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CN 드라마 <구해줘>가 끝난 지 한 달이 지났고, 이미 MBC 드라마 <병원선>에 출연 중인데도 여전히 조성하에게서 <구해줘>의 사이비 교주 '백정기'가 보인다. 전에 없던 사이비 교주 캐릭터를 자기 몸에 딱 맞는 사이즈로 재단한 그의 연기력 때문일 테고, 브라운관 속의 강렬했던 모습이 아직도 잔상으로 남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조성하에게 진짜 자기 모습을 보여달라고 했다. 무거운 재킷을 벗기고 한결 가벼운 슈트를 입혔고 구두가 아닌 운동화를 신겼다. 하고 싶은 대로 해보라고 했더니 비로소 자신의 진짜 모습을 드러냈다. 음악에 맞춰 가볍게 몸을 흔들었고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이기도 했다. 그는 때로 몸을 던져 주위를 웃길 줄 알고 속 깊은 이야기로 여운을 남기기도 하는, 진하고 따뜻한 사람이었다.
<구해줘>가 끝나자마자 바로 <병원선>에 합류했어요.
사실 <구해줘>에서 연기한 '백정기'가 보통 캐릭터가 아니잖아요. 거짓으로 사람들을 홀려야 하는 사이비 교주…. 한마디로 주변에선 볼 수 없는 미치광이 캐릭터를 연기한 지 일주일 만에 다른 작품에서 전혀 다른 캐릭터를 연기한다는 게 정신적으로나 체력적으로 쉬운 일이 아니죠. '내가 잘하고 있는 건가' 싶은 생각을 떨칠 수가 없어요. 쉼 없이 달려와서 그런지 스스로 제 연기가 만족스럽지 않거든요.
그래도 연기가 삶의 낙이잖아요.
원래는 그렇죠. 힘들어도 카메라 앞에만 서면 힘이 났으니까요. 한데 요즘엔 낙이 없네요.(웃음) 작품 하나가 끝나면 가족과 여행도 가고 딸들과 데이트도 해야 '이 맛에 힘들어도 연기를 하는구나' 싶어 기운이 나는데 요즘은 가족과 대화할 잠깐의 여유조차 주어지지 않네요. 딸들이 웃는 모습을 보는 게 유일한 낙인데….
평소에도 두 딸에 대한 애정을 드러내왔어요. 예능 프로그램 <인생술집>에선 오현경 씨와 딸 자랑 배틀을 벌일 정도였죠.
집에서의 저와 연기할 때의 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에요. 집에선 만만한 아빠, 허접한 아빠, 약간은 바보스러운 아빠죠. 웬만하면 딸들 앞에서는 대본을 안 보려고 해요. 같이 밥 먹고, 쇼핑하고, TV 보고, 영화 보는 데 시간을 더 많이 할애하려고 하죠. 큰딸은 대학교 기숙사에서 생활하는 중이라 주말마다 집에 오는데 함께할 시간이 별로 없으니 더 애틋하죠. 둘째 딸은 중학교 3학년인데 가끔 제게 SOS를 쳐요. "아빠, 나 어디 식당에서 밥 먹었는데 와서 계산 좀 해줘~"하는 식이죠. 그럼 전 또 득달같이 가서 깔끔하게 처리해주곤 합니다.(웃음) 그런 게 아빠로서 삶의 재미고, 낙이 아닐까요?
큰딸은 지난해 함께 방송에 출연하기도 했어요. 미모가 눈에 띄었던 걸로 기억해요.
큰딸은 배우가 꿈이에요. 배우가 되고 싶다는 딸에게 가장 먼저 제안한 게 아프리카 봉사 활동이었어요. 진정한 배우는 연기를 잘하는 것보다 나와 다른 사람, 나보다 어려운 사람을 만났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아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거든요. 봉사를 통해 배우는 모든 것이 결국 연기에 도움이 되니까요. 그래서 2014년과 올해 우간다에 다녀왔어요. <희망TV SBS>를 통해 그 모습이 방영됐는데, 다행히 딸을 좋게 봐주시는 분이 많더라고요.
딸이 배우가 되겠다고 했을 때 걱정되지는 않던가요?
나중에 다른 길을 가게 되더라도 선을 다했다면 그 열정은 무엇으로라도 보상 받기 마련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지금은 일단 열심히 해보라고 말했어요. 연기자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배우는 추진력, 기획력, 표현력 등은 무슨 일을 하더라도 도움이 될 만한 능력이잖아요. 딸이 훌륭한 배우가 되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그렇지 않아도 괜찮아요.
