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 김정근이 MBC 아나운서실을 나와 프리랜서로 활동하고 싶다고 했을 때, 이지애는 “오빠가 행복하길 바란다”며 일언반구도 불만이 없었다. 남편이 회사에 사표를 던지면 한숨만 푹푹 쉬거나 바가지를 긁는 보통 여자들과는 달랐다. 김정근은 어떤가? 잘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가장 먼저 한 일은 결혼 후 지금까지 아내와의 추억을 앨범으로 만드는 거였다. 이렇듯 이지애·김정근 부부는 서로가 서로에게 일순위다.
지난 3월 독립을 선언하고 프리랜서로 활동을 시작한 김정근과 프리랜서 선배이자 그의 아내 이지애를 만났다. 똑 부러지는 줄만 알았던 이지애에게서 시크한 매력을 발견했고, 반듯한 남자 김정근에게선 엉뚱한 면모를 확인했다. 시작부터 분위기가 좋다.
“아내와 함께 화보를 찍은 건 처음이에요. 여행 다니며 찍은 셀카 외에는 부부 사진이 거의 없죠. 이런 경험이 신기하고 재미있습니다. 아내의 시크한 모습을 보여줄 수 있어 좋아요.”(김정근)
“오빠가 방송에서 보이는 반듯한 이미지와는 다르게 엉뚱한 매력이 있어요. 남편의 무한한 매력을 저만 알고 있다는 게 아쉬웠는데, 프리랜서로 활동하면 매력 발산의 기회가 많을 테니 기대되고 설렙니다. 우리 남편,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는, 에너지 충만한 사람이거든요.”(이지애)
김정근은 프리랜서 2개월 차다. 차장급 대우를 받으며 안정적인 생활이 가능했던 MBC를 박차고 나와 입사 13년 만에 신입사원으로 돌아왔다. 이제부턴 생존이다. 아내와 딸을 위해 함께 일하던 동료들과 치열한 경쟁을 펼쳐야 한다는 말이다. 김정근은 그 지점에 대해 걱정이 많았다.
“매일 일정한 시간에 출퇴근하던 생활을 13년째 했는데, 갑자기 할 일이 없어지고 여유로워지니까 어색합니다. 요즘엔 바쁜 아내 대신 육아를 전담하는데 딸과의 시간이 너무 행복하지만 한편으로는 ‘나를 찾아주는 곳이 없으면 어쩌나’ ‘언제까지 애만 볼 수는 없는데’ 하는 불안한 마음도 있어요. 가장이니까요.”(김정근)
“프리랜서로 먼저 활동을 시작했기 때문에 회사라는 울타리가 없다는 게 얼마나 힘든지 잘 아니까 남편이 뭘 걱정하고 불안해하는지 충분히 공감해요. 이럴 때일수록 자존감을 지키는 게 중요하다고 조언했습니다. 나를 수식했던 단어들이 사라지면서 드는 허탈함, 허무함 속에서 나를 지킬 수 있는 건 자존감뿐이거든요. 그랬더니 <자존감 수업>이란 책을 사서 읽더라고요. 귀엽지 않나요? 제가 안정적이지 않은 프리랜서이다 보니 남편만큼은 회사에서 일해주길 바라는 마음도 있었지만 남편의 결정과 의견을 존중하기로 했어요. 전 남편이 행복하길 바라거든요.”(이지애)
그 힘들다는 아나운서 시험 준비 끝에 수백 대 1의 경쟁률을 뚫고 당당히 방송국에 입사했던 두 사람. 누구나 부러워하는 직업을 포기하고 아직 걸어보지 못한 길을 걷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게다. 그런데 두 사람은 더 큰 미래를 위해 용기를 냈다.
“‘프리랜서로 성공해야지!’ 하는 생각 같은 건 없었어요. 아나운서는 젊을수록 사랑받는 직업이라 나이를 먹으면서 내가 가진 열정만큼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환경에 대한 고민이 많았죠. 이제야 뭔가를 좀 알 것 같은데, 그동안 보여준 게 전부가 아닌데 기회는 모두 후배 아나운서들에게 돌아갔으니까요. 그만둘 땐 ‘방송? 못 하게 되더라도 어쩔 수 없어!’라는 생각이었어요. 미련이 없었다기보다 그렇게 마음먹어야 스스로를 힘들지 않게 할 수 있을 것 같았거든요.”(이지애)
용기를 낸 데 결정적 이유는 없다. 눈이 가득 내려앉아도 부러지지 않고 버티던 나뭇가지가 마지막 한 송이의 눈을 맞으면 톡 하고 부러지는 것처럼 그동안 쌓였던 미래에 대한 고민 끝에 내린 선택이었다. 김정근도 마찬가지였다.
“지난 4~5년 동안 조직이 변하고, 동료들이 하나둘씩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많은 생각을 했어요. 차장 대우를 받지만 앞으로 방송 하는 아나운서가 아닌 후배를 양성하는 관리자 길을 가게 되겠다는 생각에 고민이 많았죠. 제 안에 아직 남아 있는 열정이 결국 저를 프리랜서의 길로 이끈 겁니다.”(김정근)
합격 통보 전화를 받고 펑펑 울며 감사 기도를 드리지 않았던가. 미련이 없을 수는 없다.
