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성은 부유한 집안의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10대 시절부터 쇼트트랙세계 무대를 석권하고, 올림픽 영웅이 됐다. 20대 때 음대 출신 아내와 결혼했고 두 아이의 아빠가 됐다. 자신의 경기를 보다 심장마비로 돌아가신 아버지, 운동선수라는 직업의 한계, 가장으로서의 무게감. 그는 성인이 된 이후 울어본 적이 거의 없다. "힘들다"라는 말은 금기어였다. 그렇게 살아온 38살, 대한민국의 평범한 남자다.
그는 한결같다. 오래전 그를 처음 본 그날처럼 여전히 맑다. 그의 아내조차 "남편은 보이는 게 전부인 사람이에요.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되는 걸 제게 다 말하죠. 당황스러울 때도 있지만 그래서 남편을 미워할 수 없어요." 그는 예측 가능한 사람이고, 보이는 게 전부인 사람이다. 그래서 자신과 마주한 사람을 무장해제시킨다. 맑다는 것의 힘은 그 어떤 것보다 강력하다.
7개월 전 '최순실 사건'에 그의 이름이 거론됐을 때, 기자는 '아, 그럴 수도 있겠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의미는, 그만큼 그가 사심 없이 사람을 대한다는 말이다. 남에게 해를 가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래서 살아오는 동안 상처 받는 일이 많았을 것이다. 당시 그는 홀로 세상과 싸웠다. 그래봤자 계란으로 벽 치기였지만. 그럼에도 밝게 웃는다. 그게 바로 김동성이다.
어떻게 지내나요? 평창 동계올림픽 해설을 맡아서 선수 분석 등 공부하며 지내고 있어요. 우리나라에서 하는 올림픽인 만큼 철저하게 준비를 해야죠. 며칠 전부터는 목동아이스링크에서 선수뿐 아니라 초보자들을 대상으로 스케이트를 가르치고 있어요. 제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이고, 얼음판에 들어서면 제가 깨어나는 기분이 들거든요. 그 일 이후 대부분 끊어졌던 강연도 최근 들어 다시 시작하고 있어요.
가장 힘든 부분은 뭔가요? 한동안 일을 못 해서 경제적으로도 힘들었지만, 정신적으로도 위축되더라고요. 나는 잘못한 게 없는데 누군가의 말 한마디로 사회에서 매장당한 상황이잖아요. 언론도, 대중도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저와 한국동계스포츠영재센터는 무관하고, 저와 연관됐다고 주장하는 사람과도 무관합니다. 저는 한 가정의 가장이고, 두 아이의 아빠입니다. 솔직히 저는 아직도 그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겠어요. 왜 잘 살고 있는 저를 뜬금없이 거론했을까요? 하나님에게 묻고 또 물었어요. 시선을 돌리기 위해 저를 이용했다고 생각합니다.
사안이 사안인 만큼 아내와의 관계도 궁금해하는 사람이 많아요. 아내는 당시의 모든 상황을 알아요. 그래서 오히려 아내와 더욱 돈독해졌어요. 선입견이 무서운 게, 제가 아내와 이혼한 줄 아는 사람도 많아요. 언젠가 아내와 함께 아이들 학교에 갔는데 수군거리는 말이 들리더라고요. 김동성이 젊은 여자와 재혼했다고요.
언론에서 불륜을 운운할 때 반응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요? 기사라는 게 핑퐁같이 왔다 갔다 하기에 해명을 해봤자 결국 우리 가족들만 다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솔직히 말하면 무섭기도 했고요. 막강한 힘을 가진 그 사람들에 의해 내가 대한민국 땅에서는 살 수 없을 수도 있겠구나, 만약 내가 그들이 하는 일에 정말 연루됐다면 영영 재기하지 못하겠구나, 하는 생각에 소름이 돋았어요. 한때는 상대방을 원망했지만 이제는 각자의 길을 잘 갔으면 좋겠어요.