둘째 딸은 어떤 딸인가요?
"꿈이 없다"고 말하던 둘째 딸에게 최근 꿈이 생겼어요. 미술을 배우기 시작했죠. 활발하고 쾌활한 성격이라 "한두 달 다니다가 그만둘 거면 시작도 하지 마라"라고 단호하게 말했더니 "열심히 하겠다"고 해서 믿고 보내줬는데 생각보다 곧잘 그려 오더라고요. 손재주가 좋은 건 알고 있었지만 예술적 감각이 있는 줄은 몰랐던 터라 조금 놀랐어요. 딸의 재능을 발견했다는 기쁨보다 딸에게 꿈이 생겼다는 게 더 좋아요.
딸 앞에선 한없이 작아지는 아빠인데, 아내에게도 사랑꾼 남편이겠죠?
예전엔 소소한 이벤트도 자주 하는 다정한 남편이었는데 요즘엔 영 매력 없는 남편이죠. 아내 입장에선 제가 활동을 많이 하지 않았을 때가 더 좋았을 거예요. 그땐 집에서 함께 보내는 시간이 많았고 살림도 곧잘 도와주는 '착한 남편'이었으니까요. 요즘엔 예전처럼 아내와 시간을 많이 보내지 못하니까 내심 서운해하는 눈치더라고요.
가정적이고 소탈한 모습은 사람들이 잘 알지 못한 의외의 면모인 것 같아요.
또 다른 의외의 면도 있죠. 그동안 맡았던 역할들이 워낙 임팩트가 강했기 때문에 무서울 것 같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데 알고 보면 굉장한 개구쟁이예요. 장난기 많고 사람들과 어울리는 걸 좋아하고, 물렁물렁한 구석도 있고요. 가까운 지인들은 예능형 배우라고 할 정도로 예능감도 있어요. 기회가 된다면 '웃긴' 제 모습도 보여드리고 싶어요.
진짜 자신의 모습 중에 변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부분도 있나요?
욕심이 너무 많다는 게 저의 단점 중 하나예요. 외국어 공부와 다양한 취미 생활도 하고 싶은데, 그러려면 뭔가 하나는 포기해야 하잖아요. 이를테면 사람들을 만나는 시간을 좀 줄인다거나 하는 식으로요. 그런데 전 인간관계에 대한 부분은 포기하지 못하겠어요. 아무리 바빠도 시간을 쪼개 친구들을 만나야 하고, 술 한잔 기울이며 하루를 이야기해야 하죠. 버킷 리스트를 다 이루려면 인간관계에 대한 욕심을 좀 버려야 하는데 그게 잘 안 돼요.
조성하의 삶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게 인간관계인가 봐요?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게 사람이죠. 가족, 친구, 동료, 스태프…. 그렇다고 그게 전부는 아니에요. 가장 우선인 건 가족이고, 두 번째가 일이고, 인간관계는 세 번째쯤 되겠네요. 그런데 생각해보면 인간관계가 참 중요하긴 해요.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가 원만해야 일도 잘 풀리고, 가족과 화목해야 건강한 마인드가 생기기 마련이잖아요. 그래서 그런지 평소에도 사람들과의 트러블을 의도적으로 피해요. 말도 예쁘게 하려 하고 최대한 그들의 기분과 상황을 존중해주죠. '좋은 게 좋은 거다'가 제 생활신조거든요.(웃음) 촬영 현장에서도 마찬가지예요. 현장 분위기를 원활하게 주도하려고 하는 편이죠. 현장 분위기가 좋아야 연기도 더 잘되기 마련이니까요.
기회가 된다면 '웃긴' 제 모습도 보여드리고 싶어요.
이번엔 배우 조성하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요? 배우로서 조성하를 자평해본다면 어떤가요?
제게서 '사람'을 빼면 결국 '배우'만 남아요. 배우로서도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크죠. 그렇다 보니 늘 새로운 걸 갈구할 수밖에 없어요. 제 나이에 제가 할 수 있는 연기는 결국 아버지 아니면 형사니까 조금이라도 색다른 캐릭터다 싶으면 주저 없이 "OK!"해요. 그래서 사이비 교주라는 파격적인 캐릭터임에도 <구해줘>를 단번에 선택할 수 있었죠. 다음에도 그동안 해보지 않았던 캐릭터라면 힘들더라도 도전할 거예요. 저도 제 한계를 시험해보고, 대중에게도 다양한 면모를 보여주고 싶거든요.
