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할린에 가다
안톤 체호프는 1890년 7월부터 불과 석 달간 사할린에 머물렀으나 그의 족적은 사할린 전역에 남아 있다. 그뿐만 아니라 사할린 최고의 문화 아이콘이 되어 이곳에서 여전히 왕성한 생명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필자는 안톤 체호프의 흔적을 찾아 2017년 8월 12일 처음으로 사할린에 갔다. 그동안 쓰고 있던 책 『시베리아 문학 기행』을 마무리하기 위한 여행이었다. 이날 새벽 5시 집을 나설 때 서울의 기온은 영상 25°C, 사할린의 주도(州都) 유즈노사할린스크는 13°C라고 스마트폰에 떴다. 낮 최고 기온은 서울 32°C, 유즈노사할린스크 16°C라고 나왔다. 여름에서 가을로의 여행이었다. 인천 공항에서 2시간 40분 만에 사할린에 도착했다. 비행시간표에는 3시간 10분이 걸리는 것으로 나와 있는데, 실제 비행시간은 30분이나 짧았다. 하지만 유즈노사할린스크 공항 출입국 심사대에서 1시간 이상 진을 빼는 바람에 첫인상은 그리 상큼하지 않았다. 공항에는 사할린 우리말 방송국의 김춘자 국장이 마중을 나왔다. 여걸 스타일의 김 국장은 10여 년 전 세계한인기독교방송협회 일로 필자가 일하던 목동 CBS에 가끔 드나들었으나 오랫동안 연락이 끊긴 상태였었다. 사할린에 가기로 마음먹은 후 수소문하여 김 국장과 연락이 닿았다. 아직도 우리말 방송 일을 하고 있는 그녀와 유즈노사할린스크 공항에서 해후한 것이다.
공항에서 시내는 별로 멀지 않았다. 건물들은 나지막했으나 도시는 잘 정비되어 있었다. 도로는 일직선으로 쭉쭉 뻗어 있었다. 높은 건물은 별로 눈에 띄지 않았다. 지진에 대한 우려 때문에 오랫동안 건물의 높이를 5층 이하로 제한했다고 한다. 지금은 12층까지는 건축이 가능하다고 했다. 김 국장이 예약해놓은 호텔은 공항에서 시내로 들어가는 길목에 있었다.
호텔에 짐을 두고 바로 나와 먼저 시내의 체호프 박물관부터 찾았다. 체호프 박물관의 정식 명칭은 ‘안톤 체호프 책 『사할린섬』 박물관’이다. 박물관은 공원 한편에 자리하고 있었는데, 박물관 앞에 체호프의 책 『사할린섬』을 형상화한 조각 작품이 먼저 눈길을 끌었다.
외부와 구분해놓은 박물관의 철제 울타리 안으로 들어가자 이번에는 건물로 들어가는 계단 앞쪽 높은 자작나무 아래에 체호프의 흉상이 우뚝 서 있었다.
박물관 건물은 2층 구조로 1층은 체호프 관련 두 개의 전시실로 이루어져 있다. 2층에서는 이날 체호프와 직접 관련 없는 러시아 유명 화가의 작품을 전시 중이었다.
첫 번째 전시실에는 1890년 7월 체호프가 사할린 여정을 시작한 알렉산드롭스크의 옛 모습과 수용소 내부를 재현해놓았다. 벽면에 걸린 옛 알렉산드롭스크 그림에는 앞바다에 있는 삼형제 바위의 모습이 또렷했다.
족쇄를 찬 채 거적을 덮고 잠을 자는 유형수들의 디오라마(박물관의 입체 모형) 등 당시 수용소 내부를 실제 크기로 보여주고 유형수의 족쇄, 작업할 때 쓰던 도끼 등 도구들도 전시해놓았다. 『사할린섬』에 길게 서술된 이곳 원주민인 길랴크인(니브흐인)과 아이누인에 대한 설명도 사진과 함께 적혀 있었다.
길랴크인은 러시아 극동 지방의 소수민족으로 지금은 니브흐인으로 불린다. ‘길랴크’는 이 사람들 말로 ‘노를 젓는 사람들’이라는 뜻이며, ‘니브흐’는 ‘사람’이라는 의미라고 한다.
