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멤버> 그리고 남규만
SBS 드라마 <리멤버-아들의 전쟁> 종영 직후 만난 남궁민은 극 중 캐릭터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모습이었다. 재벌 후계자 ‘남규만’ 역을 맡아 ‘갑질’과 ‘금수저’의 면면을 보여주는 연기를 펼친 그는 텔레비전 안에서 철저하게 악했고, 시청자는 공분했다. 잠깐의 틈에도 숨 막히는 카리스마를 뿜어내는 남궁민의 모습은 극 중 캐릭터와 닮아 있었고, 반면 긴장된 분위기를 이완하기 위해 눙치는 모습은 그의 유쾌하고 젠틀한 실제 성격을 짐작케 했다.
“많은 사랑을 받던 캐릭터를 떠나보내야 한다는 게 아쉬워 붙잡아두고 싶지만 평소에도 ‘남규만’ 같으면 안 되니까 빨리 벗어나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생각보다는 빨리 빠져나오고 있는데 아직까지 여운이 남아 있어요.”
남궁민이 만든 ‘남규만’은 자신의 죄를 덮기 위해 살인, 매수, 인격 모독 등 갖가지 비인간적인 행위를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저지른다. 현실에 존재하지 않을 것만 같은 극단적인 캐릭터는 남궁민의 오랜 고민과 연구 끝에 탄생했다.
“처음부터 몰입이 잘된 건 아니에요. 전작인 <냄새를 보는 소녀>에서 악역을 맡기는 했지만 외적으로 표출하는 악역 연기는 해본 적이 없어요. 그래서 고민이 많았죠. 다행인 건 ‘남규만’이 끝까지 악역이었다는 거예요.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는데 캐릭터가 끝까지 치졸해서 좋았어요.(웃음)”
배려가 몸에 밴 실제 성격과 다른 캐릭터를 연기하는 게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기라성 같은 선배 배우들에게 반말을 해야 하고, 동료 배우를 때려야 하고, 세트장에 있는 소품을 죄다 집어 던져야 했다. 행여 자신의 말 한마디가 작품의 흐름을 방해할까 싶어 말하지 못했던 그는 드라마가 종영되고 나서야 당시의 고충을 털어놨다.
“‘이건 나와 안 맞아서 못 하겠다’고 할 수 없잖아요. 대본에 ‘집어 던져라’라고 써 있으면 냅다 집어 던져야 하죠. 그런 점이 힘들었어요. 교장 선생님인 아버지 밑에서 자라 바르게 성장한 편이거든요. 그래서 고함을 지르고 때리는 장면을 촬영하면 상대 배우에게 너무 미안했어요.” 적응하기 어렵고 연기는 힘들었지만 지난 어떤 작품보다 애착이 간다고 했다. ‘나 자신이 ‘남규만’이라면 어떨까?’ 하고 상상하는 시간을 즐겼다고. 그렇게 그는 최선을 다해 ‘나쁜놈’이 됐다.
“저도 사람인지라 시청자가 분노하고 미워하면 상처 받아요. 다행인 건 감독님과 스태프가 좋아해주셨다는 거예요. 그래서 꿋꿋하게, 악한 연기를 할 수 있었어요. 20부 내내 무섭게만 연기하는 건 무리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남규만’이 어처구니없어 피식 웃음이 나는 장면도 만들어주셨죠. 사랑받는 악역을 연기했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좋아요.”
이제는로맨스
유난히 남궁민의 연기를 칭찬하는 사람이 많았다. 영화 <베테랑>의 악역 유아인과 비교하면서도 남궁민이 지닌 아우라에 대한 이견은 없었다. 언론과 평단, 대중의 호평이 쏟아졌다.
“이번 작품 하면서 ‘연기 잘한다’는 말을 많이 들었어요.(웃음) ‘남궁민의 재발견’이라는 평가도 있었고요. 근데 저는 그런 말들에 개의치 않아요. 연기라는 게 갑자기 늘 수 없거든요. 저는 원래 하던 대로 했을 뿐이에요. 드라마가 재미있어서 시청률이 높았고 그러다 보니 많은 사람이 제 연기를 봐주신 거라고 생각해요.”
악역 캐릭터로 칭찬받았으니 따뜻한 역할로도 칭찬받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이를테면 멜로 같은 거.
“멜로 연기를 해보고 싶어요. 악역 전문 배우라는 타이틀을 얻으면서 멜로를 연기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네요. 사람들에게 공공의 적이 된 기분이에요. 사람 사는 냄새가 나는, 일상 속에서 사랑의 감정을 디테일하게 표현해야 하는 연기를 하고 싶어요.”
드라마 tvN <로맨스가 필요해 3>에서 충분히 경험했다. 부드럽고, 자상하고, 심지어 애교까지 많은, 여성들의 로망인 그가 아니었던가. 그럼에도 그는 사랑스러운 로맨스를 꿈꾸고 있었다.
“<로맨스가 필요해 3>에서 맡았던 캐릭터의 대사는 너무 달콤했어요. 현실과 조금 동떨어지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 만큼요. 그리고 저는 그동안 실장님 역할을 단골로 했죠. 예쁘고 가난한 여자를 뒤에서 보살펴주는 키다리 아저씨 같은 역할요. 이제는 평범한 사람의 사랑 이야기에 관심이 가요. 그래야 더 마음껏 자유롭게 연기할 수 있을 것 같고요.”
