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하늘은 신비주의 여배우였다. 작품과 관련된 공식 석상을 제외하고는 개인 활동을 자제했고, 흔한 SNS조차 삼갔다. 데뷔 20년 차 여배우라면 한 번쯤 있을 법한 스캔들조차 없었다. 그런 그녀가 최근 변하기 시작했다. SNS로 팬들과 소통을 시작했고, 예능 프로그램을 통해 숨겨뒀던 예능감을 드러냈다. 변화는 작품을 선택하는 데도 영향을 미쳤다. <신사의 품격> 이후 4년 만에 선택한 작품 KBS2 <공항 가는 길>이 그녀의 변화를 방증했다.
뒤늦게 만난 남녀가 서로의 상처를 위로하며 진정한 삶의 의미를 찾아간다는 설정의 <공항 가는 길>에서 김하늘은 경력 12년 차 부사무장 승무원 ‘최수아’ 역을 맡아 이상윤(‘서도우’ 역)과 호흡을 맞췄다. 그녀는 가정이 있는 여자가 다른 남자와 사랑에 빠진다는 불륜 설정도 마다하지 않았다. <로드 넘버원> <신사의 품격> 등에서 청순 발랄한 역할을 주로 맡아오던 그녀가 다소 파격적인 작품을 선택한 데는 결정적 이유가 있었다. 결혼이었다.
“한결 여유로워졌어요. 시야가 트였다고 할까요? 작품을 선택하는 폭도 넓어졌죠. 무엇보다 남편의 지지가 큰 힘이 돼요. 극 중 가정이 있는 남자를 사랑하는 역할을 맡았지만 남편은 그런 역을 소화한 저를 멋있다고 말해주거든요,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건 행운 같아요.”
남편의 전폭적 지지가 있었다고는 하지만 스스로 고민이 없었던 건 아니다. 불륜을 소재로 했고, 한 아이의 엄마 역할이었다. 결혼 후 첫 작품으로 선택하기엔 과감한 소재였고, 도전적 캐릭터였다. 그럼에도 김하늘이 선택한 이유는 단 하나였다.
“배우로서 연기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부분이 많다고 생각했어요. 엄마로서의 모습, 아내로서의 모습, 직장 여성의 모습, 설렘 가득한 소녀 감성의 모습 등 여러 가지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캐릭터라는 확신이 있었죠. 아직은 엄마 캐릭터가 어울리지 않는다는 평가가 있었는데, 극 중 캐릭터에 맞게 저를 길들이면 된다고 생각했어요. 기존에 봐왔던 멜로극의 대본과는 차원이 다른, 영화 같은 대본이 무엇보다 마음에 들었죠. 제가 보여드릴 수 있는 걸 다 보여드린 것 같아 홀가분해요. ‘아, 다 했다’라는 만족감이 있어요.”
과감한 선택의 결과는 성공적이다. 아픔이 있는 사람들이 서로에게 건네는 위로와 따뜻함이 브라운관 너머로 전해졌다. ‘불륜’이라고 저평가하던 시청자도 ‘최수아’와 ‘서도우’의 사랑에 공감했고 뜨겁게 응원하기 시작해요.
“안좋게 보시던 시청자도 회를 거듭할수록 반응이 좋아지는 걸 보면서 힘을 냈어요. 친구나 가족, 중년 지인들이 이렇게 뜨겁게 반응해준 작품은 처음이었어요. 특히 ‘망 봐주고 싶은 커플’이라는 반응은 신선하면서도 기분 좋았어요.”
<공항 가는 길> 속 대사는 일상적이지 않았다. 마치 소설을 통해서나 읽을 수 있을 법한 대사로 가득했던 작품. 주옥같은 대사, 감성 가득한 대사는 김하늘의 마음을 사로잡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어느 낯선 도시에서 30~40분 사부작 걷는데, 어디선가 불어오는 미풍에 복잡한 생각이 스르르 사라지고 ‘인생 뭐 별거 있나, 잠시 이렇게 좋으면 되는 거지’ 그러면서 다시 힘내게 되는, 그 30~40분 같아요. 도우 씨 보고 있으면’이라는 대사는 정말 대박이에요. 아직도 외우고 있을 정도로 울컥했던 장면이었죠. ‘수아’의 아픈 감정이 고스란히 느껴지지 않나요? 어떻게 이런 대사를 쓸 수 있는지, 작가님이 존경스러워요.”
김하늘의 말처럼 <공항 가는 길> 속 대사는 하나하나가 모두 감명 깊었다. 마치 소설을 드라마로 옮겨놓은 듯 잔잔하고 서정적인 대사가 쏟아졌다. 배우의 연기가 무엇보다 중요했던 대사. 김하늘은 그래서 쉽지 않았다고 말을 보탰다.