필자는 길랴크인의 사진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오래전에 찍은 것이어서 또렷하지 않았다. 체호프는 그의 책에서 길랴크인에 대해 많이 써놓았다. 일본의 유명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는 체호프 책에 나오는 길랴크인에 대한 이야기를 그의 소설 『1Q84』에서 여러 페이지에 걸쳐 인용했다. ‘체호프의 『사할린섬』에는 길랴크인에 대해 이렇게 쓰여 있다’며 상대에게 한참 동안 읽어주는 형식이다. 많이도 써먹었다는 생각이 든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소설 속에 ‘게다가 당시에는 아직 시베리아 철도가 없었기 때문에 그는 마차를 타고 4천여 킬로미터나 되는 극한의 땅을 달려야 했다’라고 썼다. ‘4천여 킬로미터’가 아니라 ‘1만 킬로미터에 이르는’ 정도로 해야 독자가 혼동하지 않을 것이다. 체호프는 기차, 마차, 선박을 이용해 모스크바에서 사할린까지 거의 1만 킬로미터를 여행했다. 기차와 선박 이용 구간은 길지 않다.
다음은 체호프가 『사할린섬』에서 길랴크인에 대해 설명한 내용 중 일부다.
길랴크인 이야기
길랴크인의 얼굴은 달처럼 둥글고 편평하고 황색이며 광대뼈가 튀어나왔고 얼굴을 씻지 않는다. 눈은 옆으로 찢어졌고 듬성듬성하거나 눈에 잘 띄지 않는 턱수염이 있다. 머리칼은 직모로 검고 뻣뻣하며 뒤로 묶어둔다. 표정은 미개인이라는 느낌을 주지 않으며 항상 영리하고 부드러우며 순진하고 주의 깊다. 그 표정은 행복하게 활짝 웃는 모양이거나 혹은 과부처럼 생각에 잠겨 슬프게 보인다.
길랴크인은 다부지고 땅딸막한 체격으로 신장은 중키거나 오히려 작은 편이다. 키가 컸다면 타이가 숲에서는 매우 불편했을 것이다. 뼈는 굵고 근육에 붙어 있는 뼈의 말단, 융기, 결절의 견고한 발달이 특징이다. 이것은 견고하고 강한 근육이나 자연과의 끊임없는 긴장된 투쟁을 우선 떠올리게 한다.
몸은 마른 편으로 근육질이고 피하지방이 없다. 뚱뚱한 길랴크인은 만나지 못했다. 모든 지방은 열을 위해 소비되는 것이 분명하다. 이 열을 사할린인들은 낮은 기온과 극단적인 습기로 빼앗기는 부분을 보충하기 위하여 자신의 몸속에서 만들어내야 한다. 왜 길랴크인이 음식을 통해 그렇게 많은 지방을 섭취하는지 이해가 된다. 길랴크인은 기름진 바다표범 고기나 연어, 용철갑상어와 고래 기름, 피가 돋는 날고기를 그것도 매우 많은 양을 날것으로나 말려서 그리고 냉동하여 자주 먹는다. 그래서 거친 식사로 인하여 턱의 교근(咬筋)과 이어지는 부분이 유난히 발달해 있으며 모든 이빨은 매우 닳아 있다.
음식은 대부분이 육식이고 드물게 집에서 식사하거나 술을 마시거나 할 때에만 고기와 생선에 만주산 마늘이나 나무 열매를 곁들인다. (…) 길랴크인들은 농업을 죄로 여기므로 누군가가 땅을 파거나 뭔가를 심는다면 반드시 죽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러시아인들로부터 알게 된 빵을 그들은 진기한 음식처럼 기쁘게 먹으며, 지금은 알렉산드로프스크나 르이코프스코에에서 커다란 둥근 빵을 옆구리에 끼고 다니는 길랴크인을 종종 볼 수 있다.