“미련이오? 당연히 있어요. 첫 직장을 다니다가 그만두고 6개월간 백수 생활하면서 힘들게 들어간 MBC잖아요. 합격 통보를 받았던 그날의 기쁜 감정이 아직도 생각나는데, 이제 더 이상 MBC 식구가 아니라고 생각하면 허탈하고 헛헛합니다. 순간순간 ‘괜히 그만뒀나?’ 싶은 생각도 들어요. 근데 지금 이 시간도 성장을 위한 과정이라 생각하며 마음을 편히 먹으려 해요. 그리워하고 불안해하면서 하루하루 성장하고 있죠. 스스로도 단단해지고 있음을 느낍니다.”(김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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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로써 인생 최대의 변화를 맞은 부부에게 최근 또 하나의 변화가 생겼다. 결혼 7년 만에 엄마, 아빠를 쏙 빼닮은 아기 천사가 찾아온 것이다. 두 사람은 지난 1월 딸 서아 양을 출산하고 또 다른 행복을 만끽 중이다.
“딸이 남편을 많이 닮았어요. 얼마나 순한지 몰라요. 입덧이 심해 고생한 저에게 ‘이제 안 힘들게 할게요!’ 하고 태어난 것 같아요. 딸의 눈짓, 손짓, 웃음소리 하나에도 살아 있음을 느낍니다. 딸에게 평생 친구인 동생을 만들어주고 싶어요.”(이지애)
“육아가 힘들지만 아이와 함께 있는 시간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을 정도로 소중하고 행복합니다. 요즘엔 아이가 저를 알아보기 시작했어요. 아이가 반응하고 웃어주면 그게 얼마나 기분 좋은지 겪어보지 않은 사람들은 모를 거예요. 아내 대신 병원에 데려가기도 할 정도로 자상한 아빠랍니다.”(김정근)
겉으로는 툴툴거려도 뒤돌아서면 자상한 츤데레 스타일의 사업가 아버지 밑에서 자란 김정근. ‘아빠처럼 아내와 자식들에게 잘해줘야지!’라고 했던 어릴 적 다짐을 지키고 있는 셈이다.
“서아도 사춘기가 오겠죠? 이런저런 고민이 많을 때 ‘아빠, 맛있는 거 먹으러 가요’라며 편하게 다가올 수 있는 아빠가 될 거예요. 엄마보다 더 재미있게 수다 떨 수 있는 친구 같은 아빠요. 물론 그 기저엔 든든한 아빠가 되어야겠죠? 딸을 위해서라도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고 생각해요.”(김정근)
“오빠가 서아와 함께할 수 있는 지금 이 시간을 만끽했으면 좋겠어요. 지금은 ‘쉬고 있다’는 생각에 아이와의 시간을 오롯이 즐기지 못하고 있거든요. 아이를 품에 안을 수 있는 시간은 고작 1~2년이고 곧 다시 바빠질 텐데, 나중엔 이 시간이 사무치게 그리울 텐데 말예요. 다시 오지 않을 지금 이 시간을 아이와 충분히 보냈으면 좋겠어요.”(이지애)
내가 중심이던 세상이 딸을 중심으로 돌기 시작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변한 건 또 있었다. 사람을 미워하지 않는 따뜻한 마음을 갖게 된 것이다. 누구나 그렇듯 ‘미운 사람’ ‘싫은 사람’ 투성이인 사회생활에서 더 이상 좁은 마음은 없다. 스스로도 믿을 수 없을 만큼 신기한 변화다.
“딸을 낳은 후엔 나쁜 사람을 보면 그 얼굴에서 아이 때의 모습이 그려져요. 순간적으로 ‘이 나쁜 사람도 누군가에게는 한없이 소중한 자식이겠지’ 싶은 생각이 들면서 미워할 수가 없죠. ‘아이를 낳은 후 개미 한 마리도 못 죽이겠다’는 어느 분의 말에 크게 공감하고 있습니다. 또 하나의 변화는 있는 그대로의 저를 사랑하게 됐다는 거예요. 예전에는 ‘좀 더 예뻐야지’ ‘좀 더 날씬해야지’ 하는 마음이었다면 편안한 제 모습을 보여주는 것에 두려움이 없어졌어요.”(이지애)
“어렸을 때 꿈은 ‘배우’였어요. 연극영화과를 졸업하신 아버지가 ‘경제적으로 힘들 것’이라면서 반대했기 때문에 꿈을 포기하고 아나운서가 됐죠. 가슴 한구석에 꿈을 간직한 채 살아왔는데, 대학원에 다니며 두 편의 연극 무대에 오르면서 그 꿈이 날개를 펴기 시작했어요. 오디션을 많이 보려고 해요. 연기하시는 분들이 보면 우습게 생각하실수도 있지만 작은 역할로 시작해 저만의 영역을 넓혀가고 싶습니다.”(김정근)
“첫 데이트할 때 오빠가 그랬어요. ‘마흔 살쯤 되면 연기를 해보고 싶다’고요. 그땐 되게 생뚱맞다고 생각했죠. 공부밖에 모르는 모범생이었던 제게 변수가 많은 배우라는 직업은 나와 다른 세계였기 때문에 ‘이 남자, 나랑은 맞지 않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새벽같이 출근해 아침 방송을 마치고 대학원에 다니면서 연기를 배우는 남편의 모습을 보면서 깜짝 놀랐습니다. 에너지가 참 대단한 남자라는 걸 새삼 느꼈죠. 지금은 전적으로 응원하고 지지합니다.”(이지애)
“아내는 털털하고 시크한 성격이에요. 사람을 대할 때 테크닉을 쓰지 않죠. 저에게 늘 ‘오빠는 최고야!’라고 말해주는, 제가 행복하길 바라는 사람 중 한 명입니다. 불안한 마음에 징징댈 때도 잘될 거라는 말로 위로해줍니다. 아내가 이렇게 믿어주고 지지해주는데 잘해야죠. 요즘 들어 책임감과 부담감이 부쩍 늘었어요. ”(김정근)
남편의 구원투수이자 전폭적 지지자인 이지애. 내친김에 남편의 ‘똘끼’(?)를 털어놓는다.
