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성황리에 종영한 tvN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이하 <응팔>)의 ‘정봉이 패션’이 화제다. 무심히 걸치고 나온 듯한 88올림픽 호돌이 티셔츠 위에 당당하게 치켜 올려 입은 새파란 컬러의 트레이닝팬츠는 단언컨대 2015 F/W 너드(Nerd) 열풍에 절대로 뒤지지 않는다는 것. 오히려 오타쿠계에 새로운 트렌드를 창조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봉이’는 매일같이 현란한 원색 컬러의 트랙 슈트(위 아래가 같은 트레이닝 복)만 입은 채 방 안에 틀어박혀 공부는 하지 않고 다른 무언가에 빠져 있는, 말 그대로 ‘오타쿠’다. 집에만 있는 6수생이기 때문에 용서가 되는 패션인 셈이다. 그런데 이번 2016 S/S 패션 위크에 놀라운 이변이 일어났으니, 바로 내로라하는 패션 브랜드의 런웨이에 ‘정봉이 패션’이 등장한 것.
먼저 끌로에와 타미힐피거 컬렉션을 살펴보자. 끌로에의 위아래 컬러가 동일한 톤 다운된 레드 컬러 트레이닝복은 이번 S/S 시즌 운동복과 일상복을 결합한 ‘애슬레저 룩’ 트렌드를 반영하는 지침서라고 보면 될 듯하다. 타미힐피거는 스웨이드 소재와 컬러 블록으로 이국적인 느낌을 더한 트레이닝복으로 또 다른 트랙 슈트의 매력을 선사하기도 했다. 스포티 룩의 대표 주자 알렉산더왕은 이번에도 역시 모던하면서 정제된 실루엣의 스포티 웨어를 선보였다.
그렇다고 ‘정봉이’가 마냥 트랙 슈트만을 고집하는 것은 아니다. 워싱이 더해진 청청 패션(데님 재킷에 데님 팬츠를 매치)에 이너로 러블리한 베이비 핑크 셔츠를 입고 여자친구를 만나러 가기도 하는 로맨틱한 순정남이다. 청청 패션을 선보인 2016 S/S 컬렉션으로 루이비통과 끌로에, 마크제이콥스를 꼽을 수 있다. 루이비통의 데님 점프슈트와 물 빠진 청청 패션을 완벽하게 소화해낸 마크제이콥스의 룩에서는 과거에 대한 향수가 묻어난다. 또 카니예 웨스트의 스타일 디렉터 출신 버질 아블로가 론칭한 브랜드 ‘오프 화이트(Off White)’도 리바이스에서 가져온 빈티지 데님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해석해 점프슈트를 만들었다.
<응팔>의 주인공 ‘덕선이’와 붙어 다니던 ‘친구2’가 ‘장만옥’이다. 쌍문여자고등학교에서 처음으로 치아에 교정기를 착용하고 학교를 다닌 ‘덕선이’의 부잣집 친구다. 또한 극 중 ‘정봉이’의 여자친구로 깨알 로맨스를 선사한 그녀가 가장 선호하는 데일리 룩은 바로 터틀넥. 일명 야구 점퍼로 불리는 스타디움 점퍼 안에 터틀넥 니트를 입은 ‘만옥이’의 모습을 극 중에서 종종 보았을 것이다. 청청 패션에 스카프를 매는 귀여운 기지를 발휘하는 것도 ‘만옥이’만의 스타일링 센스. 그리고 모든 의상에 포인트로 벨트를 착용하는 것도 주목할 만한 점이다.
이번 S/S 컬렉션에는 ‘만옥이 패션’도 대거 등장했다. 우선 샤넬, 펜디, 끌로에, 트루사르디, 마크제이콥스를 살펴보자. 펜디는 크롭트 재킷에 조거 팬츠 형태의 하이 웨이스트 팬츠를 매치해 복고적이면서도 귀여운 느낌의 룩을 선보였다. 이 팬츠 스타일은 만옥이가 경주로 수학여행을 갔을 때 입었던 팬츠의 느낌과 동일하다. 또 ‘만옥이’가 평소에 자주 신는 화이트 스니커즈는 토즈의 보트넥 슈즈와도 일치한다.
마크제이콥스의 컬렉션이야말로 제대로 ‘만옥이’ 패션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컬렉션. 스타디움 점퍼의 다양한 스타일링을 보여준 것은 물론 타탄·마드라스·윈도우페인·아가일 체크 등 체크의 향연을 보여줬다 해도 과언이 아닌 이번 마크제이콥스 쇼는 1980~90년대의 추억에 흠뻑 빠지게 만든 쇼임에 틀림없었다.
엠포리오 아르마니와 토즈의 컬렉션에서는 ‘만옥이’의 스카프 스타일링을 복고적인 느낌으로 보여줬다. 샤넬의 크루즈 쇼와 구찌 컬렉션은 정봉이와 헤어졌다 다시 만나러 갈 때 몰라보게 아름다워진 ‘만옥이’가 입고 나갔던 그 룩을 선보인 대표적인 쇼. 특히 샤넬 크루즈 쇼는 베레에 체크 원피스를 입고 니삭스에 메리제인 슈즈 신고 나타난 ‘만옥이’의 패션을 그대로 재현한 듯한 착각마저 불러일으킨다.
Tod’s
패션 업계는 몰라보게 진화했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지구 반대편의 신상품을 체크할 수 있고 마음에 드는 브랜드가 있으면 클릭 한 번으로 구매가 가능한 시대가 된 지 오래다. 지금 에디터가 이 기사를 쓰고 있는 순간에도 어느 곳에서 누군가가 어떤 스타일링으로 관심을 끄는 SNS 기사를 올릴지 모르는 일이다. 그래서일까? 대중은 빠르게 진화하는 패션 속에서 과거로의 회귀를 갈망하기라도 하듯 <응팔>에 열광했고, <응팔>의 패션에 주목했다. 이 열풍이 언제까지 갈지는 좀 더 지켜봐야겠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