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장 봉준호 감독
우리나라 최고 영화감독으로 웬만한 스타보다 더 유명한 봉준호. <살인의 추억>부터 <괴물> <마더> <설국열차>까지 네 작품 연속 박스오피스 1위에 오르는 등 내놓는 작품마다 인기를 끌었다. 특히 <설국열차>는 개봉하기도 전에 1백67개국에 판매됐고 해외 유수 언론으로부터 극찬을 받았다. 봉준호 감독은 2015년 세계 3대 영화제 가운데 하나인 베를린국제영화제의 공식 경쟁 부문 심사위원으로 위촉되기도 했다.
영화감독을 꿈꿨던 어린 시절
그는 자신의 어린 시절에 대해 평범한 아이였다고 말한다. 어정쩡하고 존재감 없는 학생이었던 봉준호에게 아버지의 서재는 종일 틀어박혀 지내고 싶은 보물 창고였다.“디자인을 전공한 아버지의 서재에 몰래 들어가 화집과 사진집을 보면서 놀았어요. 그때 시각적인 훈련을 많이 한 것 같아요.” 또 한 가지 큰 즐거움이라면 영화 감상이었다. 거장 ‘샘 페킨파’와 ‘알프레드 히치콕’의 공포물이나 서스펜스 같은 어두운 영화에 특히 흥미를 느꼈다.
“저는 이질적인 느낌이 충돌하는 것을 좋아해요. 아주 사소하고 일상적인 것에서 출발하지만 점점 기괴하고 만화적인 것들이 뒤섞이면서 그 둘이 충돌하는 긴장감이 느껴지는 영화를 만들고 싶었죠.” 영화에 심취하다 보니 직접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중3 때쯤 보고 싶은 영화를 직접 만들고 싶다는 꿈이 확고해졌다. 그러나 봉준호 감독은 대학 진학 당시 영화 대신 사회학을 선택했다. 배경지식을 넓히고 싶었기 때문이다. 대신 영화 동아리를 만들어 영화에 대해 공부하고 직접 만들어보기도 했다. “영화 동아리 할 때 비디오카메라가 너무 갖고 싶었어요. 학교 매점에서 6개월 정도 도넛을 팔아 비디오카메라를 샀는데 그때 정말 좋아서 그 카메라를 껴안고 잤던 기억이 납니다.”
리더십과 설득력은 필수다
영화감독이 되고 싶다면, 영화 찍는 일의 기본 특성부터 알아야 한다고 봉 감독은 말한다. 찍고 싶은 장면을 스크린에 펼쳐놓기 위해서는 아주 복잡한 단계와 큰 자본과 수백 명의 협조를 거쳐야 한다. 기본적으로 일 자체가 타인을 설득해야 하는 작업이다. “감독이 되면 자기의 관점을 정확히 정립하고 자신이 지향하는 방향으로 스태프는 물론 팀 전체를 아우르며 끌고 갈 줄 알아야 하고요. 그러려면 리더십은 기본이고 단체생활 속에서 끊임없이 자신이 원하는 바를 명확하게 표현하고 상대방을 설득해야 해요” 봉 감독은 영화감독으로서 평생 15편의 영화를 찍는 것이 목표란다. 초기작 시대는 이미 마무리했다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다.
요정이 아닌 악바리 손연재
2015년 충북 제천에서 열린 리듬체조 아시아선수권 개인종합 결승에서 손연재는 최악의 조건 속에서도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그녀는 금메달을 목에 걸 때마다 다섯 살 때 어머니의 권유로 리듬체조를 처음 배우던 때를 떠올린다. “어머니께 항상 감사드려요. 가장 가까이에서 저의 고된 훈련과 어려운 점을 지켜보는 일이 힘드실 거예요. 제가 경기를 할 때면 얼마나 긴장하시는지 두 눈을 감아버리시죠. 차마 제가 경기하는 모습을 지켜볼 수 없으시대요. 그런 모습을 보면 더 잘해내고 싶어요.”
