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경택 감독은 약속 시간보다 40분가량 먼저 도착해 오랜만에 주어진 휴식 시간을 만끽하고 있었다. 환하게 웃으며 먼저 악수를 청하는 모습에서 옆집 아저씨 같은 친근함이 느껴진다.
곽경택. 무언가 일어난다는 뜻의 한자 경(暻)과 연못 택(澤)을 쓴다. 작은 연못에서도 큰 일을 일으키라는 뜻으로 큰아버지가 지어준 이름이란다. 부산에서 태어나 의사인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의대에 갔지만 ‘멋있게 살 것 같은’ 생각에 무작정 떠난 뉴욕 유학길.
귀국 후 한국 영화계에 파란을 일으킨 그의 삶에 딱 맞는 이름이다. 전에 없던 스타일과 색감, 스토리텔링으로 제자리걸음이던 한국 영화 시장을 한 단계 성장시킨 곽 감독이 13번째 작품을 내놓았다. 사주풀이로 유괴된 아이를 찾은 형사와 도사의 33일간의 이야기를 그린 <극비수사>. 김윤석과 유해진이 작품의 중심을 잡았고, 여기에 장영남, 송영창, 이정은 등 연기파 배우들이 묵직한 힘을 보탰다.
“2013년 <친구2> 시나리오를 완성해나가는 단계에서 1960~70년대 건달 이야기를 넣고 싶다는 생각을 하던 중에 아버지의 추천으로 공길용 형사님을 만났어요. 과거에 맡았던 사건들에 대해 이야기를 듣던 중 김중산 선생님의 이야기를 접했고 흥미로운 소재라는 생각에 취재를 시작했죠. 영화에서 그려지는 것처럼 공 형사님은 단단한 분이세요. 외모와 말투, 눈빛 모두 단단한 느낌이랄까요? 어떤 범인도 이분 앞에서는 자백하겠구나 싶은 생각이 강하게 들었죠.”
공길용 형사와 김중산 도사 역을 맡은 김윤석과 유해진이 만들어내는 시너지가 엄청나다. 부산 출신 김윤석은 치열한 공길용과 닮았고, 유해진은 스스로를 다듬으며 성장해나가는 옆집 아저씨 같은 분위기의 김중산 도사와 비슷했다.
“두 사람 다 센 배우죠? 그런데 알고 보면 부드러운 사람들이에요. 그동안 사석에서 마주칠 기회가 없었는데 이번 작품을 하면서 처음 만났죠. 윤석씨와는 첫 만남에 오후 다섯 시부터 술을 마셨고, 해진씨와는 간단한 반주 정도만 했어요. 두 사람 모두 작품에 임하는 자세는 철두철미하지만 속내는 누구보다 소프트하더라고요. 특히 해진씨는 겉으로 보이는 카리스마와 다르게 쑥스러움이 많은 사람이에요. 나도 같이 쑥스러워해야 하나 싶을 정도로요.”
곽 감독에게는 공길용 형사가 사건을 대하는 태도, 김중산 도사의 서민적인 느낌을 만들어내야 한다는 과제가 있었다. 촌각을 다투는 작업이었지만 김윤석과 유해진을 재촉하지 않았다. 관록이 대단한 두 배우와 시간의 힘을 믿었다. 자주 만나 서로를 탐색하는 시간은 영화를 만드는 데 있어 가장 먼저 수행해야 하는 중요한 작업이라고.
“제작자와 배우가 함께 보내는 시간이 굉장히 중요하다는 걸 깨달았어요. 작품 속 케미스트리는 우리가 함께 보낸 시간에 비례하는 거더라고요. 눈빛만 봐도 알아챈다는 일명 찰떡 호흡은 서두른다고 생기지 않아요. 대본 리딩 후 저녁을 함께 먹으며 서로 살아온 인생을 이야기하는 것, 가끔 진한 술 한잔으로 서로에 대해 알아가는 게 우선이에요.”
지난해 5월부터 9월까지, 약 1백 일을 동고동락한 세 사람. 소통했던 덕분에 완성도 높은 작품을 만들 수 있었다. 부와 명예의 기회비용이 ‘포기’인 감독이라는 직업. 머릿속에 있는 그림을 그대로 그릴 수 없어 포기했던 몇몇 요소를 제외하면 처음 그렸던 그림과 싱크로율이 높다. 일각에서는 곽 감독의 대표작 <친구>를 잇는 작품이라고 평가했다.
