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을 뜨고 싶다
요 며칠, 대한민국 사교육의 노른자위 대치동을 기웃거리다 보니 만사가 다 밉상으로 보인다. 제 몸통만 한 캐리어에 벽돌보다 무거운 미국 교과서를 쑤셔 넣고 휘청대며 끌고 다니는 ‘초딩’들에겐 놀이터에 가 친구하고 뛰어놀라 하고 싶고, 수학 학원 아래층 도너츠 가게에 우르르 모여 앉아 손에 쥔 정보를 쥐었다 폈다 ‘밀당’ 중인 엄마들한텐 ‘그렇게 똑똑해서 많이 공부하신 분들이 왜 본인 일은 안 하고 애 운전기사 노릇 하는 중이냐’고 묻고 싶다. 모든 게 아니꼽고 극성맞아 보이는 거다. 뭔가 있나 싶어 나 역시 그 동네를 여기저기 염탐하고 다녔으면서 말이다. 정확히 말하면 겁이 난다. 우리 애는 그래도 그 나름 똑똑하다고 생각했는데, 엉덩이 무거운 아이라고 생각했는데 열심히만 한다고 되는 게 아닌 것 같은 분위기에 이미 압도당한 것 같다. 수많은 학원이 장담한다. 우리 학원에 오면 성적이 향상된다고. 일정 기간 이상이 되면 상위 1% 안에 드는 건 시간문제라고. 엄마표로 우직하게 공부한 친구들도, 인터넷 강의에 주력했던 아이들도 결국은 마지막에 모이는 곳이 학원이라고 확신한다.
얼마 전에 아이 손을 잡고 소위 ‘빅3 학원’에 수학과 영어 테스트를 보러 갔다. 두 학원 모두 테스트를 보는 것 자체도 쉽지 않았다. 며칠을 기다리다 겨우 시험이라는 걸 볼 수 있었는데, 시험 내용을 보니 기본적으로 한 학년 이상 선행학습을 하지 않고서는 풀 수 없는 문제가 태반이었다. 그때가 밤 10시가 다 되어가는 시간이었는데, 아직 아기 티를 못 벗은 어린 친구들이 중등 수학 정도의 강의를 듣고 있는 모습에 화들짝 놀라기도 했다. 영어 테스트는 더 가관이었다. 업무에 찌들어 뵈는 선생이 어른 귀에도 잘 안 들리는 발음으로 재미없는 질문을 쏟아냈다. 영 성의 없는 인터뷰 자세와 아이 나이에 맞지 않는 질문들을 해대 그 자리에서 한소리 하고 나오고 싶었지만 다들 들어가고 싶어 안달 난 학원이라 끝까지 참고 지켜봤다.
결론은 두 곳 모두 일단 발을 들여놓으면 절대로 쉽게 빠져나올 수 없겠다는 것. 그들이 내미는 당근과 채찍에 매료돼 아주 깊숙이 중독되고도 남을 것 같았다. 두 곳 다 당장 등록은 하지 않고 생각을 좀 해보겠다고 하니, ‘이런 순진한 아줌마 봤나?’ 하는 표정으로 “여긴 일단 붙으면 다니는 학원이다. 나중에 오면 자리가 없을 수도 있다”는 걸 재차 강조했다. 불안감을 조성하는 건 학원도 있지만 사실 엄마들이 더하다. 네이버의 ‘◯◯ 1% 카페’에 들어가보면 “우리 집 애가 경시대회에서 대상을 탔네” “영재원 합격 축하해달라” “특목고 합격자 최다 배출 선생을 알려준다” 등등 아주 그냥 교육에 집착하는 엄마들이 바글바글하다. 대치동 학원 선생에 대한 깨알 정보부터 시작해 꽤 굵직한 고급 정보들을 비공개로 올려놓아 일단 가입을 유도한 뒤 교육 정보를 공유한답시고 난리도 이런 난리가 없다. 이런 카페는 왜 만들어 사교육을 조장하고 부모들 이간질에, 자식 자랑에 열을 올리게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학원 관계자들이 관여돼 있다는 건 지나가던 개도 알 수 있다.
국내판 ‘신기러기족’ 등장
아직 새 학기가 시작되기도 전이지만 요즘 드는 생각은 딱 이거다. ‘아~ 강남을 뜨고 싶다, 아니 대한민국을 뜨고 싶다.’ 이럴 때 가장 부러워지는 부류는 ‘경우의 수’를 폭넓게 둘 수 있는 돈 많은 집단이다. 내 나름으론 중산층으로 큰 불편함 없이 강남 한복판에서 안정적으로 살고 있다고 생각했으나 아이 교육과 관련된 부분에 맞닥뜨리면 여유 많은 그들이 속절없이 부러워진다. 대표적인 행보가 그들의 제주도행이다. 요 몇 년간 제주 국제학교에 아이를 입학시키기 위해 엄마와 아이들은 제주도로 가고 아빠는 서울에 남아 돈을 버는 국내판 ‘신기러기족’이 눈에 띄게 늘었다. 어차피 유학을 보낼 생각은 있었는데, 심리적으로 거리적으로 가까운 국내고 유학 자금에 비해 조금이라도 저렴한 제주 국제학교는 강남맘들에게 아주 큰 메리트로 다가온다.
