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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풍의 세계

김풍과 첫 화보 촬영을 한 지 일 년이 지났다. 본업인 웹툰 작가로 돌아온 그는 여전히 멋졌다.

On September 29,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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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염이 최고조에 달한 날, 김풍을 만났다. 그는 일 년 만에 만난 기자를 단번에 알아봤다. “오랜만이네요. 그간 안녕하셨어요? 우린 더울 때만 만나네요.(웃음)”

작년 여름 그와 함께 화보 촬영을 한 날도 몹시 무더웠다. 김풍은 땀을 뻘뻘 흘리며 의상을 몇 번이나 갈아입어야 했다. 땡볕에 몇 시간 동안 촬영이 이어졌는데 그는 단 한 번도 짜증을 내지 않았다. 포토그래퍼가 요구하는 포즈도 척척 소화해냈고, 저녁 식사도 못 하고 늦게까지 인터뷰가 진행됐음에도 재기발랄했다. 다시 만난 김풍은 여전히 에너지가 넘쳤지만 뭔가 달라 보였다. 좀 더 차분해졌다고나 할까.

“아마도 요즘 다시 연재를 시작한 웹툰 <찌질의 역사 3> 덕분일 거예요. 작가들은 자신이 집필하는 작품 속 주인공에게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거든요. 지금 주인공이 대학을 졸업해 어엿하게 성공한 내용을 그리는 중인데, 그에 따라 주인공의 성격도 이전에 비해 차분하게 바뀌었어요. 저도 그 영향을 받나 봐요.”

그렇다. 예능에서 활약 중이지만 누가 뭐래도 김풍은 웹툰 작가다. 발표하는 작품마다 네티즌의 큰 사랑을 받았지만 특히 <찌질의 역사>는 김풍의 인생작이라 불릴 만하다. 작가로서 그의 가장 큰 강점은 심리 묘사다. 읽는 이라면 누구나 ‘아, 나도 저런 시절이 있었지’ 하며 공감할 정도로 디테일한 감정의 결을 잘 살려낸다. 적나라하고 찌질한 주인공의 작태에 화를 내면서도 네티즌은 김풍의 만화를 기다린다. 최근 연재를 재개했을 때는 “대체 왜 이제야 웹툰을 올리는 거냐?”는 항의 댓글만 몇백 개가 달렸다고.

“더 일찍 작품을 선보였어야 하는데 많이 늦어져 독자분들한테 혼났어요. 그만큼 기다려주신 거니까 감사할 따름이죠. 사실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어요. 한창 작업하던 내용을 멈추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했거든요. 열심히 작업한 건데 아깝지 않느냐고 주변에서 말렸지만 흔들리지 않았어요. 제가 봤을 때 재미없으면 독자들도 재미없거든요. 결과적으로 좋은 선택이었다고 생각해요.”

유머가 넘치는 김풍이
지만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만큼은 눈빛이 바뀐다. 기자에게도 웹툰을 읽은 소감을 솔직히 말해달라며 성화다.
“칭찬 말고 정확한 피드백을 원해요.(웃음) 평소에는 한없이 게으르지만 제 이름을 달고 나오는 모든 작품에 대해서만큼은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기울이고 싶어요. 생각해보세요. 제가 그린 만화는 저의 아들, 손자, 증손자까지 볼 수 있잖아요. 당당한 증조할아버지가 되고 싶거든요.(웃음)”

<찌질의 역사 3>의 주인공 ‘서민기’는 시즌 1·2에서 뻔뻔하고, 능력 없고, 나약했다. 주인공의 모습을 보며 답답해하면서도 계속 웹툰을 볼 수밖에 없었던 것은, 사실은 우리에게도 숨기고 싶은 찌질함이 있어서였을 것이다. 그런데 시즌 3에서 ‘서민기’는 갑자기 서른넷의 어엿한 청년이자 유능한 기자가 되어 팬들 앞에 섰다. “이래서야 어찌 ‘찌질의 역사’라고 할 수 있겠느냐”라고 짐짓 따져 물었다.

“잘나가는 어엿한 남자라도 찌질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어요. 결국 이 세상에 전혀 찌질하지 않은 사람이란 없다는 것도요. 주인공은 저의 과거 모습을 많이 담은 캐릭터라 애착이 많이 가요. 성장한 듯하지만 여전히 찌질한 속내를 간직한 주인공의 모습이 저를 닮았어요.”

작품을 이루는 설정이 갑자기 급변했음에도 어색함이 없는 것은 김풍이 치열하게 고민한 덕분이다. 그는 ‘말이 되게 만드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믿는다. 비록 허구의 세계지만, 개연성이 없다면 독자를 설득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만화의 설정에 대해 하루에 몇십 번이나 생각하고 고치고를 반복하는 길고 외롭고 고통스러운 과정을 거친 후에라야 그는 자신의 분신 같은 작품을 세상에 내놓는다.

