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동안 사랑받는 배우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첫째는 연기력이고, 둘째도 연기력일 것이다. 외모가 수려하다면 금상첨화겠지만, 훌륭한 연기력을 갖춘 배우라면 롱런할 것이 분명하다. 전도연이 대표적이다. 그녀는 어떤 캐릭터든 자신의 몸에 꼭 맞게 재단해내고, 상대 배우가 누구든 가장 빛나게 만들어주며, 존재 자체만으로도 작품에 무게가 실리는 배우다.
전도연이 지닌 힘의 진가는 tvN 드라마 <굿와이프>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남편의 외도에 괴로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를 이용하려는 아내의 양극화된 감정을 눈빛과 목소리로 이해시켰고, 연기에 처음 도전하는 나나와 신인 배우 김원근을 이끌었다. 엄청난 대사량에도 끄떡없었다. 우리가 그녀를 ‘톱 배우’라 부르는 이유다.
<굿와이프>가 종영한 지 일주일 후 전도연을 만났다. 그녀는 여전히 캐릭터를 품고 있었다. 기자의 짓궂은 질문에 아이처럼 “꺄르르” 웃다가도 작품 이야기만 하면 금세 눈물을 흘리곤 했다. 드라마는 끝났고, 열기는 식었다. 하지만 그녀가 남긴 여운은 오래 남을 것이다.
드라마 <프라하의 연인> 이후 11년 만에 안방극장으로 돌아왔어요. 오랜만에 시청자를 만난 기분이 어떤가요?
‘데뷔작’이라고 생각하며 촬영에 임했어요. 매일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었는데 막상 끝나고 나니까 현장에서 배우와 스태프들과 즐거웠던 시간이 훨씬 많이 생각나더라고요.
11년 전과 지금을 비교해본다면 어떤가요?
돌이켜보면 그때도 지금과 비슷했던 것 같아요. 저도 저인데, 편집까지 해야 하는 감독님, 사소한 것까지 다 챙겨야 하는 스태프들은 이 환경을 어떻게 견딜 수 있을까 하는 걱정도 됐어요.
마지막 촬영을 마치고 현장에서 많이 울었다고 들었어요.
드라마 작업은 혼자만의 힘으로 될 수 없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어요. 고생한 스태프, 배우들, 지나온 시간을 생각하니 눈물이 나더라고요. 오랜만의 드라마 복귀라 떨리고 긴장됐는데 많은 관심과 사랑 속에 잘 마친 것 같아 안도감이 들기도 했고요.
역대 최고 분량이었던 것 같아요. 거의 모든 신에 출연했으니까요.
저도 너무 많은 대사와 분량이 부담스러워 감독님과 작가님께 “16부까지 잘 이끌어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하소연했어요. 분량을 줄여주신다고 했고, 그 말을 믿었죠. 처음에 비하면 분량이 줄었지만 그래도 대사량은 엄청났어요.
변호사 역할이라 전문 용어가 많이 등장했어요. 법정 신에서는 보는 사람 숨이 넘어갈 정도로 대사가 길었죠.
각오는 했지만 법률 용어가 많아 못 외울 줄 알았어요. 시간에 쫓기다시피 촬영했죠.(웃음) 무엇보다 저 때문에 촬영이 지연되는 일은 없었으면 하는 욕심이 있었어요. 잠도 많이 부족했는데, 드라마 끝나면 언제든 잘 수 있다고 생각하며 수면 부족에 대해 스트레스를 안 받으려고 했죠.
저라면 ‘다른 배우들에게 묻어가야지’ 하는 생각을 할 것도 같아요.
오래 함께한 매니저가 “편하게 하면 되는데 왜 힘든 선택을 하냐?”고 묻더라고요. 저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어요. 다른 배우들에게 묻어가는 게 뭐죠? 어떤 작품이든 저 혼자만 잘한다고 되는 게 아니잖아요. 모든 스태프와 제작진의 케미가 좋아야 되는 건데, 어떻게 감히 누가 누구에게 묻어갈 수 있겠어요.