체호프의 길랴크인에 대한 관심은 그가 사할린 여행을 준비하면서 탐독한 이반 알렉산드로비치 곤차로프(1812~1891)가 쓴 『전함 팔라다』에서 비롯되었을 수도 있다. 『전함 팔라다』는 하나의 여행기다. 곤차로프는 모스크바 대학 문학부를 졸업하고 정부에서 관료 생활을 하다 소설가가 된 사람이다. 그는 1852년 제독 푸탸틴(뿌쨔찐)의 비서로 전함 팔라다호를 타게 되었다. 팔라다호는 승선 인원이 4백 명이나 되는 큰 배였다. 팔라다호는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출발해 아프리카 남단과 인도양, 남중국해를 돌아 중국, 일본, 조선에 들렀다. 그리고 시베리아와 사할린섬 사이의 타타르만을 지나 사할린 북쪽 오호츠크해까지 갔다. 곤차로프는 그곳에서 육로로 시베리아를 거쳐 1855년 2월 13일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왔다.
그는 귀환 3년 후인 1858년 『전함 팔라다』라는 여행기를 냈는데, 여기에 길랴크인에 대해 이렇게 기술하였다.
길랴크족에 대해서 말하면 그들은 이곳에서 바람에 부러져 떨어진 나뭇가지 무더기 아래서 영하 36℃에도 살아간다고 했다. 심지어는 젖먹이 아이를 데리고 있는 엄마들도 그렇게 산다고 한다. 몸을 녹이고 싶으면 모닥불을 피우고, 송어와 곰마늘(마늘의 한 종류)을 먹는다. (『전함 팔라다』, 문준일 옮김, 동북아역사재단, 2014)
3 사할린의 명물 킹크랩. 장닭 한 마리보다 크다. 4 체호프 부부.
체호프 방문 당시 사할린섬의 여러 모습을 재현해놓은 첫 번째 전시실에는 1895년에 나온 『사할린섬』 초판본도 유리 상자 속에 전시되어 있었다.
박물관의 두 번째 전시실에는 체호프의 작품집, 사진 등과 더불어 『사할린섬』을 번역해 발행한 여러 나라의 책을 전시해놓았는데, 우리나라 동북아역사재단에서 출판한 에메랄드색 표지의 『안톤 체호프 사할린섬』도 눈에 띄었다.
유즈노사할린스크 시내 사할린 주정부 청사 앞에는 큰 규모의 체호프 극장이 있다. 시립 미술관 앞 공원에는 다리를 꼰 채 앉아 있는 체호프의 동상이 있고, 이 공원은 ‘체호프 공원’으로 명명되어 있었다. 또한 타타르 해협 쪽 중북부 항구도시 알렉산드롭스크에도 체호프 박물관과 체호프 동상이 있으며 사할린 남부 서쪽 해안에는 그의 이름을 딴 체호프 마을이 있다.
쓸쓸한 체호프 마을을 지키는 그의 흉상
체호프 마을에는 도착 이튿날 찾아갔다. 거리는 약 150km. 소요 시간은 2시간 반가량. 유즈노사할린스크에서 서쪽에 있는 항구도시 홀름스크까지 가서 해안도로를 타고 북쪽으로 50km가량 올라가야 했다.
홀름스크로 가는 도중 포쟈르스코에 지역을 지날 때 도로 인근에 세워진 ‘한국인 피살자 27인 추념비’에 잠시 들러 일행과 함께 묵념을 하였다. 추념비는 1945년 8월 20일에서 22일 사이 태평양전쟁에서 패망한 일본인들에 의해 분풀이 대상으로 학살당한 사할린 한인 27명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세워진 것이다(주: 이 학살 사건에 대해서는 다음 호에서 상술할 예정이다).
홀름스크까지는 도로가 좋았으나 그곳부터 체호프 마을까지는 비포장도로였다. 마을 입구에는 ‘체호프’라고 쓰인 표지판이 우뚝 서 있었다. 표지판을 카메라에 담기 위해 잠시 내렸을 때 우연히 이곳이 고향이라는 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 사할린 주립대 교수를 만났다. 그분은 나와 함께 간 김춘자 국장이 길 옆에 서 있는 것을 보고 차를 세웠다고 했다. 두 분은 오래전부터 잘 아는 사이였다.