“첫 번째는 ‘작가님이 이렇게 쓰셨네’ 하면서 놀랐고, 두 번째는 감동받고, 세 번째는 ‘이걸 표현할 수 있을까’ 싶은 걱정이 몰려왔어요. 삼단 콤보죠. 평소 대사를 잘 외우는 편인데도 어려웠어요. 반복되는 대사가 많고, 어순이 뒤바뀐 대사도 많았죠. 작가님이 힘들게 써준 대사를 바꿔 연기하는 걸 싫어하기 때문에, 틀리지 않고 완벽하게 하려다 보니까 본의 아니게 NG도 많이 냈어요.”
주옥같은 대사는 김하늘과 이상윤의 케미스트리를 높였다. 두 사람의 투 샷은 훈훈했고, 아름다웠다. ‘멜로퀸’으로 불리는 김하늘은 이번 작품을 통해 ‘케미 여신’이라는 수식어를 얻었다.
“남자 배우들과 연기하면 ‘케미가 좋다’는 말을 들었어요.(웃음) 자꾸 들으니까 ‘이게 진짠가…’ 싶기도 해요. 이상윤 씨는 보기만 해도 훈훈하잖아요. 여자에게 나쁘게 하지 않을 것 같은 이미지죠. 상윤 씨가 맡은 ‘도우’의 선함과 ‘수아’의 선함이 만나서 예쁜 케미가 나왔던 것 같아요.”
딸로 출연한 김환희 양과의 호흡도 빼놓을 수 없다. 극 중 김환희는 엄마인 김하늘의 마음을 이해하고 어루만져줄 정도로 속이 깊고 철이 든 아이로 나왔다. 두 사람은 때론 친구 같은 모녀를 연기했다.
“대본 리딩 때 환희를 처음 봤어요. 영화 <곡성>에서 본 느낌과 너무 달라서 놀랐죠. 그 어떤 아역 배우보다 순수해요. 공항에서 마지막으로 환희를 보내는 장면을 찍을 때도 환희를 보면 진짜로 눈물이 쏟아져서 혼났어요. 이미 내 딸처럼 돼버렸던 것 같았죠. 그렇게 예쁘게 다가와줘서 환희를 대할 때 진심으로 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공항 가는 길>의 결말을 두고도 말이 많았다. 갈등하던 ‘수아’가 ‘도우’를 찾으며 서정적으로 끝난 마지막 회. 진정한 행복을 찾은 여자의 이야기였지만 시청자의 반응은 엇갈렸다. 예상대로 불륜극이라는 반응과 여자 주인공의 행복을 응원하는 반응. 김하늘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처음엔 두 사람이 이루어지지 않는 게 맞다고 생각했어요. 뒤늦게 찾아온 인연이라지만 저의 가치관과도 맞지 않았죠. 저 때문에 다른 사람이 상처받는 건 싫거든요. 그런데 촬영하면서 ‘수아’의 진짜 행복을 응원하게 됐죠. 저는 내가 행복해야지 내가 사랑하는 사람도 행복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주변 사람들이 상처받지 않는 선에서 제 행복을 지키려고 하죠. 그래서 ‘수아’가 자신의 행복을 찾아가는 게 좋았어요.”
김하늘은 ‘희생’도 행복의 일종이라고 말했다. 조곤조곤하던 그녀의 목소리가 커졌다.
“부모님의 희생을 단순히 희생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예를 들어 늦게 들어오는 딸을 새벽까지 기다리는 부모님이 있어요. 피곤하지만 참고 기다리시는 그건 희생이에요. 그런데 딸이 들어왔을 때 안심되잖아요. 그때 행복감을 느끼실 거예요. 단순히 희생이라는 단어가 아픈 것만은 아니라는 거예요.”
언제 가장 행복하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김하늘은 “남편과 함께할 때”라고 말했다. 대화는 자연스럽게 그녀의 새 인연, 남편에 대한 이야기로 흘러갔다. 김하늘은 올해 3월 한 살 연하의 사업가와 결혼했다. 생각지도 못한 깜짝 결혼이었다.
“인연은 정말 있는 것 같아요. 드라마 속에서도 ‘수아’와 ‘도우’의 끈질긴 인연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잖아요. 이를테면 ‘도우’의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수아’를 만났던 장면, ‘도우’의 딸 ‘애니’가 마지막 순간 ‘수아’와 스쳐 지나갔던 장면 등이 있죠. 현실적이지 않다는 말이 있지만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해요. 현실에선 더 기적적인 일이 많아요. 저와 남편이 인연으로 얽혀 만난 것처럼요.”