그런 책임감 때문이었나요? 현장에서 ‘약순이’로 불렸다더라고요.(웃음)
제가 약을 잘 챙겨먹는 스타일이 아닌데 남들이 좋다는 건 다 챙겨 먹었어요. 어떻게든 에너지를 얻고 싶어 홍삼도 챙겨 먹고, (윤)계상 씨가 비타민 C를 줘서 먹어보기도 했어요. 약 기운 때문에 버틴 건지 체력적으로 적응이 된 건지 모르겠지만 나중에는 똑같이 힘든 것도 덜 힘들게 느껴지더라고요.
또 드라마 출연 제의가 들어온다면 고민되겠어요.
드라마 제의가 들어오면 저는 우아하게 영화배우라고 말하면서 거절할 거라고 다짐했는데 드라마만의 중독성이 있는 것 같아요. 힘들다고 마냥 안 하기에는 드라마를 통해 제가 얻은 것도 굉장히 많았거든요. 언제가 될지는 잘 모르겠지만 드라마 출연 가능성은 항상 열어두고 있어요.
이번 작품을 통해 무엇을 얻었나요?
이번에 아주 큰 단점을 알았죠. 감정을 실어야 하는 대사는 자신 있는데 정보를 전달하는 대사는 어렵더라고요. 유지태 씨와 호흡을 맞추는 장면에서는 늘 긴장됐죠. 감정의 진폭이 굉장히 큰 배우거든요. 어떤 장면도 척척 소화해내는 김서형 씨를 보면서 자극도 받았고, 나나 씨의 발성과 발음도 부러웠고요. 나나 씨는 무엇보다 눈빛이 좋아요. 깜짝 놀랄 정도로 연기를 훌륭하게 소화해주었죠. 아이돌 출신이라는 대중의 편견과 선입견을 깼기 때문에 박수 쳐주고 싶어요.
윤계상 씨와는 많이 친해졌다고 들었어요.
후배들과 작품을 해도 동생처럼 느껴지기가 쉽지 않은데 윤계상 씨만큼은 친근하게 느껴졌어요. 어느 순간 동생이 돼있더라고요.(웃음) 현장에서 저를 잘 이끌어주었어요. 좋은 동생을 얻은 것 같아 감사해요.
극 중 ‘김혜경’은 남편을 포용했어요. 그게 과연 좋은 와이프일까요?
결혼에서 중요한 건 믿음이에요. 서로 믿음의 틀을 깨지 않고 사는 게 결혼이죠. 저도 그렇게 살고 있고요. 그래서 ‘혜경’의 심리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어요. 좋은 아내, 좋은 남편에 대한 기준은 없는 것 같아요. 얼마나 서로를 믿고 가정을 소중하게 생각하느냐가 중요한 거죠.
실제로는 어떤 아내인가요?
제가 ‘굿와이프’인지는 잘 모르겠어요.(웃음) 저희 가정도 여느 가정처럼 평범합니다. 과거에는 사랑이 인생의 전부라고 생각했는데, 결혼 후 아이를 키우면서 사랑만으로 살아지는 게 아니라는 걸 알았죠.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사랑보다 중요한 건 ‘믿음’이에요.
작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사랑은 판타지”라고 말했어요. <굿와이프>를 마친 지금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나요?
저에게 사랑은 막연한 거예요. 기준도 없고요. 제가 꿈꾸는 사랑, 하고 싶은 사랑은 허상이고 판타지죠. 현실에서는 할 수 없는, 느낄 수 없는 그런 거요.(웃음) 그런 면에서 행복과 사랑보다 당장 해야 할 것, 책임져야 할 것을 더 이야기했던 이번 작품에서의 사랑이 현실적이라고 생각했어요.
좋은 엄마는 어떤 엄마일까요?
극 중 딸이었던 ‘서현’(박시은 분)이가 저에게 “엄마를 믿어”라고 말하는 장면에서 왈칵 눈물이 났죠. 지금도 그때 생각하면 감정이 북받쳐요. 좋은 엄마의 기준은 잘 모르겠지만 스스로 행복한 부모가 아이들에게도 좋은 부모라는 생각이 들어요. 내가 먼저 행복한 엄마, 문제에 부딪혔을 때 아이 스스로 이겨낼 수 있도록 기다려주는 엄마, 그게 좋은 엄마가 아닐까요?
