차한 여배우 A씨측 요구에 따른 것입니다. 본지는 2019년 5월 29일 <가해자 웃고 피해자 우는 '미투' 현실>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게재한 것을 비롯하여 약3회에 걸쳐 "영화 '뫼비우스' 에 출연했으나 중도에 하차한 여배우가 김기덕 감독으로부터 베드신 촬영을 강요당했다는 내용으로 김기덕을 형사 고소했다" 는 취지로 보도하였습니다.
그러나 사실 확인 결과, ' 뫼비우스' 영화에 출연하였다가 중도에 하차한 여배우는 '김기덕이 시나리오와 관계없이 배우 조재현의 신체 일부를 잡도록 강요하고 뺨을 3회 때렸다는 등' 의 이유로 김기덕을 형사 고소하였을뿐, 베드신 촬영을 강요하였다는 이유로 고소한 사실이 없으므로 이를 바로잡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