제주나 송도의 국제학교를 전혀 생각해보지 않은 건 아니다. 강남에서 아이들은 공부 스트레스에 치일 테고 또 그 뒷바라지를 하느니 공기 좋고 경치 좋은 곳에서 조금이나마 덜 내달리며 ‘창의적이고 글로벌한 인재’를 만들자는 생각을 왜 안 했겠는가. 문제는 돈이다. TV 뉴스에 제주 국제학교 인근에 아파트를 구해 살고 있는 엄마의 인터뷰가 나온 적이 있다. 기자가 물었다. “1년 학비가 어느 정도 되나요?” 엄마 왈. “학비만으론 3천5백만~4천만원이 드는데 그 외 악기 레슨이라든지 다른 사교육을 하면 5천만원이 좀 넘는 것 같아요.” 다시 기자가 물었다. “아이 학비가 전체 수입의 몇 퍼센트를 차지하나요?” 엄마 왈. “5퍼센트? 그게 뭐 중요한가요? 아이의 행복이 어쩌구저쩌구… (중략)” 제주도나 송도의 국제학교가 달리 ‘귀족학교’라 불리는 게 아니구나 하면서 진즉에 맘을 접었다.
하지만 생각을 조금만 달리 해보면 왜 요즘 다들 제주도, 제주도 하는지 이해는 된다. 반포에서 초등학교 2학년까지 아이를 키우다 지난겨울 제주도로 내려간 A씨는 “제주도 국제학교 중에서도 학비가 가장 저렴한 곳에 아들을 보내고 있다. 인근에 집을 얻어 통학하고 있기 때문에 기숙사비를 안 내면 강남에서 사교육으로 아이를 키울 때와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 모든 수업이 영어로 이뤄지니 영어 학원은 물론 안 가도 되고, 외국 학력과 국내 학력이 동시에 인정된다는 점이 큰 장점이다”라며 “무엇보다 수업 중에 예술과 체육 활동이 광범위하게 많아 남자아이에겐 딱인 것 같다. 꼭 외국 대학을 목표로 하는 건 아니다. 나중에 아이가 국내 대학에 진학하길 원하면 그쪽으로 밀어줄 거고 지금은 다양한 세계관을 경험하게 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주말에는 바닷가에 가 하루 종일 놀면서 재충전하고 평일엔 다시 집중해서 수업을 듣더니 아이의 얼굴빛이 달라졌다”고 말한다.
하긴, 강남에서 취학 전 아이를 3년간 영어 유치원에 보내면 못해도 대략 7천만원이 넘게 소요된다. 그에 비해 제주 국제학교의 킨더 클래스는 연간 학비가 1천6백만~1천8백만원 선이니, 학비 면에서는 경쟁력이 있는 편이다. 또한 아이가 공부만 잘하기를 바라는 엄마들보단 협동심, 글로벌한 안목을 지닌 창의적 인재가 되기를 바라는 부모들의 가치관이 반영되면서 국제학교의 인기는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말은 나면 제주도로 보내고 사람은 나면 서울로 보내라”는 속담이 이제 “말은 나면 과천으로 보내고 사람은 나면 제주도로 보내라”로 바뀌어야 할 분위기다.
열에 셋은 되돌아온다
현재 제주에는 2011년 문을 연 영국 ‘NLCS(North Lodon Collegiate School, 노스런던칼리지에잇스쿨) 제주’와 우리나라가 운영하는 ‘KIS(Korean International School, 한국국제학교) 제주 캠퍼스’, 이듬해 개교한 캐나다 ‘BHA(Branksome Hall Asia, 브랭섬홀 아시아)’ 등 총 3개의 국제학교가 있다. 2017년에는 미국 ‘SJA(St. Johnsbury Academy·세인트존스베리아카데미)’가 개교할 예정이다. 졸업생들의 진학 성적도 나쁘지 않다. 2년 전 첫 졸업생을 배출한 NLCS는 국내 대학을 목표로 한 2명을 제외하고 52명이 모두 해외 대학 입학 허가를 받아 96.2%의 해외 대학 진학률을 기록했다. 특히 합격생의 30%에 해당하는 12명은 세계 랭킹 10위권의 대학에 진학했다.