새로운 연기에 대한 갈증은 언제부터 시작됐나요?
연극배우일 때부터요. '오늘은 새로운가?' '내일은 또 어떤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지?' 하는 고민의 연속이었거든요. 그땐 앙코르 공연에 캐스팅되는 게 죽기보다 싫었어요. 이미 다른 배우가 연기한 캐릭터를 뒤따라서 하는 기분이었거든요. 저만 보여줄 수 있는, 비교 불가한 배역을 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똘똘 뭉쳐 있었죠. 지금도 마찬가지고요. 배우로서 해결해야 하는 숙제라고 생각해요. 아직 풀지 못한 숙제랄까요?
그런 의미에서 선역부터 악역, 사이비 교주까지 다양한 역할을 해온 걸 보면 배우 조성하가 걸어온 길은 탄탄했네요.
자랑은 아니지만 스스로 자부하는 것 중 하나예요. '해마다 조금씩 성장해왔구나' 싶어요. 초심을 잃지 않기 위해 신인 배우라는 생각을 놓치지 않으려고 스스로를 채찍질하죠. 사실 드라마 쪽은 데뷔를 늦게 해서 신인이나 마찬가지이긴 해요.(웃음)
초심을 지킨다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닌데 말이죠.
매번 다른 캐릭터를 연기하니까 어쩔 수 없이 초심으로 돌아가요. 작품을 할 때마다 처음 만나는 감정 앞에선 당황스럽고 난감하거든요. 그때마다 선배들에게 물어봐요. "이럴 땐 어떻게 연기해야 해요?" 하고요. 새로운 캐릭터를 연기할 땐 신인 배우인 거죠. 절대 창피하지 않아요. 배우는 도전의 연속이니까요.
배우라는 직업의 가장 큰 매력은 뭔가요?
전에 없던 걸 창조하는 직업이라는 게 매력적인 것 같아요. 모두가 좋아할 만한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거잖아요. 고민하고, 연습하고, 또 고민하고, 연습하는 힘든 과정 끝에 사람들이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는 건 마약과도 같죠. 그런 의미에서 우리나라 방송과 영화 산업이 배우 개개인의 역량을 충분히 끌어내서 보여줄 수 있는 환경이 됐으면 좋겠어요.
참, 후배들이 잘 따르는 선배 배우로도 소문이 자자해요.
좋은 선배가 된다는 건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기보다 후배들이 편하게 실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기다려주는 거예요.
"자, 이제 너의 끼를 분출해 봐!" 하고 멍석을 깔아주는 것만이 좋은 선배는 아니죠. 모든 작품에 성실하게 임하되 후배들에게 누가 되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내공있는 연기로 선배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도 중요하고요.
그렇다면 좋은 후배는 어떤 후배인가요?
간단해요. 인사성 바르고 뭐든 열심히 하는 후배가 예쁘죠. 웃는 얼굴에 침 뱉을 수 없잖아요. 성실하게 임하려는 자세만 있다면 연기를 좀 잘하지 못하더라도 괜찮아요. 시간이 지나서 그 친구에게도 내공이 쌓이면 연기력은 늘기 마련이거든요. 무엇보다 눈이 빛나고 가슴이 따뜻한 배우라는 게 느껴지면 매료되게 돼 있어요. 하지만 인성은 선배가 만들어줄 수 없는 부분이죠. 그런 의미에서 <구해줘>를 통해 만난 (서)예지와 (우)도환이, (옥)택연이는 최고의 후배였어요. 착하고 열정 넘치는데 연기까지 잘하니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후배죠.
올 한 해는 조성하에게 어떤 기억으로 남게 될까요?
2017년은 제게 '백정기'의 해죠. <황진이>로 드라마에 데뷔했고, '나도 왕을 연기할 수 있을까' 싶었던 우려를 불식시킨 <성균관 스캔들>이 있었고, <황해>로 영화 시장에 발을 들였고, <왕가네 식구들>로 '국민 사위'라는 별명을 얻었죠. 배우 인생에 전환점이 되는 작품은 늘 있었지만 <구해줘>는 특히 기억에 남을 작품이에요. 영화에서도 만나기 어려운 캐릭터를 드라마에서 만났고, 많은 사랑을 받았고, 그로 인해 배우로서 또 다른 가능성을 보여준 캐릭터니까요. 내년엔 또 어떤 작품, 어떤 캐릭터를 만날지 벌써부터 기대되고 설렙니다.
조성하의 다음을 기대해도 좋다. 그는 반전이 있는 배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