굴욕을 딛고
손연재는 2010년 고등학교 1학년 때 시니어 세계선수권에 첫 출전했다. 당시 24명까지 결선에 진출할 수 있었다. 손연재는 당연히 그 24명 안에 들 줄 알았는데 32등을 하고 말았다. 그래서 광저우 아시안게임을 한 달 앞두고 체조 강국인 러시아로 혼자 유학을 떠났다. 그 당시 꽤 많은 훈련 비용이 필요했지만 후원이 없어 모두 사비를 털어 충당해야 했다.“부모님의 고충을 알기에 아파도 쉴 수 없었어요. 하루가 아까웠으니까요. 그래서 더 열심히 했어요. 부모님과 친구들 없이 갑자기 홀로 말도 안 통하는 곳에서 생활하려니 힘든 부분이 많았어요. 러시아에서는 스트레스를 풀 방법도 별로 없어요. 매일 트레이닝복만 입고 있다가 하루 정도 예쁜 옷을 입고 시내에 나가서 머리를 식히는 정도죠.”
에이스에 등극하다
2014년 포르투갈 리스본 월드컵에서는 개인종합 금메달 4개를 따고, 9월에는 터키 이즈미르 세계선수권대회 후프에서 동메달을, 곧바로 열린 10월 인천 아시안게임에선 대한민국 리듬체조 사상 첫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에이스가 된 것이다. “이젠 전문가가 아니면 볼 수 없는 디테일까지 완벽하게 소화해서 스스로에게 감동을 주는 연기를 하고 싶어요. 선수로서의 마지막 목표예요. 스스로의 기대치를 충족하고 감동할 수 있는 무대를 만들면 메달도 결과도 따라오지 않을까요?” 리듬체조 선수의 수명은 굉장히 짧다. 손연재도 선수 생활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미래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다. 체조계에 남아 후배들에게 도움을 주고 싶다는 생각이 가장 크다는 그녀. 무대를 떠나기 전까지 스스로가 만족할 수 있는 연기를 하겠다는 손연재의 꿈을 응원한다.
세계 챔피언 게임플레이어 이상혁
인기 온라인 게임 리즈 오브 레전드(이하 LOL)의 개발사 라이엇 게임즈는 프로 게이머 이상혁을 세계 최고의 선수로 선정했다. 그는 한국인 e스포츠 선수로는 최초로 미국 유명 스포츠 미디어 ‘ESPN’ 메인을 장식하기도 했다. “저의 강점은 게임의 흐름을 읽고 언제 싸워야 할지, 그리고 언제 싸우지 말아야 할지 아는 것이죠. 어떤 게임을 플레이하든 그 강점은 살아 있어요.”
챔피언의 게임 입문기
이상혁의 아버지는 아들에 대해 ‘스스로 찾아서 배우는 아이’였다고 말한다. 루빅스 큐브를 빨리 맞추고, 외국어를 배우기 위해 책을 찾아 읽었다는 것이다. 조용하고 조숙한 성격의 이상혁이 가장 큰 재미를 느낀 것은 게임이었다. “두 살 아래 남동생이 있는데 어릴 때 제가 게임하느라 컴퓨터를 독차지하는 바람에 동생은 게임을 많이 못 했어요. 지금은 친구들이 제 사인을 받아달라고 하는 경우가 많아 스트레스 좀 받는대요.”
게임을 많이 하긴 했지만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특히 수학을 좋아해서 네이버 ‘지식iN’에 올라오는 질문에도 답을 해주었단다. 프로 게이머의 꿈을 키워가던 어느 날 러너리그에서 우승을 하며 본격적인 프로 게이머의 길로 들어섰다. 이때 할 거면 한번 제대로 하자는 마인드로 결국 고등학교를 자퇴했다. 아버지의 걱정이 컸지만 오히려 담임선생님이 상혁이 정도면 나중에 검정고시 합격으로 얼마든지 대학 입학 자격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며 설득했단다. 하지만 이상혁은 이 결정에 대해 후회하고 있다. 공부를 해 자신을 발전시키는 것이 좋아 보이기 때문이라고.