실제 딸이 엄마를 닮아 ‘리틀 전도연’이라고 불리더라고요.
팔불출 같겠지만, 우리 딸… 예뻐요.(웃음) ‘리틀 전도연’은 아니고, 저의 이마와 코를 닮았어요. 아빠의 장점과 제 장점이 잘 섞인 외모랄까요. 아마 제 딸이라서 예쁜 거겠죠?(웃음)
전도연 씨에게 딸은 어떤 존재인가요?
딸은 제가 지치지 말아야 하는 이유이자 존재의 이유예요. 친구 같은 엄마가 되고 싶은데 마음처럼 쉽지가 않네요.
딸이 엄마를 따라 배우가 되겠다고 하면 어떻게 하겠어요? 딸은 제 직업에 대해 정확히 알지 못해요. 그냥 텔레비전에 나오는 직업 정도로만 알고 있죠. 음… 솔직한 마음은 다른 직업을 선택했으면 좋겠어요. 말리고 싶을 것 같아요.
왜요?
힘드니까요. ‘칸의 여왕’을 넘어설 수 있다면 하라고 하겠지만 저보다 못한다면 하지 말라고 할 거예요.(웃음)
이야기가 나와서 물어볼게요. ‘칸의 여왕’이라는 수식어가 부담스럽지는 않나요?
당시에는 그렇게 큰 상인 줄 몰랐어요. 그 상의 여파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어요. 떨쳐내려고 했는데 노력한다고 될 게 아닌 것 같아 받아들이려고 해요.
부담감을 떨치기 위해 뭔가를 하지는 않겠다는 뜻이군요?
가 지금 할 수 있는 걸 잘하자는 마인드로 바뀌었죠. 잘할 수 없는 일에 대해서는 포기도 빨라요.(웃음) 칭찬받기 위해 사는 삶이 아니기 때문에 저답게 살려고 해요. 스스로에게 ‘뭘 하고 싶니?’라고 묻곤 하죠.
시선을 의식하지 않아서일까요? 주름도 개의치 않는 모습이 멋있어 보였어요.
사실 주름을 감추지 않은 건 제 외모에 자신 있어서가 아니에요. 제가 편해야 보는 사람도 편하거든요. 땡볕에서 촬영하는데 주근깨가 안 올라오는 게 이상한 거예요. 땀 흘리면서 연기하는데 화장이 안 지워지는 게 더 이상한 거고요. 촬영 감독님이 피부를 걱정하시더라고요. 저는 그냥 두라고 했어요. 나이 먹으면 주근깨나 주름이 생기는 게 당연한 거잖아요.
예능 프로그램 <택시>에도 출연했죠?
예능에 잘 출연하지 않는 배우라서 의외였어요. 저는 말을 하는 게 무서워요. 사람의 생각이라는 게 언제고 바뀔 수 있는 거잖아요. 그런데 한 번 뱉은 말이 마치 그 사람을 대변하는 것처럼 남는 게 무섭더라고요. 그런 의미에서 <택시> 출연은 도전이었어요. 데뷔 시절부터 친한 PD님이 연출하는 프로그램이라 섭외를 거절할 수 없었죠.
녹화 분위기는 어땠어요?
유지태 씨는 진지해요. 윤계상 씨는 허당맨이고요. 나나 씨는 푼수끼가 매력 있는 4차원이고요. 김서형 씨도 독특해요. 감독님은 이런 조합이 재미있을 것 같다고 하셨어요. 시간이 많지 않아 개개인의 많은 것을 보여줄 수 없었지만 우리 팀워크와 매력이 그래도 조금씩은 보인 것 같아 좋아요.
앞으로도 배우 전도연을 자주 볼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어떤 작품으로 찾아뵐지는 잘 모르겠어요. 다만 제가 나오는 작품을 보면 후회가 없다는 믿음을 주는 배우가 되고 싶고, 말뿐 아니라 진심을 다해서 열심히 사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오늘에 집중하며 살다 보면 밝은 내일이 찾아오는 것처럼 하루하루 집중하며 살게요. 지켜봐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