바실렙스키 교수를 통해 체호프 마을의 유래를 잠시 들을 수 있었다. 체호프 마을은 일본이 40년간 남부 사할린을 지배할 때 일본 이름을 갖고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전한 일본이 쫓겨 나간 후 1947년에 다시 이름을 붙이면서 사할린과 인연이 있는 문호 체호프의 이름을 붙였다. 체호프 마을은 한때 인구가 1만2천 명에 이르는 시(市)였다. 어업과 농업을 주로 하고 수산물 가공 공장, 선박 수리 공장, 제지 공장까지 있어 활기가 넘쳤으나 언제부터인지 쇠락하기 시작해 지금은 인구 3천 명으로 촌(村) 규모에 지나지 않는다. 이곳을 체호프 마을이라고 부르는 이유다. 필자는 체호프 동상 같은 것이 있을지 모르니 동네를 돌아보자고 했다.
마을은 폐쇄된 공장들과 폐허가 된 아파트들 때문에 을씨년스러웠다. 차로 천천히 마을을 돌아보는데 체호프 흉상이 갑자기 눈앞에 나타났다. 차를 멈췄다. 김춘자 국장도 이곳에 체호프 흉상이 있는 줄은 알지 못했다고 했다. 체호프 마을을 떠나 홀름스크에서 점심을 먹고 유즈노사할린스크로 돌아오는 내내 추적추적 비가 내렸다.
러시아에 의해 사할린이 개발된 것은 19세기 중엽부터다. 러시아는 이곳을 개발하기 위해 많은 유형수들을 보냈다. 그러나 사할린 유형수는 다른 시베리아 유형수와 달리 가혹한 환경 속에서 가까스로 형기를 마친 후 농민으로 신분이 바뀌어도 사할린섬을 떠날 수 없었다. 강제 노동형과 종신 유배형을 함께 받은 셈이다. 사할린의 노동력 확보를 위한 비인간적인 조치였다.
체호프는 절망적 상황에 처한 사할린 유형수들의 비참한 실태를 1895년 『사할린섬』이라는 책으로 펴냄으로써 사할린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불러일으켰으며 차르 정부가 일부나마 문제점을 시정하는 단초를 던져줬다. 사할린이 오랫동안 체호프를 기억하고 기리는 이유라고 할 수 있다.
체호프의 생애
체호프는 1860년 1월 17일 남러시아 아조프해의 항구도시 타간로크에서 태어났다. 농노해방이 선포되기 한 해 전이다. 체호프의 할아버지는 농노였으나 스스로의 힘으로 자유를 찾은 사람이었으며 아버지 파벨은 타간로크에서 식료품 잡화상을 했다. 그러나 체호프가 16세 때 장사가 잘 안 되어 파산하고 모스크바 빈민촌으로 이주했다. 정상적인 이주가 아니고 빚쟁이들을 피해 야반도주를 하는 바람에 가족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아버지는 폭군이었다. 자식들을 늘 매로 다스렸다. 체호프도 늘 매를 맞으며 자랐다. 그는 어려서 다른 친구들도 다 아버지에게 매를 맞는 것으로 알았다고 한다.
체호프는 고향에서 김나지움을 졸업하고 1879년 모스크바 의과대학에 들어갔다. 그 후 학비와 생활비를 벌기 위해 유머 잡지에 콩트를 투고하기 시작했다. 필명은 자신의 이름과 비슷한 ‘안토샤 체혼테’로 했다. 체호프는 셋째 아들이었으나 두 형이 가족을 돌보지 않아 가계도 책임져야 했다.
인기 유머 작가가 되면서 1884년에는 필명 안토샤 체혼테로 6개의 단편을 실은 『멜리포메나 이야기』를 출간했는데, 이것이 그의 첫 작품집이다.
이 무렵 체호프는 그를 눈여겨본 문단의 원로 작가 그리고로비치(1822~1899)로부터 “본명으로 작품을 발표하라”는 충고를 받고 본명을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로비치는 체호프를 당대 유력 신문인 <신시대>의 사장 수보린에게 소개한다.
체호프는 1888년 그간 발표한 단편들을 모은 『황혼』으로 러시아학술원의 ‘푸시킨상’을 받으면서 작가로서 성공 가도에 들어선다. 이즈음부터 그는 러시아의 동쪽 끝에 있는 유형수의 섬, 사할린을 방문하기 위해 준비를 시작한다.