당시 심정은 어땠나요? 대인기피증이 생겼어요. 사람 만나는 게 무서웠죠. 이미 언론에 의해 불륜남이 돼버렸고, 사람들도 그렇게 믿고 있었어요. 그리고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는 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무서웠어요. '내가 잘못되면 우리 가정은 어쩌지?' 동시에 나쁜 생각이 들기도 했어요. 너무 힘들었으니까요. 저희 집이 20층인데, 여기서 뛰어내리면 어떻게 될까, 아니면 차에서 연탄가스를 피워 죽을까…. 술을 즐기는 편이 아닌데 마음이 아프니까 낮술을 마시게 되더라고요. 그렇게 정신줄을 놓고 지내다가 문득 '내가 왜?' '저 사람들로 인해 내 인생이 왜 바닥을 쳐야 돼?'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때부터 기도도 더욱 열심히 하고, 외출도 조금씩 했던 것 같아요.
당시 개인 SNS를 비공개로 전환했어요. 이것 역시 논란이 됐죠. 사실을 인정해서가 아니라 아이들 사진이 올라가 있으니까요. 사람들에게, 또는 법정에서 내 가슴을 열어서 보여줄 수 없는 노릇이라 답답했어요. 스토리는 이미 다 짜여 있고, 저는 각본대로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느낌이 들었어요. 제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어요.
어떻게 그 악몽에서 벗어났나요? 아내가 든든하게 지켜줬어요. 그 자체로 힘이 됐죠. 저는 힘든 내색을 하지 않는 성격이에요. 운동을 했던 사람이라 어릴 때부터 제 상처를 누군가에게 보여주는 게 싫었어요. 제가 자살을 생각했다는 걸 지금도 아내는 몰라요. 눈물도 없는 편이죠. 아니, 참는 것에 익숙하죠. 근데 요즘엔 기도하면서도, 또 일상에서 영화를 보면서도 눈물이 그렇게 나더라고요. 살다 보니 사람이 이렇게 변하네요.
아이들이 상처 받았을 수도 있겠어요. 씩씩하게 잘 버텨줬어요. 학교에 가서 "우리 아빠 아니야!" 하고 말한대요. 그 말을 듣고 울컥했어요. 언젠가 아들이 이런 기도를 하는 걸 들은 적이 있어요. "우리 아빠 회사원 되게 해주세요." 제가 집에만 있으니까 아이가 걱정이 됐나 봐요. 씩씩하고 밝은 성격의 아들은 전학을 간 학교에서도 부회장이 됐어요. 미국에서 살다 와 말이 서툰데도 잘 적응하고 있어서 고맙죠. 가장으로서 책임감 때문이 힘들었는데, 그 책임감이 저를 지탱해줬어요.
새벽 기도를 다닌다고 들었어요. 본래 크리스천이기도 했고, 아내와 미국에 살 때 교회에 다녔어요. 그런데 이 일을 겪으면서 매일 새벽기도를 나가고 있어요. 나를 되돌아보는 시간이 되죠. 그러면서 아내와는 더욱 돈독해졌어요. 제일 아픈 사람이 아내인데, 가장 잘 버텨준 사람도 아내였어요.
한차례 논란이 되고 잠잠하다 싶었는데 재차 논란이 됐어요. 기분이 어땠나요? 그날은 그 어느 때보다 간절하게 기도했어요. "하나님은 아시잖아요. 그게 사실이 아닌 걸 아시잖아요." 누군가 날 믿어준다는 믿음이 간절히 필요했어요.