남궁민이 상상하는 ‘진짜 사랑’은 무엇일까? 두루뭉술하게 말하는 그를 채근했다. 아니, 몰아붙였다.
“평범한 게 진짜 사랑이 아닐까요? 평소에는 드라마 속 대사처럼 오글거리는 말은 잘 안 하잖아요. 내가 하는 사랑, 평범한 사람들이 하는 사랑 이야기를 그린 작품에서 실생활 연기를 펼치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죠. 최근에 동생이 결혼해서 조카를 낳았어요. 너무 예뻐 보이죠. 부럽기도 하고요. 하지만 지금은 일에 대한 욕심이 많아요. 결혼요? 40대 초반에 좋은 인연이 나타나면 할 생각이에요. 그때까지는 열심히 일만 하려고요.”
사랑하는 연기를 하고 싶다면서도 결혼 생각은 없다는 남궁민. 그가 이토록 연기에 목말라하는 이유가 궁금했다.
“지금에서야 연기가 주는 감정, 행복감을 알게 됐어요. 어렴풋이 연기를 어떻게 하는 것인지 알게 됐고 행복한 작업이라는 것도 새삼 느끼고 있죠. 그래서 더 욕심이 생겨요. ‘남궁민’ 하면 바로 떠오르는 ‘인생작’을 남기고 싶어요. 결혼은 그다음으로 미루려고요.”
슬럼프…
남궁민은 그동안 쉽게 털어놓지 못했던 아픈 기억을 꺼냈다. 지난 2년이라는 공백기에 대한 이야기였다. 슬럼프는 그를 더욱 단단한 배우로 성장시켰다.
“MBC <내 마음이 들리니> 종영 이후 2년이라는 공백기가 있었죠. 자의 반 타의 반이었어요. 공백기를 갖자는 생각으로 쉬었는데 결과적으로는 제가 잊히더라고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배우가 됐죠. ‘아무리 사랑받아도 잊힐 수 있구나’ 배우는 그런 직업이구나, 싶은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했어요. 인기요? 한두 달이면 잊혀요. ‘남규만’도 곧 잊힐 거예요. 그래서 게으름 부리지 않고 겸손하게 연기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슬럼프를 극복할 수 있었던 것 역시 연기에 대한 욕심 때문이었다. 연기를 잘하고 싶어 시작한 연출. 25분짜리 단편영화지만 작업에 몰두하는 시간만큼은 다른 생각이 들지 않았다. 남궁민은 그렇게 ‘감독’이라는 새 이름표를 얻었다.
“<라이트 마이 파이어>라는 작품이에요. 작년 8월에 작업했어요. 촬영 기간은 이틀밖에 되지 않았지만 너무 재미있었죠. 영화 제작은 어린 시절 제 꿈이거든요. 돌이켜보면 동생과 함께 영화를 보고 좋아했을 때가 가장 행복했던 것 같아요. ‘언젠가는 꼭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 되어야지’라고 생각했고, 쉬면서 도전했죠.”
그의 첫 작품에는 남궁민의 땀과 열정이 담겨 있다. 기획부터 캐스팅, 촬영, 편집까지 어느 것 하나 그의 손을 거치지 않은 것이 없다.
“캐스팅도 제가 했어요. <조선총잡이>를 재미있게 봤는데 그때 인상 깊었던 이동휘씨에게 직접 연락해 캐스팅 제안을 했죠. 흔쾌히 출연해주었고요. 지금은 대세가 됐지만 저는 단돈 50만원에 캐스팅했다고요.(웃음) 오정세, 정인기, 황영희 등 내로라하는 연기파 배우분들이 출연해준 덕분에 완성도 높은 작품이 나온 것 같아요.”
소년처럼 신나게 말을 잇던 남궁민이 잠시 멈칫했다.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더니 자기가 만든 영화의 스틸 영상을 보여주었다. “어때요?”라며 자랑하는 모습이 귀여웠다.
“처음 촬영장으로 가는 차 안에서는 ‘과연 잘할 수 있을까’ 걱정이 들었죠. 연기를 처음 했을 때 엄청 욕먹었던 것처럼 이번에도 욕먹을 각오로 하자고 생각했어요. 근데 해보니까 제 적성에 맞더라고요.(웃음) 낯설게 행동하지 않았던 것 같아서 만족해요. 이건 비밀인데요, 혼자서 ‘나 좀 잘하는 듯?’ 우쭐했어요. 작품이 어떤 평가를 받을지 아직 모르지만 감독으로도 인정받고 싶어요.”
연출 경험은 그의 연기에도 영향을 미쳤다. 자신의 연기를 다른 각도에서 보는 법을 터득했고, 촬영에 임할 때의 자세에 대해 반성했다. 상대 배우를 이해하는 방법도 배웠다.
“감독님들이 어떤 고민을 하며 연출하는지 이해하게 되니까 배우로서 연기할 때 더 책임감이 생기더라고요. 연기 내공의 중요성도 깨달았고요. 연기자 출신 감독이라는 타이틀에 편견을 가질 수 있는데, 그걸 깨는 게 제 목표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