“방송 활동을 병행하면서 웹툰 작업을 하는 게 쉽지 않더라고요. 방송은 제 안에 있는 에너지를 발산하는 작업이라면 웹툰 작업은 에너지를 제 안으로 계속 밀어 넣어 압축하는 일의 반복이거든요. 에너지 소모가 심한 날에는 아무것도 안 하고 하루 종일 누워 있기도 해요. 마치 배터리를 충전하는 것처럼요. 그래도 일 년이란 시간이 헛되지 않은 게, 스토리를 쥐락펴락하는 스킬은 이전보다 나아진 것 같더라고요.(웃음)”

창조한다는 것은 내 안의 에너지를 퍼내는 일이다. 퍼낸 만큼 채워야 하는데, 나이 들수록 쉽지 않다는 것을 느낀다고 토로하는 김풍에게, 요즘 뭐가 가장 재미있느냐고 물어봤다.

“안 그래도 그게 고민이에요. 나이 들수록 재미있는 게 없어요. 더워서 그런지 더 매사에 시큰둥해지고 게을러지는 것 같아요. 창작하는 사람은 매일 일상에서 만나는 매너리즘과 싸워야 해요. 그러려면 스스로에게 자극을 계속 줘야 하는데, 웬만큼 재미있는 콘텐츠가 아닌 이상 그게 쉽지 않아요. 종종 나이에 상관없이 철없는 어린아이 같은 마인드로 작업하는 크리에이터들을 보면 마냥 부러워요.”

이마를 찌푸리며 말하는 김풍에게 다른 질문을 던졌다. 가장 위안이 되는 것은 무엇인지 말이다.
아시죠? 그중 최진석 교수님의 ‘노자’ 강의를 들으면 무릎을 탁 치게 돼요. 노자랑 저랑 삶의 스타일이 되게 비슷하다고 느꼈거든요. 사실 제 인생을 쭉 돌아보면 모호하게 살아왔어요.

지금의 저만 해도 웹툰 작가에, 방송인, 요리까지 경계가 없고 명확하게 뭘 하는 사람인지 잘 모르겠다는 분이 많잖아요. 세상의 모든 일이 무 자르듯 정확하게 정리되는 것도 아닌데 자꾸만 구분 지으려 하는 것이 좀 답답할 때가 많았는데, 노자에 대한 강의를 들으며 마음이 시원해지는 것을 느꼈어요.”

삶이란 본디 불안한 것이다. 망설이기보다는 맘먹은 대로 전력 질주하는 것을 택했던 김풍에게도 때로 불안감이 엄습할 때가 있다.

“돌아보면 감사하고 행복한 삶이었어요. 재미있는 것을 찾아 달리다가도 싫증나면 다른 것을 찾아 헤맸죠. 그런데도 결과는 나쁘지 않았어요. 하지만 세상은 급변하고 이 세상에 완벽하게 안전한 것은 없잖아요. 다행히도 저는 걱정하기보다는 고민한 다음에는 바로 달려가는 스타일이죠. 그래서 더 열심히 웹툰 작업을 했고요.”

치열하게 웹툰을 준비하며 걱정은 잊었지만 조금 외로웠다고 김풍은 고백했다.
“작품 속의 세계는 타인은 알 수 없는 저만의 세계죠. 그 속에서 구조를 짜고 인물을 움직이면서 이야기를 만들어나가는 건 너무나 외로운 작업이에요. 이야기가 막혀도 누구와 고민을 나눌 수도 없으니까요. 사실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쭉 외로움을 많이 타는 스타일인데 사람들은 그걸 몰라요.(웃음) 그래서 저는 집에서 혼자 작업하다가도 종종 카페에 가서 친구들이랑 같이 일해요. 세상과 단절되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하면서요.”

그렇게 외롭다면 연애를 하는 건 어떠냐는 기자의 유도 질문에 김풍이 웃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게 쉽지 않네요. 같은 감정을 공유 하는 게 버겁게 느껴지기도 하고요. 그간 연애했느냐고요? 그건 노코멘트. 어쨌든 지금은 사귀는 분 없습니다.(웃음)”

지난 일 년 동안 김풍에게 생긴 변화는 또 있다. 강남에서 잠시 살다가 다시 홍대 근처로 이사 온 그는 최근 새 집 꾸미는 재미에 빠졌다. 김풍의 SNS에는 그가 직접 집을 인테리어하는 과정이 사진으로 속속 올라온다. 천장에 철봉을 달고, 소파를 공중에 매달고, 펍에나 있을 법한 긴 테이블을 거실에 설치하는 등 인테리어도 그답게 재기발랄하다.