“녹음실에 편집본을 가져갔더니 ‘<친구> 다음으로 재미있게 봤다’고 하더라고요. 반대로 생각하면 그 이후의 작품이 그렇게 재미없었나 싶기도 해요.(웃음) <극비수사>는 제가 할 수 있는 역량의 최대치를 끌어낸 작품이에요. 마지막까지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세심하게 결정했어요. 자신도 모르게 타협하기 때문에 자기 작품에 대해 객관적일 수 없는 직업이 감독인데, 이번 작품만은 냉정하게 평가하려고 무던히 노력했어요. 블라인드 시사회에 다 참석해 관객의 반응을 꼼꼼히 살폈고,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을 발견하면 처음부터 다시 편집했어요.”
뉴욕에서 영화를 공부했기 때문에 독립영화의 색깔이 짙었던 곽 감독. 그는 부산 사나이의 우정을 그린 <친구>가 흥행한 후 원래의 자리로 되돌아갔다. <똥개>나 <태풍>처럼 장르적 색채가 짙은 작품을 연출했고 <사랑>과 <통증>의 메가폰을 연달아 잡으며 감독 특유의 짙은 감성을 드러냈다. <미운 오리 새끼>라는 실험정신 투철한 작품으로 이어졌던 그가 도전을 멈추고 <친구2>로 상업영화행 버스에 다시 올랐을 때 사람들이 거는 기대는 엄청났다.
유오성과 다시 만났고 신예 김우빈을 기용한 <친구2>를 세상에 내놓았지만 반응은 예상외로 저조했다. 흥행 감독으로서 최고의 대우를 받다가 흥행 참패로 ‘한물 간’ 감독이 되기도 했다. 곽 감독은 지난 10년 동안 천국과 지옥을 수차례 오고 갔다.
“어떤 분들은 오달수, 김준구가 출연한 <미운 오리 새끼>를 극찬하세요. 과거 방위병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나라의 성장통을 잘 표현했다는 평가를 받았어요. 하지만 결과적으로 10만 명이 채 보지 않은 실패한 작품이 됐고, 경제적으로, 정신적으로 위기를 가져다 준 영화예요. 소위 망하고 나면 주변에서 ‘다음 작품은 잘될 거야’라고 위로하는데 그럴 때마다 저는 이렇게 말해요. ‘잘될 때까지 하지 뭐’라고요.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게 제가 도전할 수 있는 힘인 것 같아요.”
<태풍>의 실패 후 슬럼프에 빠졌을 때 지인의 말이 스파크가 되어 가슴에 튀었다. “수천 점의 작품을 남긴 피카소의 대표작은 2백여 점에 불과하다. 모름지기 창작자는 최고가 되기 위해 작업하면 안 된다. 열심히 하다 보면 사람들이 알아주는 최고의 자리에 앉을 수 있을 것이다.”
“영화는 다른 사람의 투자를 받아 제작하잖아요. 실패하면 그것에 대한 책임은 온전히 감독의 몫이죠. 무엇보다 ‘이 영화 잘될 거야’라는 믿음으로 출발했는데 제 생각이 그리 옳지 않았다는 걸 스스로 인정해야 할 때가 가장 힘들어요. 결국은 캐스팅입니다. 탄탄한 시나리오가 바탕이 되어야 좋은 캐스팅이 나오고, 좋은 결과물을 얻게 되죠. 캐스팅이 잘 안 되는 작품은 시나리오가 틀린 거예요. 완벽한 시나리오를 얻기까지 혼자 싸우는 시간이 가장 힘든 시간입니다.”
감독으로서의 고충은 이것만이 아니다. 선뜻 나서는 투자자가 없을 때, 예쁘게 그려질 거라고 예상했는데 아무리 애를 써도 마음에 드는 장면이 나오지 않을 때는 속상한 마음을 감출 길이 없다.
“작업할 때 감정의 기복이 심해요. 촬영 결과물이 좋으면 아이처럼 좋아하다가도 잘 안 되면 하늘이 무너지는 것처럼 좌절하죠. 작품에 대해서만큼은 일희일비하게 되는 것 같아요. 어떻게 생각하면 저 스스로가 한심하기도 합니다. 오죽하면 스태프들이 ‘조욱증 환자’라는 별명을 지어줬겠어요. 제가 ‘좋을 때’와 ‘욱할 때’밖에 없다고요.(웃음)”
담담하게 말하면서도 유쾌하게 웃는 모습이 영락없는 소년 같다. 안경 너머로 보이는 반달 눈웃음이 매력적인 곽 감독. 올해로 지천명인데, 지난해 12월 31일 제야의 종소리를 들으며 만세를 불렀다고 털어놨다.
