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고메리의 유년기는 외롭고 힘들었다. 두 살 때 어머니를 잃고 같이 살게 된 외조부모는 아이가 감당하기에는 꽤 독특한 성격이었다. 몽고메리가 열 살 때부터 문학에 두각을 드러내고 이미 열여섯 살에 지역 신문에 시를 발표하게 된 데에는 재능이 가장 큰 역할을 했겠지만 외로운 어린 시절도 한몫했을 것이다. 그러나 작가의 길은 순탄하지 않았다. 스물네 살에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외할머니를 돕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간 몽고메리는 결혼조차 마흔 언저리로 미룰 수밖에 없었다. 그의 문학적 재능은 틈틈이 쓰는 짧은 글이 되어 지역 신문과 잡지 페이지 속으로 흩어졌다.
몽고메리가 서른이 되었을 때, 앤이 왔다. 수없이 출판을 거절당한 첫 번째 소설을 불태운 후였다. “내 머릿속을 비집고 들어온 소녀는 이미 자신의 이름을 갖고 있었다. 소녀가 그토록 중요하게 여기는 ‘e’까지 포함해서 말이다.” 자신의 이름인 ‘Ann’이 낭만적이지 않다며 끝에 ‘e’를 붙이기를 고집한 엉뚱한 소녀. 상상력이 풍부하고 고집이 세며 낙천적인 소녀, 빨간 머리 앤.
몽고메리는 앤에 대해 쓰면서 두 번째 유년기를 산다. 그 유년기는 작가로서의 삶을 시작하는 유년기이기도 하다. 우여곡절 끝에 출간된 <빨간머리 앤>이 얼마나 많은 독자들에게 사랑받았는지, 그 뒷이야기를 써달라는 빗발치는 요구는 얼마나 대단했는지, 우리는 알고 있다. 그 덕분에 우리는 자라나고 결혼하고 아이를 낳는 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1979년 타카하타 이사오 감독의 애니메이션 <빨강머리 앤>은 우리나라 TV에는 1985년부터 방영되기 시작했다. “예쁘지는 않지만 사랑스러워”라고 강조하는 주제가를 들으며, 아이들은 이 사랑스럽기 그지없는 주인공에게 감정이입하고 빠져들었다. 나 또한 예쁘지 않을지는 모르지만 사랑스러울 수는 있다고, 이 답답한 상황 속에서도 상상력의 힘으로 새로운 세상을 만들 수 있다고, 그렇게 믿으며 착실하게 성장했다.
앤의 시대는 끝나지 않는다. 캐나다 공영 방송 CBC는 올해 3월부터 <빨간머리 앤>을
작년에 나온 백영옥의 <빨강머리 앤이 하는 말>은 베스트셀러에 오르면서 수많은 이들의 향수를 자극했다. 그 영향일까. 그때의 애니메이션은 ‘35주년 기념 오리지널 무삭제판’ 블루레이로 나와 이제 50편 전편을 좀 더 쉽게 볼 수 있게 되었다. 빨강머리 앤 직소 퍼즐, 모빌 아트 북, 스크래치 북 등의 굿즈뿐일까. 몽고메리 원작 소설도 “쏟아져 나왔다”는 말이 무색하지 않을 정도로 많은 출판사에서 출간됐다.
소설가 백영옥은 인생의 힘든 시기마다 빨강머리 앤을 떠올렸다고 한다. 대학 입시에 실패하고, 연애에 실패하고, 사표를 내고… 그때마다 이 사랑스러운 소녀를 떠올리거나, 플레이 버튼을 눌렀다고 한다. 앤에게서 위로받고 힘을 얻었다고 한다. 그러나 빨강머리 앤에 대한 책을 쓰겠다고 결심했을 때, 뜻밖에도 저자가 하고 싶었던 말은 “앤, 내가 살아보니 꼭 그런 것은 아니야…” 였다고. 네 말이 맞더라, 네 말대로 하니 되더라, 네 말이 내 절망을 다시 보게 해주더라, 그런 것이 아니었다. 내가 살아보니 꼭 그런 것은 아니라는 것. 앤의 말이 “내게 언제나 ‘간절히!’ 맞길 바라는 말”이기는 해도, 꼭 그런 것은 아니더란 말. 어찌 보면 그것은 저자가 유년기를 벗어났다는 말이기도 할 것이다.
유년기는 필요하다. 자라나기 위해서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힘들 때 다시 돌아가기 위해서도 필요하다. 또 다른 인생으로 도약하기 위해서도 필요하다. 그러나 유년기 속에서만 살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니, <빨간머리 앤>을 곁에 두고 가끔 꺼내보자. ‘어른의 삶’에서 너무 멀리는 두지 말고.
글쓴이 박사
문화 칼럼니스트. 현재 SBS 라디오 <책하고 놀자>, 경북교통방송의 <스튜디오1035>에서 책을 소개하는 중이며, 매달 북 낭독회 ‘책 듣는 밤’을 진행하고 있다. 저서로는 <도시수집가> <나에게 여행을> <여행자의 로망 백서> <나의 빈칸 책>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