체호프는 앞에서 말한 곤차로프의 『전함 팔라다』 등 사할린, 시베리아 여행과 관련한 많은 서적과 자료들을 읽었다. 만약의 경우에 대비해 권총도 마련했다. 이 무렵 예기치 않게 당시에는 불치병이었던 폐결핵이 발병하지만 그는 당초 계획대로 1890년 4월, 험난한 여행길에 올랐다. 그는 돌아온 후 여행기를 <신시대>에 연재하기로 수보린과 약속하고 후원금과 특파원 자격을 얻었다.
의학은 본처, 문학은 애인
여행에서 돌아온 다음 해인 1891년 체호프는 수보린과 함께 남유럽을 여행한다. 이해에 중편소설 『결투』를 완성하는데, 이는 그 후에 쓴 『6호실』 등과 함께 톨스토이주의와 결별한 것으로 분석되는 작품이다.
1892년에는 모스크바 남쪽 멜리호보에 있는 전답을 사들여 온 가족이 이사를 한다. 그는 멜리호보에서 6년간 머물렀다. 이곳에서 그는 대표적인 희곡 『갈매기』 등 많은 작품을 썼다. 콜레라가 창궐할 때는 지역의 공중보건의로도 활동했다. 농민들을 상대로 무료 진료도 했다. 1896년에는 멜리호보에서 가까운 타레시 마을에 초등학교를 세웠다.
『사할린섬』은 <신시대>에 실리지 않고 잡지 <러시아 사상>에 1893년 10월호부터 이듬해 7월호까지 실렸다. 단행본으로는 1895년에 나왔다. 1895년에는 야스나야 폴랴나에 있는 톨스토이를 방문하기도 했다. 체호프가 살던 멜리호보와 야스나야 폴랴나는 멀지 않은 거리에 있다. 체호프는 1901년 9월, 톨스토이가 요양차 머물던 크림반도의 가스프라에도 갔었다.
체호프의 희곡 『갈매기』는 1885년 초고를 완성해 1896년 10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알렉산드린스키 극장에서 초연되지만 형편없는 작품이란 혹평을 받았다. 그 후 『갈매기』는 많은 수정 작업을 거쳐 1898년 12월 모스크바 예술극장에서 재상연해 대성공을 거두었다. 그 후 『바냐 아저씨』 『세 자매』 『벚꽃동산』 등 불후의 명작이 잇달아 태어났다.
체호프는 1898년 그의 희곡이 모스크바 예술극장에서 상연될 때 여배우 올리가 크니페르를 만났다. 크니페르는 당시 이 극장의 간판 여배우였다. 두 사람의 관계는 1900년경부터 빠르게 발전되어 1901년 5월 결혼식을 올렸다.
체호프의 건강 상태는 1900년부터 나빠지기 시작했다. 1902년에는 아내 크니페르도 병이 들어 그는 병든 몸으로 아내의 병간호까지 해야 했다. 1903년 1월에는 늑막염도 앓았다.
『벚꽃동산』은 이해 여름 집필에 들어가 10월에 탈고했다. 12월에는 아픈 몸으로 『벚꽃동산』 연습 과정을 보러 다녔다. 『벚꽃동산』은 1904년 1월 초연되어 큰 호평을 받았다.
병이 깊어진 그는 1904년 6월 3일 남독일의 바덴바일러로 요양을 떠났다. 그러나 건강을 회복하지 못한 채 7월 3일 그곳에서 장결핵으로 눈을 감았다. 유해는 7월 9일 모스크바로 돌아와 노보제비치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의학은 나의 본처, 문학은 애인”이라고 했던 천재 작가 안톤 체호프는 수많은 불후의 명작을 남기고 44세의 아까운 나이에 그렇게 세상과 이별했다.
▶ <우먼센스>에서는 바이칼BK투어(주)와 함께 오는 10월 20일부터 27일까지 모스크바-상트페테르부르크 7박8일의 일정으로 푸시킨, 톨스토이, 도스토옙스키, 체호프 등 러시아 문호들의 흔적을 찾아보는 ‘러시아 문학 기행’을 실시한다. 문의 및 신청은 바이칼BK투어(주) 02-1661-3585, 관련 내용은 우먼센스 2017.10 102~103p 참조.
▶ [투어] 러시아 문학 기행 7박 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