“계속 꼬이고 잘 안 되는 일이 반복됐던 40대가 지나간다는 생각에 마냥 좋았어요. 지난 10년은 인생 최대의 위기였죠.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일이 잘 풀리지 않았던 이유가 모두 저에게 있었어요. 스스로 잘난 줄 알았고 조심스럽지 못했죠. 조금만 더 신중하게 행동했다면 겪지 않아도 될 일을 겪었어요. 또 모르죠. 5년 후에 현재를 되돌아봤을 때 제가 너무 철없는 사람이었을지도요.”
철없던 40대보다 더 철없었던 서른한 살. 패기 넘치던 곽 감독은 주목받지 못하는 한국 영화를 세계에 알려보겠다는 뚝심 하나로 영화를 시작했다. 상대적으로 잘 알려진 중국이나 일본 영화와는 다른 무언가를 만들어내고자 했던 그가 선택한 소재는 다름 아닌 목욕탕이었다.
“때밀이 문화는 전 세계 어디에도 없어요. ‘이거다’ 했죠. 우리나라에만 있는 목욕탕을 소재로 한 작품을 만들면 세계에 한국 영화를 알릴 수 있겠다는 생각이었어요.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고 덤볐던 거죠.”
잠시 생각에 잠긴 곽 감독은 과거의 자신을 두고 ‘한심한 청년’이라고 말했다. 서른한 살 때 만든 첫 작품이 얼마나 대단한 작품이었겠느냐며. 지금 생각하면 데뷔작 <억수탕>에 투자해준 사람들에게 미안하단다.
“고 김종학 감독님이 제 첫 영화인 <억수탕>의 제작자였어요. 그 시나리오를 인정해주신 분은 <모래시계>의 송지나 작가님이고요. 유학파라는 이유로 따돌림받던 저를 키워주신 분들이죠. 그런 의미에서 저는 영화판 태생이 아니에요. 그분들이 저의 뭘 믿고 투자해주셨던 걸까요?”
궁금했다. 지난 20년간 영화판에서 뒹굴고 구르며 최고 감독의 자리에 오른 그의 일상이. 곽 감독이 직접 밝힌 그의 일상은 생각보다 평범했다. 겉으로는 화려해 보여도 특별할 것 없는 기자의 일상처럼 말이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 제가 느끼는 감독이라는 직업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죠. 되게 화려한 줄 알아요. 사실은 그렇지 않거든요. 저는 연예인들의 이름도 잘 몰라요. 제 일만 하니까 같이 작업해보지 않은 사람들은 잘 모를 정도로 시야가 좁죠. 한 작품에 빠지면 대개 1년 이상씩 몰두해야 하니까 주변에 관심을 갖고 즐길 수 있는 시간이 별로 없어요.”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닌 기자의 삶과 이렇게 비슷할 수 있을까? 감독이라는 직업은 직접 듣고 보지 않으면 쓸 수 없는 기자와 매우 닮아 있었다. 심지어 어떤 하루도 똑같은 날이 없이 스펙터클하다는 것도.
“영화를 만드는 작업이 되게 좋아요. 한 편의 영화가 탄생하기까지 다양한 국면을 맞이해야 하죠. 먼저 아이템이 도출되면 취재를 시작합니다. 다양한 사람을 만나 이야기를 듣는 게 우선이에요. 그다음은 일명 ‘책상바리’라고 하죠. 자리에 앉아 시나리오를 만드는 작업을 몇 개월 동안 합니다. 그리고 가장 재미있는 작업이 시작돼요. 장소 헌팅이오. 이곳저곳을 다니며 시나리오와 어울리는 장소를 물색해야 해요. 그리고 촬영인데요, 촬영장에서 감독은 대장이잖아요. 무언가를 진두지휘한다는 게 부담스럽지만 기대되는 작업이에요. 그리고 편집을 하면서 또 꼬물꼬물 뭘 만지는 작업을 합니다. 이렇게 하루하루가 다른 삶을 사니까 지루할 틈이 없죠. 정말 재미있는 직업이에요. 가끔 힘들 때는 때려치우고 싶기도 하지만 아직까지는 99.9% 만족합니다.”
그는 벌써 새 작품의 기획 작업에 돌입했다. 게으름과는 거리가 멀다. 대한민국 대표 감독 곽경택이다.