“엉뚱한 면모가 많아요. 최근엔 남편이 쓴 시나리오를 봤는데 아이디어가 신선했어요. 웃긴 에피소드가 참 많은데, 어렸을 때 일요일 아침마다 친구들 집을 돌며 전도했대요.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말예요. 같이 있으면 얼마나 재미있다고요. 예능에 출연해도 잘할 것 같아요. 그동안 보인 정형화되고 반듯한 이미지가 전부가 아니라는 걸 알려주고 싶어요.”(이지애)
오가는 대화 속에 서로를 향한 애정이 듬뿍 묻어 있다. 사랑받는 아내, 사랑받는 남편, 훈훈한 부부다.
“제가 살면서 가장 잘한 일이 오빠와 결혼한 거예요. 따뜻하고 섬세합니다. 여행 가도 일정표를 만들 정도로 치밀해요. 덕분에 저는 손 하나 까딱 안 하고 편하게 여행을 다니죠. 자상의 끝판왕이에요. 요즘 우스갯소리로 서아에게 그렇게 말해요. ‘넌 결혼하기 쉽지 않을 거야’라고요. 왜냐고요? 아빠 같은 남자를 찾기 쉽지 않을 거니까요.”(이지애)
물론 좋은 순간만 있었던 건 아니다. 부부가 가는 길엔 늘 잔잔한 파도가 일었다. 때로는 폭우가 내리기도 하고, 가혹한 눈바람이 불기도 했다.
“연애 3개월 만에 결혼했어요. 결혼하고 연애하자는 게 우리의 인생 모토였죠. 그래서 그랬는지 신혼 초에는 사소한 일로 싸우기도 많이 했어요. 삐치고 풀고, 싸우고 화해하고. 그렇게 알콩달콩 살았는데 결혼 2년째 되는 해에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위기가 찾아왔죠. 그 무렵 MBC가 파업에 들어가고, 파업에 동참했다는 이유로 정직당하고. 악재가 이어졌던 시기였거든요. 그땐 힘든 마음에 아내에게 짜증 내고 투정도 부리고, 예민하게 굴었네요.”(김정근)
“런던 올림픽 때문에 바빴어요. 힘들어하는 오빠 옆에 있어주지 못해 미안했어요. 아버님에게 전 늘 바쁜 며느리였어요. 제대로 된 식사 한 번 대접하지 못했다는 생각에 아직도 죄송스러워요. 가족이 날 필요로 할 때 옆에 있어주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가장 크죠.”(이지애)
“지금 생각해보면 그래도 우리, 참 잘 견뎠어요. 긴 터널의 끝에 밝은 햇살이 기다리고 있더라고요. 힘든 시간이 있었기에 더 단단한 부부가 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무엇보다 우리 둘 다 ‘가정에 대한 믿음’ ‘배우자에 대한 신의’를 가장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생각해요. 앞으로도 좋은 일만 있을 순 없겠죠. 더 큰 힘든 일이 찾아올지도 몰라요. 그래도 우리 부부는 잘 헤쳐 나갈 자신 있습니다.”(김정근)
서로 다른 두 사람이 만나 하나를 이뤘다. 그리고 이젠 2막이 시작됐다. 이지애·김정근 부부는 앞으로 찾아올 새 삶을 기대하고 있다.
“‘아빠’라는 인생의 역할이 늘면서 앞으로 우리가 만들어가야 할 가정에 대한 생각이 많아졌습니다. ‘우리 행복해요’라는 보여주기식 가정이 아니라 집에 들어갔을 때 편안하고 따뜻한 가정을 꾸리고 싶어요. 아이가 있어 행복하고, 엄마와 아빠가 있어 든든한, 행복의 원천이 되는 가족이오.”(김정근)
이 부부의 가정은 앞으로도 행복이 가득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