이 일을 겪으면서 깨달은 점도 있을 것 같아요. 사회에서 제게 달콤한 말을 했던 사람들, 생각해보면 결국 모두 제게 상처를 줬던 것 같아요. '내가 어리석었구나, 세상엔 공짜란 없다' 라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국민 영웅이었어요. 스케이트는 어떻게 시작했나요? 제가 어릴 때만 해도 스케이트는 경제적으로 넉넉해야 할 수 있는 스포츠였어요. 누나는 현대무용, 형은 골프를 했어요. 당시에 아버지는 성수동에 건물이 여러 채 있었는데, 간혹 아버지 사무실에 들르면 아버지와 성수동을 한 바퀴 쓱 돌아요. 건물 앞에 차를 세워두고 아버지가 잠깐 들어갔다 오면 1만원짜리 돈 뭉치가 수두룩했죠. 그걸 본 이후 "난 이다음에 아빠 사업 물려받을 거야"라는 말을 달고 살았어요.(웃음) 그런 아버지가 제가 고등학교 2학년때 갑자기 심장마비로 돌아가셨어요. 그것도 제 시합장에서요. 제게 큰 충격이었고, 당시를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아려와요. 집안도 많이 어려워졌죠.
그런 일이 있었는 줄 몰랐어요. 지병이 있으셔서 집에서 요양 중이었는데, 그날따라 아버지가 제 경기를 무척 보고 싶어 하셨어요. 그날은 국가대표 선발전이 있던 날이었고 그날 경기에서 모두 1등을 했어요. 경기가 끝나고 계단을 내려오시다가 다리에 힘이 풀려 쓰러지셨어요. 저는 충격으로 다음 날 경기에 나갈 엄두를 못 냈지만 어머니의 설득으로 장례식장에서 곧바로 경기장으로 갔어요. 결국 1등을 해 국가대표로 선발돼 올림픽에 출전하게 됐어요. 그때 결심했던 게, '이번에 메달 따면 은퇴해야지'였어요. 더 이상은 힘들어서 못 하겠더라고요. 경기 3일 전에 심한 부상을 당해 컨디션이 안 좋았는데 희한하게 앞 선수들이 계속 넘어졌어요. 그렇게 결승전까지 올라갔고, 아버지를 떠올리며 간절히 기도했어요. '제발 아무 메달이나 따게 해주세요'. 네 명 중 한 명만 이기면 되니까요. 결승전에서 한쪽 발을 앞으로 쭉 뻗었는데, 그걸로 금메달을 딴 거예요. 그 순간 아버지 생각이 너무 났죠.
승부욕이 대단하다고 들었어요. 시합할 때 제가 1등이 아니면 남의 엉덩이를 보고 들어오잖아요. 그게 너무 싫었어요. 그래서 죽기 살기로 달리는 거죠. 태릉에서의 생활은 사람들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 힘들었어요. 매일 아침에 일어나 4백 트랙을 뛰어요. 트랙 안쪽에 알루미늄으로 볼록 튀어나온 게 있는데, 그걸 밟으면 발목이 꺾여 심한 부상을 당해요. 달리면서 저걸 일부러 밟을까 백번도 더 고민해요. 그럼 태릉에서 나갈 수 있으니까요. 그만큼 운동이 너무 힘들었어요. 평생 크리스마스이브가 없었고, 생일이 없었고, 연말 방송사에서 하는 연기대상 프로그램을 본 적이 없어요. 그냥 일주일 중 하루인 거예요. 저는 중학교 3학년 때 대표팀으로 발탁돼 태릉에 들어갔기에 늘 막내였어요. 빨래며 청소 담당은 무조건 저였죠.
그렇게 운동선수로는 화려했던 삶이었는데… 운동은 제가 한 만큼 성적이 나오잖아요. 근데 인생은 제가 한 만큼 잘 살아지는 게 아니기도 하더라고요.
김동성은 어떤 사람인가요? 철없는 사람. 지나온 세월을 보면 늘 손해 보는 쪽이었던 것 같아요. 만나는 친구들도 대부분 초등학교 동창이나 대학교 친구들이에요. 동네 친구들과 소주 한잔 마시며 사는 얘기 하는 게 제 소소한 즐거움이죠.
폭풍이 휩쓸고 간 지금, 기분이 어떤가요? 그럭저럭 괜찮아요. 작은 것에 행복함과 감사함을 느끼게 됐어요. 가족이 있다는 게 든든합니다.
그의 인생은 여기부터 다시 시작이다. 세계를 제패했던 백만 불짜리 사나이, 김동성이 아니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