“제가 생긴 것과 다르게 ‘집돌이’거든요. 하루 종일 틀어박혀 작업하려면 그 공간이 재미있어야 도움이 되겠더라고요. 특히 저는 공중에 매단 소파가 참 맘에 들어요. 꼭 해보고 싶은 거였거든요. 안 하고 후회하는 것보다 하고 후회하는 게 낫다 싶어 과감하게 저질렀죠. 심심할 때 공중에서 만화책 보면 얼마나 재밌는지 아세요?(웃음)”

웹툰 작업 중에 이사한 터라 아직 김풍의 새집은 완전히 정리되지 않은 상태다. 공개할 수 없어 아쉽다면서 그는 휴대폰으로 찍은 사진을 보여주며 자랑을 이어갔다. 어떤 가구를 살지 고민하는 게 즐겁다는 그에게서 흥겨움이 느껴졌다.
“아직 집들이도 못 했어요. 날 잡고 집 청소를 싹 해야 하는데, 일정이 바쁘다 보니 그조차 쉽지 않아요. 아, 정말 멋진 공간이라 친구들에게 얼른 자랑하고 싶은데.(웃음)”

집을 정리하며 김풍은 자신이 그동안 얼마나 쓸데없는 것을 쥐고 살았는지 깨달았다고 했다.
“집을 최대한 심플하게 꾸미려고 필요 없는 것은 다 버리고 있는데 버릴 게 엄청 많더라고요. 여행지에서 산 동전지갑 같은 걸 보면서 ‘대체 이렇게 쓸데없는 것에 왜 돈을 썼을까’ 후회도 했어요. 많이 버렸는데도 정리를 하면 할수록 버릴 게 계속 나와요. 그것들을 버리면서 제가 조금 더 성숙해진 것 같아요.”

최근 김풍은 새로운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이름 하여 ‘생활 패턴 바꾸기 프로젝트’다. 늦은 시간까지 웹툰 작업을 하면서 야식을 먹다 보니 건강에 적신호가 켜진 탓이다. 갑자기 찐 살도 뺄 겸 그는 요즘 일주일에 4번씩 규칙적으로 운동을 한다.

“오래도록 건강하게 창작하고 싶다고 말하면서도 그간 너무 불규칙하게 생활해왔더라고요. 무라카미 하루키를 보면서 반성했어요. 그 작가가 하루를 어떻게 보내는지 아세요? 새벽 4시에 일어나서 커피 한 잔 마시고 작업하다가 운동하고 이후에는 사람 만나러 다니고, 저녁 식사는 두부와 맥주로 간단하게 마무리하고 일찍 잠자리에 들어요. 그걸 매일 해요. 멋있죠?”

평생 조용한 새벽에 그림을 그려왔던 김풍이 생활 패턴을 바꾸기란 쉽지 않다. 마음은 앞서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을 때도 많다. 하지만 그는 반드시 생활 패턴을 제대로 바로잡겠다고 힘주어 말했다.

“창작을 더 오랫동안 잘하고 싶거든요. 그래서 웹툰 작가 주호민 씨랑 같이 미술학원에 다니는 것도 생각 중이에요. 그림을 잘 그리려면 많이 그려보는 수밖에 없는데, 제가 게을러서 몇 년간 스토리에만 치중하다 보니 그림 실력이 자꾸 떨어지는 것 같아서요. 유화도 좀 배워보고 싶고요.”

김풍은 스스로를 설명할 때 ‘게으르다’는 형용사를 자주 썼다. 하지만 그가 정말 게을렀다면 이제까지 그 수많은 시도를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세상만사 모두 귀찮은데도 요리와 웹툰에 대한 노력은 아끼지 않고 하게 돼요. 아직까지는 둘 다 진짜로 좋아하거든요. 하지만 어느 순간 즐겁지 않으면 접을 준비가 되어 있어요. 그런 마인드가 있어야 지금 모든 걸 쏟아 부을 수 있더군요.”

‘즐겁지 않으면 하지 않는다’는 마인드를 가졌던 20대 초반의 청년은 어느새 39살이다. 그 사이 김풍은 더 좋은 결과물을 내기 위해 기꺼이 모든 것을 원점으로 돌릴 줄 알고, 남들의 시선보다 자신만의 확고한 기준을 가지고 살아가는 남자가 되었다. “1년 만에 ‘부쩍 성장한 것 같다”는 기자의 농담에 김풍은 그저 미소 지었다. 이 남자의 2017년이 벌써부터 궁금하다. 

CREDIT INFO
취재
정지혜 기자
사진
하지영
장소
카페 와이랩
2016년 09월호
2016년 09월호
취재
정지혜 기자
사진
하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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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와이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