지난해 첫 졸업생을 배출한 BHA도 국내 대학을 목표로 한 2명을 제외하고 30명이 모두 해외 대학에 합격해 93.7%의 진학률을 기록했다. 특히 30명 가운데 12명이 장학금을 받게 됐는데 그중 3명은 4년 전액 장학금을 받는다. 학비 때문에 문턱이 높긴 하지만 일단 결과물만 봐서는 더욱 구미가 당기는 건 사실이다. 이렇다 보니 단연 발 빠른 귀족층의 자녀, 소위 ‘금수저’들은 진즉에 송도와 제주도의 국제학교에 발을 담그고 있다. 롯데그룹 신격호 회장, 애경그룹 장영신 회장, 신세계 그룹 정용진 부회장의 자녀 등이 송도 채드윅 국제학교에 다니고 있고 최근 송사에 휘말린 개그맨 이혁재의 아이들도 이 학교에 다니고 있는 것으로 밝혀져 논란이 되기도 했다.
또한 고향이 제주인 김희애는 지난 2009년 제주도의 비벌리힐스라 불리는 서귀포시 인덕면에 별장을 구입해 두 아이를 제주 국제학교에 보내고 있다. 정기 수업 외에 럭비, 스킨스쿠버, 승마 등을 배울 수 있어 아이들의 만족도가 높다고. 김승우·김남주 부부도 한림읍 중앙에 조성된 럭셔리 타운하우스를 구입해 아이들 교육에 열중하고 있다. 알려진 바로는 노천탕이 딸린 고급 요트장과 수영장, 골프장이 구비돼 있다는데 자식 교육을 위해서라면 다방면으로 노력하는 건 유명인들도 마찬가지. 되레 몇 년 전 시끄러웠던 유명인 자제의 외국인학교 부정 입학 사건을 거울 삼아 말 많은 그곳에 굳이 아이를 보내기보단 조용하고 경치 좋은 제주에 많이들 몰리고 있다.이쯤 되니 제주의 땅값은 불과 몇 년 사이에 배로 껑충 뛰어올랐다. “아직은 서울과 비교할 수 없다” “제주영어교육도시 주변은 썰렁함 그 자체다” 등 말도 많지만 제주 인구수가 2년 사이 훌쩍 올라간 것만 봐도 제주 국제학교의 인기를 실감할 수 있다.
하지만 서울서 도피 형식으로 제주로 내려온 아이들과 부모에 대한 우려의 시각도 있다. 1년 전 제주로 간 B씨는 “한국 학교가 아니라고 해서 결코 만만하게 봐서는 안 된다. 부모가 영어가 안 될 때는 과외 선생을 모셔야 할 정도로 학년이 올라갈수록 수업이 타이트해진다. 서울에서 사교육을 하던 버릇을 못 버리는 엄마들 중에는 주말에 서울로 데려가 학원 특강을 듣게 하고 다시 제주로 데리고 오는 이들도 있다. 어딜 가나 극성 엄마들은 있으니 쉽게만 생각하고 와서는 안 된다”고 당부한다. 실제 ‘제주 국제학교 학부모 모임’이란 인터넷 카페에 가보면 쉽지 않은 제주살이에 대한 단상들이 올라와 있다. “지척에 백화점, 병원, 마트가 있던 서울에 살다 와 그런지 적응이 아직 안 됐다. 괜찮은 음식점을 소개해달라” “차가 없으면 도서관 한 번 가는 것도 쉽지 않던데 아이와 주말에 갈 만한 곳을 알려달라” 등등…. 또 학비가 비싼 만큼 커리큘럼에 대한 기대가 컸던 일부 학부모 중에는 “오히려 강남에 있을 때보다 아이의 영어 실력이 늘지 않았다”며 수개월 만에 이삿짐을 꾸려 서울로 리턴하는 경우도 열에 셋은 있다. 국제학교의 특성상 자율적인 분위기 속에서 아이의 잠재력을 믿어주는 분위기니 성질 급한 부모 중에는 이 또한 미덥지 않은 이들이 있을 터.
해외 유학이 시들해진 반면 국제학교의 인기가 치솟다 보니, 최근의 핫한 강남 학원들에선 ‘국제학교 테스트 대비반’이 인기고 국제학교 입학을 보장해준다는 고액 ‘새끼 과외’가 판을 친다. 어린 나이일수록 입학시험 문제가 쉽다 보니, 유치부부터 초등학교 1·2학년 때 일찌감치 국제학교의 관문을 통과시키려는 부모가 많기 때문이다. 반면, 국내 아이들이 대다수인 국제학교가 무슨 의미냐며 종전처럼 해외 유학을 알아보는 강남맘도 여전히 있다. 신애라, 오연수의 경우만 봐도 아이들 미래를 위해 미국행을 택했다.
아이들의 진로를 고민하는 부모들을 싸잡아 비난할 생각은 없다. 다만, 교육은 절대 유행을 따라서는 안 되고, 맹목적인 추종이어서도 안 된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우리나라의 교육 정책은 대통령에 따라 수시로 바뀐다는 점을 잊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