프로 게이머가 되고 싶은 후배들에게
이상혁은 프로 게이머로서 최고를 달리고 있지만 자신의 플레이에 만족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경기에 패배할 때마다 늘 힘들다. 외부에서 느끼는 압박감도 크다. 그래서 더더욱 프로 게이머를 꿈꾸는 이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제가 프로 게이머가 되고 나서 아쉬운 것은 고등학교를 제대로 졸업하지 못한 거예요. 공부를 하다 보면 정말 게임을 하고 싶겠지만 저는 공부를 먼저 하라고 말하고 싶네요. 일단 꿈이 없다면 자책하지 말고 기다려야 해요. 꿈을 중·고등학생 때 정해야 한다는 법은 없으니까요.”
애니메이션의 신화 최종일
유아용 애니메이션 <뽀로로>를 세계 1백20국에 소개하며 한국 애니메이션에 대한 인식을 바꾸어 놓은 최종일. 어릴 적부터 그림 그리기와 만화책을 좋아하던 그는 ‘그림으로는 밥 먹고 살기 힘들다’는 이야기 때문에 고등학교 3학년 때 스스로 그림을 그만두었다. 많은 이가 선망하는 광고 회사에서 나름대로 인정을 받았지만 어느 날 문득 회의감이 찾아왔다.
신화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광고 일은 하룻밤만 새워도 피곤해요. 그런데 그림이라면 꼬박 밤을 새워 일해도 피곤하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그림을 일로 삼겠다고 결심했죠.” 화가로 나서기에는 무모하다고 생각해서 찾은 것이 애니메이션이었다. 당시 우리나라의 애니메이션 산업은 미국과 일본의 애니메이션을 하청 제작했는데 인건비가 높아지며 사양길에 접어들고 있었다. 하지만 기술력을 갖췄으므로 기획과 마케팅을 보완한다면 애니메이션을 제작해 세계시장에 배급하고 캐릭터 사업으로 고부가가치를 낼 수 있을 거란 판단이 들었다. 그는 <뽀로로>를 만들기 전 수많은 애니메이션을 보고 공부했다. 일본이 상대적으로 취약한 유아용 애니메이션에 집중했고 오락적인 내용을 배로 늘렸다. <뽀로로>는 성공하기까지 세 번의 실패를 거쳤다. 처음에는 아무도 캐릭터 사업을 제안하지 않아 최 대표 스스로 비싼 수수료를 물어가며 <뽀로로>를 그림 동화책으로 만들어 팔았다. 다행히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조금씩 성공 가능성이 높아지기 시작했다고 그는 말했다. “성공 비결을 알기보다는 실패를 통한 성공 노하우를 배우라고 강조하고 싶어요. 이전에 실패했던 경험을 교훈 삼아 자꾸 보완하다 보면 가능성이 높아지니까요”
거장에게서 겸허함을 배우다
최종일 대표가 가장 존경하며 닮고 싶은 애니메이션 거장은 바로 캐나다 출신의 프레데릭 백이다. “그분은 애니메이션을 혼자 다 만들어요. 기획부터 촬영까지 전 과정을 스스로 다 만들다 보니 한 작품을 완성하는 데 5년이나 걸리곤 하죠. 애니메이션을 너무 열심히 만든 나머지 한쪽 눈을 실명하기도 했고요, 팔십 평생 만든 작품이 열 편이 채 안 된다고 해요.” 국내에서 애니메이션으로 대성공을 거두었다고 평가받지만, 마음이 들뜰 때마다 거장의 작품을 보며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려고 노력한다는 최종일 대표. 그의 작품을 기다릴 수밖에 없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