사실 김하늘의 드라마 복귀는 남편의 전폭적인 지지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석 달이 넘도록 새벽에 귀가하는 아내, 신혼부부에게는 힘든 시간이었을지 모른다.
“남편이 드라마 모니터를 많이 해줬어요. 드라마 촬영 때문에 신혼 생활을 제대로 즐기지 못했는데, 이제 제주도 여행을 가려고 해요. 남편에게 제주도 촬영지를 보여주고 싶기도 하고요. 촬영 중에 가본 맛집도 함께 가보고 싶어요.”
남편에 대한 애정은 대화 곳곳에서 드러났다. 그녀와 남편의 호칭은 ‘자기야’. 차분한 김하늘을 애교쟁이로 만드는 건 남편이었다.
“주변에서 여유롭고 긍정적으로 변했대요. 가장 좋은 나이에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결혼했다고 생각해요. 저와 잘 맞는 사람과 함께 사니까 평화롭고 행복하죠. 연기할 때도 여유롭고 좋은 에너지가 나오는 것 같아요. 다만 한 가지, 엄마가 해주던 아침밥 생각이 나더라고요.(웃음)”
김하늘은 스스로 결혼 후 연기의 폭이 더 넓어졌다고 자신했다.
“환경이 변하다 보니 영향이 있는 것 같기는 해요. 그런데 결혼했다고 역할이 줄어든다거나 하지는 않을 것 같아요. 제 나이에 맞는 캐릭터는 많아요. 오히려 결혼으로 생기는 안정감이 연기에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해요.”
남편과 싸운 경험에 대해 물었다. “짓궂은 질문”이라고 투덜거리면서도 솔직하게 말한다. 사생활에 대해선 말하기 꺼려하던 결혼 전과는 사뭇 다르다.
“저는 감정 표현을 정확히 하는 사람이에요. 기쁠 때, 슬플 때, 힘들 때, 어떤 상황에서도 감정을 정확하게 표현하죠. 남편과 싸울 때도 확실하게 감정을 이야기하니까 싸움이 커지지 않아요. 남편이 많이 이해해주고 받아주거든요. 감정 표현을 확실하게 하는 방법은 연기를 하면서 배웠어요. 그동안의 경험이 제 감정을 다듬어주었죠. 그런 면에서 배우는 나를 찾아가기에 좋은 직업인 것 같아요.”
2세 계획을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똑 부러지는 성격답게 미래의 가정도 밑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아이를 언제 낳아야겠다는 구체적인 계획은 없어요. 다만 육아만큼은 플랜이 짜여 있어요. 부모님과 친척이 다 같이 어울려서 살고 있기 때문에 육아를 혼자 하지 않아도 되는 환경이에요. 남편에게도 ‘많이 도와줘야 한다’고 이야기하죠. 이를테면 아이 목욕을 시키는 건 남편 몫이라고 강조해요. 내가 하면 팔목이 아플 거라면서요.(웃음) 제 친구도 목욕은 남편이 시키고 드라이는 자기가 하더라고요. 그런 모습이 보기 좋고 바람직한 것 같아요.”
배우로서 정점을 찍었고, 꿈꾸던 오붓한 가정을 꾸렸다. 이젠 엄마가 될 차례다. 김하늘은 어떤 엄마가 될까?
“현명하고 지혜로운 엄마가 되고 싶어요. 사랑을 듬뿍 줄 거예요. 그리고 아닌 부분은 아니라고 정확하게 가르치는 엄마가 될 거예요. 반면 풀어줄 수 있을 땐 많이 풀어주고 싶어요. 자녀와도 밀당을 해야겠네요?(웃음)”
좀처럼 사생활을 이야기하지 않았던 그녀의 변화가 좋았다. 왠지 연애 상담을 해야 할 것 같다. 어떤 사람이 좋은 남자냐는 질문에 김하늘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목소리를 높였다.
“내가 인정할 수 있는 남자요! 남자는 여자와 다르거든요. 그 다름을 인정해야 하는 거죠. 나와 다른 걸 인정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예요. 인정할 수 있으면 계속 가는 거고, 아무리 사랑해도 인정할 수 없으면 그 관계는 유지되지 않죠. 모든 사람한테 좋은 사람이 중요한 건 아니잖아요. 나한테 좋은 사람이 중요해요.”
전에는 보이지 않던 여유가 느껴지는 이유는 분명하다. 그녀는 지금 충분히 사랑 받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